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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57)화 (57/111)

57화 

승부의 세계

“왜 루시로 가시게요?”

“네? 그럼 안 되나요?”

“아니 왜….”

설 대리가 눈치를 보자, 강 과장이 서현에게 설명했다. 

“장서현은 불편하세요? 우리나라에서는 장서현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것 같은데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이미지가 좀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루시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미지가 왜요? 이미지 엄청 좋으신데?”

“네? 제가요?”

서현은 강 과장과 설 대리의 눈치를 살폈다.

“두 분 제가 누군지는 아시는 거죠?”

“당연히 알죠. 솔직히 마케팅에 이용한다고 싫어하실 수도 있는데… 저희는 서현 씨 이미지를 활용하는 거 나쁘지 않다고 보거든요. 오히려 장점이죠.”

“제 이미지가 마케팅에 도움이 된다고요?”

“그럼요,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모든 누명이 벗겨지고 나서도 나타나지 않으신 이유가 뭐예요?”

“누명요?”

전혀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는 서현을 보며 강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현 씨, 혹시… 모르는 거예요?”

“뭘….”

“서현 씨 팬 많아요, 여기.”

“제 팬이요? 왜….”

강 과장의 말에 서현이 놀라자, 그녀보다 오히려 더 놀란 사람은 강 과장과 설 대리였다.

“서현 씨 붐 일었었는데… 한국 소식은 아무것도 안 들으신 거예요?”

“무슨….”

“서현 씨 아버지 누명 다 벗었잖아요. 진범들도 잡혀서 이미 감옥 가 있고요.”

“네?”

서현은 그제야 순애가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얘기를 기억해 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순애가 꼭 알아야 한다며 하려고 했던 말을 서현이 끝내 듣지 않았었다.

어떤 말이 나올지 무서웠고, 그 말로 인해 또 삶이 흔들리길 원치 않았다.

그때 당시 서현은 조그만 충격에도 쓰러질 정도로 위태롭게 버티는 중이었으니까.

살기 위해 모든 일에 귀를 닫고 살았었다. 살기 위해서.

근데 이런 얘기였다니….

“그 새엄마란 사람이 재산도 다 빼돌렸다면서요? 물론 자기 아이 때문에 그랬다지만….”

“아이요?”

“네, 그 새엄마라는 여자한테 애 있었잖아요. 심장이 안 좋다나… 결국엔 벌 받은 건지 그 여자 딸 죽었잖아요… 죄지은 건 엄마인데, 딸이 벌 받은 느낌이어서 난 좀 안타깝긴 하더라….”

말하면서도 눈치를 살피는데, 서현은 정말이지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예 모르셨어요? 당사자 놔두고 제가 얘기하려니까 이상하네요.”

서현은 김 실장이 자백한 얘기, 새엄마가 돈 때문에 접근해 아빠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며 사기 친 얘기, 성폭행 사건을 조작한 게 모두 선정그룹의 백 회장이란 얘기, 아빠를 죽인 사람이 백하은이라는 얘기까지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현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이자, 강 과장은 염려하듯 말했다.

“괜찮으세요? 잠깐 시간 좀 드릴까요? 우리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될 것 같은데….”

“그, 그래 주시겠어요?”

강 과장과 설 대리가 나가고, 서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휴대폰을 들었다.

기사를 검색하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눈을 감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 서현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떴다.

기사 제목만 봐도 내용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집착이 불러온 대참극, 백씨 부녀의 치밀한 계획 살인]

[범행 후 죄책감 없어, 백하은 반사회적 성향 보여]

[충격! 희대의 부녀 사기극! 백하은, 범행 후회 안 해]

[선정그룹 백 회장, 휠체어 타고 나타나… 꼼수인가.]

[장 회장 재혼녀 박옥련 사건으로 돌아본 가스라이팅 피해]

[치밀한 범죄 조작, 김 실장 김은영의 양심 자백으로 무너져]

[잘못된 부성애, 자기 자식의 행복을 위해 남의 자식을 불행으로]

이 밖에도 서현의 행방에 대해 다룬 기사도 찾을 수 있었다.

기사를 하나씩 클릭해서 보는데, 서현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5년 동안… 무려 5년 동안 숨어 살았다니….

매일 매일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부모 죄도 내 죄라 여기고 죗값을 치른다 생각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살았던 세월이었다.

아버지를 믿으면서도 속으론 원망도 했었다.

이 모든 불행이 내 탓인 것만 같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났었다.

그렇게 5년을 살았다. 

그런데… 불쌍한 우리 아빠… 우리 아빠 어떡해…

서현은 숨쉬기가 힘들었다.

모든 게 억울하고, 모든 게 원망스럽고… 아빠가 너무 불쌍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5년 전, 한국을 떠나기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참동안 아빠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던 서현은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그럼 태성 씨는…?”

그때 숙영은 분명히 하은이 태성의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그것도 초음파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그럼 이 상황에서 백하은이 낳은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 태성 씨가 혼자 기르고 있나?

그 어디에도 백하은의 아이에 대한 기사는 없었다.

서현은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거짓이었고, 저도 모르는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해결되어 있었다.

그럼 우리 태오는?

기사만 보고서는 도저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서현은 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민혁이 전화를 받았다.

- 어, 무슨 일이야?”

“오빠….”

민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현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나 어떡해요?”

- 서현아, 왜 그래?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나… 나 너무….”

- 서현아, 어디야? 회사야?

“네….”

- 기다려, 내가 갈 테니까.

* * *

“여기란 말이지, 고 비서?”

“네.”

고 비서는 호텔에서 서현이 타고 떠난 택시를 수소문했다.

그 경로를 밟아 결국 서현의 오피스텔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차에서 내린 태성은 눈앞에 있는 오피스텔과 손에 쥔 사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사진 속에는 지금 태성의 눈앞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서현이 있었다.

태성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서현을 만나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5년을 기다려 온 그날.

그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었다.

태성은 따라오려는 고 비서를 막았다.

“고 비서는 먼저 가.”

“네?”

“나 혼자 기다릴게.”

“언제 오실지 알고요. 작은 사모님이 댁에 계신다면, 안 나오실지도 모르는데….”

“밤을 새우더라도 기다릴 테니까 고 비서는 가.”

“부회장님….”

태성이 단호하게 눈빛을 보내며 고갯짓을 하자, 고 비서는 잠시 머뭇대더니 미련을 가득 남긴 채 인사를 하고 차에 탔다.

고 비서가 떠나고, 태성은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때였다. 다투는 아이들이 보이는데, 한 아이가 독일어를 쓰고 있었다.

-져놓고 치사하게, 너 같은 애는 오스트리아에도 없어.

“뭐라는 거야? 너 우리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일러라. 승부는 승부지.

“야! 우리나라 말로 하라고.”

“싫은데?”

“장태오 너!”

“뭐? 박명수!”

명수가 달려들자, 태오도 지지 않고 밀었다.

덩치는 태오보다 두 배는 되면서 힘에서 밀리자 명수는 땅에 떨어진 딱지를 주우려고 했다.

“이게! 내 딱지 내 놔!”

명수가 딱지를 주우려는 순간, 태오가 발로 딱지를 찼다.

그러자 명수가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앙.”

-승부는 냉정한 거야.

“한국말 하라고!”

분에 못 이긴 명수는 몸을 일으켜 태오를 향해 돌진했다.

근데 그걸 또 태오가 슥 가볍게 피하자, 명수는 또 고꾸라졌다.

“으아아아아앙.”

명수가 발버둥 치자, 태오는 귀찮다는 듯 뒤돌아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어린 애들이란….

태성은 돌아선 태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넌?”

태성이 아는 척을 해오자 태오도 아는 척을 해왔다.

“어? 아저씨?”

그때였다. 

명수의 엄마가 씩씩대며 나타나더니 태오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누구야? 누가 내 아들 울렸어? 너니?”

“제가 안 그랬어요.”

“그럼 누가 그랬어?”

“쟤가 혼자 넘어지고 우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니?”

-진짠데….

태오가 답답한 마음에 독일어로 말하자, 알아듣지 못하는 명수 엄마가 더 화를 버럭 냈다.

“너 뭐야? 너 욕했지? 어린 애가 벌써부터 욕을?”

“욕 안 했어요.”

“너 욕 했잖아!”

명수 엄마가 태오에게 심하게 윽박지르자, 보다 못한 태성이 나섰다.

“진짜라고요. 진짜.”

“네?”

-진짠데….

“저 아이가 지금 이렇게 독일어로 진짜라고 말했다고요. 못 알아들으시면 물어라도 보시지. 왜 다짜고짜 욕했냐고 애를 몰아세웁니까?”

“다, 당신 뭐야? 얘 아빠야?”

“그건 아닌데, 제가 모든 상황을 봤습니다. 댁의 아드님이 혼자 넘어지고 혼자 열받아서 우는 거.”

“뭐라고요? 아니 이 사람이!”

화를 내던 명수 엄마는 태성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는 갸웃했다.

“호, 혹시… 헉!”

명수 엄마는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이태성?”

“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부회장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게다가 태성은 기업가들 중에서도 워낙 유명인사였다.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경영인 순위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서현과의 약혼식 키스 사진으로 이미 유명세를 떨친 태성이었다.

태성은 뉴스만 틀면 나오는 사람이었으니 명수 엄마는 태성의 완벽한 비주얼을 보고 단박에 알아본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여기를….”

“그건 제 사정이고, 아무튼 댁의 아드님이 먼저 승부에서 져놓고 우겼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이를 밀치려고 하더군요. 근데 이 아이가 타고난 순발력으로 피했고요. 내 말이 맞지?”

태성이 묻자,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렇다네요.”

아이 엄마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자, 명수를 돌아봤다.

“진짜야?”

“아니 나는… 그래도 너무하잖아. 쟤가 내 딱지 다 뺏어 갔다고.”

명수의 말에 태오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도 지난번에 내 거 다 따가고 안 돌려줬잖아.”

“그건….”

명수가 억울해서 울먹이자, 태성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승부는 냉정한 거란다. 인정해야지?”

태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독일어로 말했다.

-그럼, 승부는 냉정한 거랬어.

그런 태성과 태오를 보며, 명수 엄마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어머, 진짜 별꼴이야.”

상황이 불리한 거 같자, 얼른 꼬리를 내린 명수 엄마는 태오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명수를 데리고 사라졌다.

“아니 저… 사과를 하고 가야지.”

태성은 한숨을 내쉬며 태오를 내려다봤다.

“괜찮니?”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뭐, 그나저나 너 멋있구나?”

“아저씨도 멋있어요.”

태성과 태오가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는데, 한 중년 여성이 달려왔다.

태오를 돌봐주는 이모님이었다.

“태오야,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어떤 애랑 결투 좀 했어요.”

“결투? 너 싸웠니?”

이모님이 깜짝 놀라서 어디 다친 데 없나 여기저기를 살피자, 태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허세를 떨었다.

“아뇨, 싸운 건 아니고요. 결투요.”

“뭐가 다르니? 암튼 싸운 거 아니라니 다행이다. 멀리 가지 마. 깜짝 놀랐잖니.”

“네.”

“그래, 얼른 들어가자.”

“네.”

태오는 들어가기 전에 태성을 보며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그래.”

태성은 이모님 손을 잡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태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엄마인가 보네. 늦둥이를 낳으셨나? 나도 참… 저 아이가 내 아이라고 생각하다니….”

이모님을 태오의 엄마라고 생각한 태성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잠깐 태오의 엄마가 서현이 아닐까 생각했던 자신이 기가 막혀 태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장서현이 알면 또 째려보겠네. 자기 애 엄마 만들었다고.”

태성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오피스텔 입구로 가서 화단에 걸터앉았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데, 그때 차 한 대가 오피스텔 앞으로 들어섰다.

보조석 문이 열리고, 서현이 차에서 내렸다.

태성이 몸을 일으켜 다가가려고 하는데, 운전석에서 민혁이 내리는 걸 보고 멈칫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태성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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