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당신의 사정
태성과 이 회장은 한참 동안 서로를 외면한 채 창밖을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 정적을 깬 사람은 태성이었다.
“아버지, 저 서현이 다시 만나요.”
“서현이?”
서현이라는 이름에 흠칫 놀란 이 회장은 태성을 바라봤다.
“장서현?”
“네, 서현이 왔어요.”
“그래서 네가 요즘 우리한테 날을 안 세우는 거구만?”
최근 태도가 부드러워진 태성이었다. 그 이유가 서현이었구나 싶어 이 회장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번엔 반대 안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 회장이 시선을 외면하고 창가를 바라봤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대?”
“피아노 치면서… 공부했더라고요. 요즘 귀국 독주회 준비 중이고요.”
“결혼은 안 했나 보구나… 하도 안 나타나길래 결혼을 해서 안 나타나나 했는데, 그건 아니었구만.”
이 회장의 말에 태성은 오전에 봤던 사진이 떠올랐다.
서현이 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 아이와 오늘 어딘가로 가는 사진…
태성이 생각에 잠겨 순간적으로 멍해지자, 이 회장이 어깨를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 대답도 안 하고?”
“아, 네?”
“그동안은 왜 안 나타난 거냐고.”
“그건….”
서현에게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숙영의 말 때문에 서현이 못 나타나고 있었다는 말을 한다면 이 회장이 또 숙영을 탓하고 다툼만 될 게 뻔했기에 태성은 말을 아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넌 그런 것도 안 궁금한 게냐?”
궁금했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근데 궁금해하는 순간, 서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너무 두려워 태성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태성을 조마조마하게 하고 옹졸하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는 여전히 서현이었다.
짧지 않은 세월, 서현은 헤어졌다 생각하고 떠났으니 결혼도,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태성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놓을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필요할 뿐… 서현을 놓아 줄 생각은 없었다.
“돌아온 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반대하지 마세요. 저 서현이랑 결혼합니다.”
이 회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 * *
“회장님 이쪽이십니다.”
고 비서의 안내에 따라 미술관 행사장으로 진입한 이 회장과 태성을 숙영이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떻게 같이 와요?”
태성이 이 회장을 바라보자, 이 회장이 시선을 외면했다.
“제가 모시고 왔어요.”
“아, 그래?”
숙영은 어쩐 일로 그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태성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서현이는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요?”
“뭐라고 했을 거 아니야?”
태성은 숙영이 원망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왜? 뭐라고 했는데?”
숙영은 서현이 아이 얘기를 했나 싶어 태성을 떠본 거였다.
근데 태성은 숙영의 신경을 건드릴 얘기를 생각해냈다.
“싹싹 빌었습니다. 싹싹.”
“뭐? 누가? 네가?”
“네.”
숙영이 눈을 흘기자, 태성은 그 시선을 외면하고 이 회장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태성을 향해 숙영은 언성을 높였다.
“이태성!”
숙영은 저도 모르게 태성의 이름을 너무 크게 불러서 입을 틀어막았다.
홍보도 해야 해서 기자들도 불렀기 때문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숙영은 갑자기 쏠린 사람들의 시선에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저 팔불출. 아니, 그나저나 서현이 걔가 설마 내 아들한테 빌라고 한 거야? 그렇게 당당해? 그럼 그 아이가 태성이 아이라는 거야? 하… 답답해.’
속상한 마음에 입술을 깨문 숙영은 한숨을 내쉬고는 곧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고는 전시된 그림을 둘러보는 이 회장과 태성의 곁으로 향했다.
금세 기자들이 몰리고 사진도 찍고 인터뷰 질문도 시작됐다.
평이한 질문들에 이 회장과 태성은 익숙한 듯 인터뷰에 응했다.
“가족끼리 자주 나들이 다니세요?”
이렇게 가끔가다가 사적인 질문들이 나올 때면 숙영이 웃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바빠서 자주는 못 가지만, 그럼요. 저희도 다니죠.”
다닌 적 없지만,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연기하는 숙영이었다.
행사 자체도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데다가 어린이날이고 가정의 달이라서 그런지 사적인 질문들이 많이 들어왔다.
아무리 친근한 느낌으로 진행하겠다고 했다지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기자의 질문에 숙영은 당황했다.
“호호… 네?”
“이태성 부회장님께서 결혼을 안 하셔서 걱정 많으시죠?”
“호호… 알아서 하겠죠?”
“원하는 며느리상은 어떻게 되세요?”
“호호… 제 아들이 좋아하면 되는 거죠.”
“이렇게 아이들 그림 보시면, 손주 보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숙영은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
이미 손주가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을 아낀 거였다.
숙영이 답을 하지 않자, 기자는 이 회장을 보고 다시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손주 보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하하….”
이 회장 역시 말을 아끼고 수상을 한 작품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게 상을 받은 작품들이구만?”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고, 기자 인터뷰를 마무리 짓겠다는 뜻을 밝힌 거였다.
이 회장이 눈짓을 하자, 고 비서가 눈치를 채고, 기자들에게 인터뷰가 끝났다고 전달했다.
인터뷰 기자가 물러가고, 사진 기자들만 남아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고, 숙영은 연출하듯 이 회장과 태성에게 설명했다.
“이 작품들은 미술관에 5월 한 달 동안은 전시해 두려고요. 아이들 솜씨가 참 좋죠?”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림을 보던 태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아는 아이 그림인 것 같은데?’
“하늘동산 유치원 6세 장태오… 오스트리아 가족…?”
피아노 치는 엄마와 그림 제목이 오스트리아 가족인 거로 봐서 태성은 태오의 그림이 맞구나 싶어 신기해했다.
“장려상? 그림도 잘 그리네?”
태성이 그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고 피식거리자, 숙영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왜? 아는 애니?”
“아, 아뇨… 그냥.”
태성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태성을 보며 숙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핏줄이라 그림도 끌리는 건가?
숙영은 저 멀리에 있는 성 팀장을 불렀다.
“성 팀장!”
“네, 관장님.”
“오늘 시상식한다고 했는데, 왜 안 보이지?”
“누구 말씀이신지?”
“여기 장려상 받은 애 말이에요. 장태오.”
“아, 오늘 불참한다고 했던 아이가 장태오입니다.”
“그래요?”
일부러 안 온 거구만.
숙영은 한숨을 내쉬고, 다른 무리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미술관 행사가 끝나고 태성은 이 회장과 숙영에게 인사했다.
“저는 약속이 있어서 따로 가니까 회장님은 관장님과 함께 가시죠.”
“……?”
이 회장과 숙영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자, 태성도 미간을 찌푸렸다.
“두 분 같이 사시잖아요. 전 이만 갑니다.”
태성은 인사를 하고, 차로 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만 들릴 뿐 서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태성은 오전에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녁에 시간 되나?」
읽은 표시는 있는데 답장은 하지 않는 서현이었다.
한숨을 내쉰 태성은 그대로 차에 몸을 실었다.
* * *
“태오야, 천천히 먹어.”
자장면을 입 안에 한가득 넣은 채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맛있어?”
이번에도 태오는 고개만 끄덕였다.
맛있게 먹는 태오의 입가를 닦아주고, 식탁에 흘린 걸 닦아주며 서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 닮아 이렇게 자장면을 좋아하는 거야? 태성 씨도 자장면 좋아하나? 같이 먹어본 적이 없네….’
태오를 보면서 어느새 태성 생각을 하는 서현이었다.
그러다가 서현은 태성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저녁에 시간 되나?」
태오와 놀이동산에서 노느라, 답장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돼서 미뤄뒀던 문자 메시지였는데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문자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휴대전화 화면을 켜자,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태성의 전화였다.
연락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현은 답장을 적었다.
「미안해요. 내일 연락할게요.」
태성에게는 미안하지만,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태오를 두고 태성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통화나 긴 문자를 나눌 상황도 아니었고.
서현은 태성이 서운해할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짧게 답장을 하고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넣었다.
열심히 자장면을 먹던 태오가 물을 마시고는 서현을 바라봤다.
“엄마, 엄마는 안 먹어?”
그제야 서현이 자장면을 먹지 않고 있다는 걸 발견한 태오였다.
“엄마, 엄마도 먹어.”
“응, 알았어.”
서현은 태성과 태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싶어 잠도 잘 오지 않았고, 입맛도 없었다.
그래도 서현은 태오가 걱정할까 봐 최대한 맛있게 자장면을 먹었다.
“맛있다.”
“그렇지? 엄마! 난 자장면이 제일 맛있는 거 같아.”
“나중에 더 맛있는 것도 먹여줄게.”
“더 맛있는 게 있을까?”
“그럼, 있지.”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태오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봤다.
어린이날이라서 그런지 유독 엄마, 아빠와 함께 자장면을 먹으러 온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그 테이블에 시선을 빼앗겼다.
태오가 멍하니 다른 테이블을 보고 있자, 서현은 죄책감이 들었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서 서현은 마음이 아팠다.
얼른 말해야 하는데… 말을 하면 어떻게 될지 서현은 두려웠다.
행여 태오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생기진 않을까 염려가 된 탓이었다.
태오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태성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좋아해 줄까? 태성의 집에서는 어떨까? 태오를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어쩌지? 아예 한국을 떠나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면 태오만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것도 아니면… 태성과 태오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건 내 욕심인 걸까? 그냥 지금이 더 행복한 거면 어쩌지?
서현은 태오의 볼에 손을 올려 고개를 돌리게 했다.
“안 먹고 뭐 해? 자장면 맛없어?”
그러자 태오는 흠칫 놀라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자장면으로 고개를 내렸다.
“아니야, 맛있어. 이 봐. 엄청 맛있어.”
그런 태오를 보며 서현은 가슴이 찢어졌다.
‘태오야… 엄마 어떻게 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