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썼다 지웠다
「자?」
태성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서현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답장하라고 압박을 하는 것 같은 게 급한 성격 여전하구나 싶었다.
5년이란 시간이 흐른 게 정말 맞는 건지… 이렇게 여전한 그를 보며 꿈을 꾼 건가 싶지만 태오를 보면 또 아닌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이렇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태성을 보며 실감이 났다.
일부러 못되게 말하는 그 버릇 못 고친 것도 밉고, 늘 혼자만 당당한 것도 너무 미운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사르르 녹아내린 서현이었다.
“이건 변했네….”
서현은 태성에게 답장을 썼다.
「자려고요.」
“너무 딱딱하게 보냈나?”
답장 버튼을 누르고 나서 바로 후회를 하는데, 태성이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화면 보고 있었나? 왜 이렇게 빨리 읽어?”
그런데 답장은 날아오지 않았다.
“잔다고 해서 안 보내나?”
서현은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그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읽었다.
「화내서 미안해.」
다시 생각해도 태성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서현은 신기하다는 듯이 또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화내서 미안해.」
서현은 자꾸만 태성이 준 목걸이를 매만졌다.
* * *
침대에 누운 태성은 휴대전화를 들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뭐라고 보내지?”
‘자려고요’라고 답장을 한 서현에게 뭐라고 답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녀가 잠들기 전에 빨리 보내야 하는데 뭐라고 써야 할지….
태성은 휴대전화를 들고 문자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내일 어디에서 볼까?」
너무 오글거린다.
「3시.」
이건 너무 명령이지?
「내일 만나야지?」
시비 거는 것 같나?
「고 비서가 연락할 거야.」
이건 최악인데?
태성은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한참 동안 반복하고는 자신이 오늘 보낸 문자를 다시 봤다.
「화내서 미안해.」
이것도 정말 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보낸 건지…
태오와 오늘 나눈 대화가 결정적이었다.
“잘못했으면 바로 잘못했다고 말해야지 핑계 대면 더 혼난대요.”
동시에 화를 내는 서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솔직히 미안하다고 하자.
그래서 보내게 된 문자였다. 바로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화내서 미안해.」
문자를 읽고도 서현이 답장을 하지 않아서 조급한 마음에 ‘자?’라고 또 물어보고 후회를 하고 있는데, 서현의 답장이 도착했다.
「자려고요.」
태성은 답장을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금세 입꼬리가 올라갔다.
딱 네 글자였는데도, 좋았다.
이런 행복… 다시 느끼게 될 줄 몰랐으니까.
다시 눈앞에 나타나 준 서현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한 밤.
태성은 서현에게 또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 채 잠이 들었다.
* * *
“저 이만 가봐야겠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서현은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순애의 병실에 들렀다.
거의 회복을 한 순애는 서현을 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연주회 준비 때문에 바쁠 텐데… 내가 태오도 봐주고 그래야 하는데, 미안하네.”
“봐주시는 이모님 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려… 아무튼 한국에 있기로 한 거 잘한 거야.”
“네….”
“애 아빠는 만났고?”
“네….”
“둘이 다시 잘해 보면 안 되나? 왜 안 만나는 거여?”
“그게 좀… 그런 게 있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장 회장님 누명 벗기는데 태오 아빠가 고생이 많았어.”
“네? 김 실장이 사실대로 말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
“태오 아빠 비서라는 사람이 나한테도 몇 번 왔었어. 장 회장님이랑 그 불여시가 집에서 어땠는지도 물어보고, 김 실장이랑도 사이 물어보고, 그런 거 왜 묻냐고 물으면 장 회장님 누명 벗기는 일이니까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난 그때 너한테 여러 번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싫어하니까… 근데 얼마 안 있어서 장 회장님 누명이 벗겨지더라고. 뭐 기사에는 김 실장이 사실대로 말해서 누명 벗겨진 것처럼 나왔지만 태오 아빠가 고생한 거여.”
서현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에 눈물이 맺혔다.
순애가 그런 서현의 손을 꼭 잡았다.
“너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나한테 여러 번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는데, 네가 싫어하니까… 네가 얘기하는 것조차 싫어해서 말은 안 했는데…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서현아… 태오 생각해서도 애 아빠랑 다시 잘해보면 안 될까? 태오도 아빠가 누군지는 알아야지….”
“상황 좀 보고요… 우리 태오를 부담스럽게 느끼는 거 원치 않아요. 우리 태오가 그런 취급 당하는 것도 싫고요.”
“태오 아빠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절대 그런 사람 아니다.”
“아시잖아요. 그 사람 혼자만 반겨서 되는 거 아니란 거… 그 집안이 알게 되는 게 무서운 거예요, 저는… 괜히 태오의 존재를 알렸다가 그 사람 집안에서 태오가 부담스럽다고 또 외국으로 나가게 할 수도 있는 거고, 자기들 핏줄이라고 태오를 데리고 가서 키운다고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저 못 살아요, 진짜.”
“설마 그렇게 하겠어?”
“그럴 수도 있는 집안이에요… 그러니까 상황 좀 볼게요.”
“그래….”
순애가 또 안 좋은 표정을 짓자, 서현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만 하세요. 그래야 건강해지죠.”
“아이고, 이 예쁜 걸 왜 반대를 해…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뭐 싸고들 있네.”
서현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할머니….”
“뭐! 내 말이 틀렸어? 어디 복덩이 굴러 들어온 줄도 모르고! 제 발로 자기 복 찬 거지. 분명히 후회할 거다. 분명히.”
“그럴까요?”
“그럼.”
“고마워요, 할머니.”
“진짜라니까 그러네.”
순애 덕분에 한 번 더 웃는 서현이었다.
* * *
어린이날 전시할 그림을 들고 유치원 선생님이 미술관에 방문했다.
로비를 들어서면서 숙영을 만난 선생님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아, 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쿠키랑 음료 너무 감사드려요. 인사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안 계셔서 감사 인사를 지금 드리네요.”
“아, 네….”
그제야 숙영은 지금 이 유치원 선생님이 태오의 선생님이란 걸 깨달았다.
“아, 별거 아니었는데요. 그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인가 보죠?”
유치원 선생님 손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쇼핑백에 담겨 있었다.
숙영은 그날 이후, 태오의 얼굴이 가끔 아른거려서 집에 가서 태성의 어릴 적 사진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아무리 봐도 너무 비슷해서 신기해하던 중이었는데, 유치원 선생님을 만나니 태오의 그림이 문득 궁금해진 숙영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로비 한편에 마련된 그림 접수처에 쇼핑백을 올려놓자, 미술관 직원이 그림을 꺼내 장수를 확인하고, 그림 상태를 확인했다.
“확인되었습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 유치원 선생님은 인사를 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네, 들어가세요.”
유치원 선생님이 가자, 직원이 그림을 들고 전시를 시작했다.
숙영은 전시된 그림을 살펴보기 위해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를 도는 순간, 숙영은 한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이번 전시회의 주제가 가족이었는데, 태오의 그림 속에는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외국 남자와 머리가 빨갛고 눈이 파란 외국 여자,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자와 그 옆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이… 이게….”
그림의 제목을 보니, 오스트리아 가족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린 사람 이름은 장태오.
피아노… 오스트리아…
이게 정말 우연일까?
숙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서현이도 피아니스트였는데… 혹시… 태성이와 닮았다는 것 때문에 너무 끼워 맞추는 걸까?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라는 단어가 숙영의 뇌리에 꽂혔다.
분명히 서현이 오스트리아에 갔다고 태성이 그랬었다.
그래서 태성이 매년 오스트리아로, 그 주변 나라로 갈 때마다 못마땅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오스트리아.
피아노…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름이 장태오… 장서현…
“……?”
숙영이 휘청이면서 벽을 붙잡았다.
설마… 설마….
혼자 낳아서 길렀다면…
태오의 이름 옆에 6세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숙영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서현이 떠난 게 겨울이었으니까…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다면… 한국 나이로 여섯 살이 가능했다.
숙영은 방 실장에게 얼른 전화를 걸었다.
“방 실장, 누구 뒷조사 좀 해요.”
- 네, 누굽니까?
숙영은 그림에 적혀 있는 그대로 읽었다.
“하늘동산 유치원 6세 장태오.”
- 6세요?
“네, 6세 장태오… 장서현 아들인지 확인해 줘요.”
- 네, 알겠습니다.
숙영은 그림에 적혀진 태오의 이름을 어루만졌다.
“장태오….”
* * *
아침 일찍, 태오를 유치원으로 보내자마자 태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타이밍이 딱 맞아서 서현은 주위를 둘러본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일어났어?”
“네….”
“어제 매니저가 오전에 스케줄 없다고 한 것 같아서… 맞나?”
“아, 네….”
“시간 어때? 내가 더 오래는 못 기다릴 것 같아서 말이야. 지금 봤으면 좋겠는데.”
“어디에서 볼까요?”
“집 앞으로 갈게. 준비해야 되나?”
“1시간이면 돼요.”
“그럼 1시간 뒤에 당신 집 앞에서 봐.”
“네.”
태성의 전화를 끊은 서현은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예 스케줄 갈 준비까지 마치고 집 앞으로 나온 서현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고급 세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운전석에서 태성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