69화
고백
남자가 도와달라고 하자, 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데요?”
“여기 슈퍼가 어디 있지?”
“슈퍼요?”
바로 눈앞에 있는 슈퍼를 찾는 아저씨를 보며 태오는 갸웃했지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줬다.
“저기요.”
“아, 저기 있었구나. 아이고, 애가 똑똑하구나.”
아저씨는 태오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근데 쓰다듬는 정도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쓰다듬는 아저씨였다.
“아야!”
결국 머리카락이 아저씨의 손가락에 걸리자 태오는 인상을 썼다.
“아저씨, 아프잖아요.”
“아, 미안. 네가 너무 똑똑해서 그만… 그럼 태오야, 고맙다.”
남자는 씨익 웃고는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아저씨, 슈퍼 거기 아닌데….”
슈퍼를 물어봐 놓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아저씨를 보며 태오는 또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이상한 아저씨야….”
태오가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며 분리수거장으로 향하는데, 이모님이 뛰어왔다.
“태오야, 찾았잖아.”
“저 여기 잠깐 분리수거장 가려고 했는데….”
“아이고, 없어진 줄 알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죄송해요.”
“근데 저 남자 뭐니?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
“슈퍼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는데, 슈퍼 저기인데 다른 데로 가요. 잘못 알았나 봐요.”
“그래? 암튼! 어디 갈 거면 말하고 가. 알았지?”
“네. 저 잠깐 분리수거장 가려고 한 거예요.”
“거긴 왜?”
“물 구하려고요.”
“물?”
태오는 이모님의 손을 잡고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한편, 태오의 머리를 쓰다듬던 남자는 주차장으로 가서 고급 세단의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
창문이 내려가자, 방 실장이 얼굴을 드러냈다.
“가져왔어?”
“네.”
어느새 태오의 머리카락을 비닐 봉투에 담은 남자였다.
“여기 있습니다.”
방 실장은 태오의 머리카락을 받아들고, 남자에게 돈 봉투를 넘겼다.
“비밀 지켜.”
“네, 물론이죠. 이런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오.”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자, 창문이 올라가고, 차는 곧 출발했다.
* * *
태성은 서현의 오피스텔 앞에 멈춰 섰다.
답답한 마음에 차를 몰고 나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였다.
태성은 운전석에 앉아 핸들에 기댄 채 오피스텔 입구를 바라봤다.
어느새 초점이 흐려지고, 머릿속엔 또 서현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아이를 업고 가는 서현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상도 못 했던 서현의 모습이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서현의 모습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눈앞에서 마주하고 나니 꿈을 꾼 것만 같아 태성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서현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했던 것도, 집에 못 들어오게 했던 것도,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했던 것들도 다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아이가 있어서였다.
아이 엄마였기 때문에….
태성은 서현을 안았던 날이 떠올랐다.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서현이었다. 그때는 이런 의미의 미안함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이것 때문에 미안하다고 한 거였나….
태성은 자꾸만 머릿속을 괴롭히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자, 태성은 서현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 받아. 당장 찾아가기 전에.」
문자 메시지를 여러 번 보냈는데도 답장을 하지 않던 서현이었다. 이젠 태성도 한계였다.
서현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거로 뜨자, 태성은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드디어 전화를 받는 서현이었다.
“협박을 해야 받는 거지?”
-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 하자.”
- 미안해요.
“서현아….”
-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는데 어떡해요, 그럼…
“후… 지금 통화는 가능해?”
서현은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태오와 함께 있는 집에서 통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매니저와 함께 있을 때 통화하는 게 편했다.
- 네, 말해요.
“이렇게 계속 피할 건가? 언제까지?”
- 조금만 시간을 줘요.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그래요.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는데?”
- 연락할게요.
여전히 태성의 집안이 무서운 서현이었다. 이젠 혼자도 아니고, 태오까지 함께 상처를 받을 수도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 이런 서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태성은 답답할 뿐이었다.
“정확히 말해. 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옥 같으니까… 내가 당신 얼마나 기다린 지 당신도 알잖아.”
서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현아, 우리 이러지 말자. 나 당신이랑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너무 아깝다고.”
수화기 너머로 서현이 흐느끼는 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 미안해요… 연락할게요.
“잠깐만 서현아.”
서현이 전화를 끊으려다가 멈칫했다.
“마지막으로 이 말만 들어줘.”
- ……?”
“아이 아빠를 다시 만난다거나… 지금 다른 남자가 있는 건가?”
- 태성 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랬다면 나 그날….
서현이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태성이 대신 말을 이었다.
“그래, 당신이 나한테 안기지 않았겠지. 그럼 됐어.”
- 네?
“그럼 문제될 거 없다고.”
- 무슨 말이에요?
“나 당신 기다리면서 별의별 생각… 정말 안 해본 생각이 없었어. 그래도 돌아와만 달라고. 그래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나야.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한테 돌아와 줬는데, 내가 못 받아들일 게 뭐가 있나 싶다. 나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 하는 거야, 지금. 당신 아이면 난 좋다고. 당신 아이면 내 아이지.”
- 태성 씨….”
“그날 많이 놀랐다면 미안. 이 말 해주고 싶어서 간 거였어.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말아줘라. 힘드네. 이만 끊을게.”
전화를 끊은 태성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진심을 전달했으니, 이제 서현을 기다리는 것밖에 태성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태성은 집에 돌아가려고 차에 시동을 걸려다가 태오를 발견했다.
“어?”
태성은 반가움에 차에서 내렸다.
“태오야.”
“어? 아저씨?”
“놀고 있었어?”
“네. 아저씨는 또 애인 만나러 왔어요?”
“응, 이제 가려고. 그런데 너….”
흙투성이가 된 태오를 내려다본 태성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너 엄마한테 혼나겠다.”
태성이 옷을 대충 털어주자, 태오도 함께 제 옷을 털었다.
“괜찮아요. 이렇게 털면 돼요.”
전혀 흙이 털리지 않는 걸 보고 태성은 피식 웃었다.
“안 될 것 같은데?”
“아… 큰일 났다.”
태성이 그런 태오를 귀엽게 바라보다가 불현듯 서현의 아들이 떠올랐다.
“태오야.”
“네?”
“태오 친구들은 뭘 제일 좋아해? 로봇 좋아하나?”
“네.”
태오가 알아듣지도 못할 로봇 이름을 나열하는데, 태성은 입이 떡 벌어졌다.
“넌 그걸 다 외워?”
“네!”
“너 똑똑하구나?”
“제가 좀 그래요.”
“아, 맞다! 미술상 받은 게 너 맞지?”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전시된 거 봤거든. 그림 잘 그렸던데?”
“우와 신기하다. 그걸 어떻게 봤어요?”
“그 미술관 관장님이 아저씨 엄마거든.”
“아… 대장님이 아저씨 엄마예요?”
“대장님?”
“네, 미술관 대장님요.”
“아… 대장님 맞지… 맞네.”
태성이 즐겁게 태오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이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야, 이제 들어가자.”
“네!”
태오는 이모님을 향해 대답하고는 태성에게 인사했다.
“아저씨! 저 들어갈게요.”
“그래. 또 보자.”
“네! 아, 아저씨 애인이랑 화해했어요?”
“아직.”
“미안하다고 안 했어요?”
“했는데, 아직 대답을 안 해주네.”
“사과는 받아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받아주겠지?”
태오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모님 목소리가 또 들렸다.
“태오야, 들어가야지.”
“네!”
태오는 태성에게 급히 인사를 하고 이모님을 향해 달려갔다.
태성은 태오의 뒷모습을 서현의 아들도 저러려나 싶어 빤히 쳐다봤다.
그때 서현이 등에 업혀 있던 아이가 저 또래 같았는데…
태성은 서현의 아들을 상상하며 돌아서서 차로 향했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마침 서현의 매니저 차량이 멈추는 게 보였다.
멀리서 보고만 가자 싶어 바라보는데, 서현이 차에서 내렸다.
“오늘도 예쁘네.”
태성이 혼자 중얼거리며 서현을 바라봤다.
근데 그때 서현을 향해 한 아이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
“어? 저 아이는….”
서현의 품에 안긴 아이는 태오였다.
태성은 눈을 씻고 다시 쳐다봤다.
다시 봐도 태오가 확실했다.
흙투성이가 된 채 서현의 품에 뛰어든 태오였다.
보아하니 서현이 태오의 옷을 보면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들을 혼내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태오가 서현이 아들?
그럼 저 아주머니는?
서현이 태오와 아주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지만 태성은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
태오가 정말 서현이 아들… 장태오… 장서현… 오스트리아… 피아노… 쇼팽… 바나나 알레르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고, 태오와 함께 다니는 아주머니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데 그때였다.
오피스텔 입구에서 태오와 항상 함께 다니던 아주머니가 나왔다.
가방을 들고 나가는 모습이 퇴근을 하는 것 같았다.
“아이 돌봐주시는 분인가?”
그러면 모든 퍼즐이 맞아 들어갔다.
분명 태오는 지난번에 태성에게 우리 엄마를 본 적 없지 않냐고 물었었다.
“저 아주머니가 엄마가 아니었어?”
태성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태오는 분명 엄마가 아빠에게 연주해줬던 곡이 쇼팽의 곡이라고 했다.
그 곡은 서현이 태성에게 연주해줬던 유일한 곡이었다. 쇼팽이 첫사랑을 생각하며 만든 곡…
태오가 한국 나이로 여섯 살… 서현이 떠났던 해를 떠올렸다.
계산을 해보니 맞았다.
“그동안 내 아들도 못 알아본 거였어… 내 아들을….”
태성은 태오가 했던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
절망스러웠다.
서현이 그때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떠났을까… 오해 때문에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나타나지 못했을 서현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다.
타지에서 혼자 제 아이를 낳고 키우고… 태성은 서현에게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운전을 하면서도 태성은 멍했다.
도대체 어떻게 운전을 해서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태성은 집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멍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의문 하나.
내 아들인데, 왜 말을 안 하는 거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