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번엔 내가 먼저
“어? 서현아….”
민혁은 서현에게 연락해 결국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갔다.
서현이 태오 때문에 나오지 못한다고 했지만, 민혁은 끈질겼다.
어쩔 수 없이 서현은 태오를 재우고 나서야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오빠,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아니야, 내가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잘 지냈어요?”
“넌?”
“저는 잘 지냈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민혁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너 아이는… 결혼한 거야?”
서현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기도 편치 않았다.
서현이 망설이자, 민혁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너 혹시….”
“…….”
서현의 눈빛이 흔들리자, 민혁은 설마 하는 마음에 말을 던졌다.
“이태성 아이야?”
서현이 또 대답하지 못하자, 민혁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하… 하….”
헛웃음만 짓는 민혁이었다.
“너 진짜….”
“…….”
“그 자식은 알아?”
“몰라요. 그 사람은 상관없는 내 아이니까 오빠도 그냥 모르는 척해줘요.”
“서현아!”
“내가 혼자 낳아서 기른 아이예요. 그 사람은 아이 존재조차 몰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냥 모르는 척해 줘요.”
“너 어쩌려고….”
“저 행복해요, 오빠. 태오 덕분에 제가 살아있다고요. 저 태오가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요.”
“하….”
민혁은 괴로움에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번엔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이태성을 앞지를 수 없음에 민혁은 분노했다.
“끝까지 안 알릴 거야?”
“알릴 생각 없어요.”
한국을 떠난 지도 벌써 5년이 흘렀다. 태성이 아직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하는 서현이었다.
“저 한국에도 잠깐 나온 거예요. 오스트리아로 다시 돌아갈 거에요. 빈에 갔었다면서요? 안나 아주머니에게 들었어요.”
민혁은 서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분명히 얼굴은 서현이 맞는데, 엊그제 만난 것처럼 그대로인데…
서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너 지금 혼자 오스트리아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겠다는 거야?”
“네.”
“이태성은?”
“이젠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도 저 잊었을 텐데요….”
민혁은 태성이 아직도 서현을 찾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태성에게도 서현을, 서현에게도 태성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상관없다니 다행이네. 그럼 계약하자. 우리 기획사로 들어와. 대우는 최고로 해줄게.”
“고맙지만, 생각 없어요.”
“이유는?”
“그냥 하고 싶지 않아요.”
“숨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너 다른 기획사들 제안도 다 거절했다며?”
“그건….”
“상관없다면서 이렇게 계속 숨어다니는 이유가 뭐야?”
“…….”
“상관없으면 당당히 세상으로 나와. 내가 도와줄게.”
“그냥 이렇게 살래요. 마음은 고맙지만, 저 지금 삶에 만족해요.”
“너 피아노 포기한 거 아니잖아. 더 큰 무대에 서고 싶지 않아?”
“…….”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 싶은 것도 못 하면서 숨어 살 거야? 아이를 위해서라도 세상으로 나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서현아.”
* * *
아침밥을 먹으면서, 서현은 자꾸만 멍해졌다.
“엄마! 나 김치!”
“어?”
“김치 달라고. 몇 번 말했는데….”
“아, 미안… 김치?”
“응.”
서현은 태오의 밥 위에 작게 자른 김치를 올려주고 또다시 멍해졌다.
전날 밤, 민혁은 기획사에 들어오라고 제안을 하고 떠났다.
그리고 거액의 계약금까지 제시했는데, 지금 당장 순애의 병원비가 급한 서현으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솔직히 계속 숨어 지내는 것도 지치기도 했고.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하면 대중에게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태오를 키우려면 돈도 벌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꽁꽁 숨어지낼 수는 없었다.
태오까지 꽁꽁 숨어 지내라고 하는 것도 죄책감이 들었다.
죄도 없는 내 자식이 숨어 지내는 거…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부딪쳐야 할 때가 된 거였다.
다른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는 그의 모습도,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어 있는 그의 모습도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
서현은 결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고 태오를 바라봤다.
“태오야, 우리 당분간 여기에서 살아볼까?”
“한국에?”
“응.”
“그럼 나도 유치원 다닐 수 있는 거야?”
어제 키즈카페를 갔다가 거기에서 만난 친구들이 유치원 얘기를 해서 소외감을 느낀 태오였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태오는 서현에게 유치원에 보내달라고 했지만 어젠 안 된다고 했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유치원 다닐래?”
“응! 다닐래, 다닐래.”
“그래, 유치원도 다니고, 한 번 지내보자. 지내보고, 우리 태오가 좋으면 계속 여기 살자.”
“진짜? 나 자장면도 너무 좋고, 키즈카페도 너무 좋아. 그리고 유치원도 다니고 싶고, 다르게 생겼다고 놀리는 친구들도 없어서 너무 좋아. 여기 좋아.”
아이가 좋아한다면, 태오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다.
“그래, 지내보자.”
* * *
빵빵-
태오를 유치원에 보내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서현은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민혁이었다.
“오빠?”
“같이 가자고 했잖아. 왜 혼자 가?”
“뭐 하러 왔어요?”
“우리 아티스트 모시러 왔지.”
서현이 미간을 좁히자, 민혁이 미소를 지었다.
“가는 길이야. 부담 갖지 말고 타.”
서현은 작게 숨을 내쉬고 민혁의 차에 탔다.
“첫날부터 대표님 차 타고 가면 직원들이 저 낙하산인 줄 안다고요. 낙하산 맞나?”
“아니, 너 유명해. 우리 직원들이 너랑 같이 출근했다고 날 우러러볼 걸?”
“무슨 소리예요….”
“너 영입하려던 기획사가 몇 군데였는지 알지? 그걸 해낸 사람이 누구? 나.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너랑 출근도 같이해? 직원들이 날 얼마나 우러러보겠어? 능력 있는 대표님이라고?”
“띄우지 마요. 전부터 오빠는 이게 문제야. 부담스러워.”
“늘 말했지만 난 사실을 말하는 거라고 했지? 피아노 포기하지 않고 더 훌륭하게 돌아와 줘서 고맙다, 서현아.”
서현은 몸서리를 쳤다.
“그만요.”
“알았어, 그만할게. 이렇게 너랑 같이 출근하니까 좋다. 네 대답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아?”
“고마워요.”
“내가 고맙지.”
서현은 창밖을 보면서 도심 풍경을 감상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그것도 한국에서 느끼는 여유.
민혁은 그런 서현을 보며 뿌듯해했다.
“좋지? 돌아오니까?”
“네, 좋네요.”
“태오는 어때? 유치원 적응 잘해?”
“네,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오빠.”
“응?”
“이모님 구해준 것도 고마워요. 태오가 이모님을 너무 좋아해서 한결 마음이 편해요.”
“아… 별거 아니야.”
“아니에요. 정말 여러 가지로 고마워요.”
“귀국 연주회 일정 구체적으로 잡고 준비 시작하면 더 바빠질 텐데, 태오가 이모님 잘 따른다니 고맙네.”
“그런데 오빠, 여기까지.”
“응?”
“오빠한테 더는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 지금도 너무 과하니까 이제 그만요.”
“내가 뭘 해줬다고?”
“아니에요, 지금도 너무 고마워요. 그러니까 여기까지요. 더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러기 싫다면?”
“네?”
“난 너한테 더 잘해주고 싶어. 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오빠….”
“더 잘해주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는 건데… 그냥 나한테 기대면 안 될까, 서현아?”
마침 차가 신호에 걸리고, 민혁은 서현을 바라봤다.
“난 네가 나한테 기댔으면 좋겠어.”
“무슨 뜻이에요?”
“나 남자로 봐줘라. 장서현.”
“오빠, 장난이죠?”
“아니. 난 너 여자로 보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나 남자로 봐줘.”
“오빠, 나 그럴 상황 아닌 거….”
서현이 거절을 하려고 하자, 민혁이 말을 막았다.
“고민은 좀 해줄래?”
“오빠….”
“지금 대답하진 말아줘라. 나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말한 거니까.”
민혁의 말에 서현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 *
기획사 직원들에게 서현을 소개해주고, 민혁은 바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
강 과장과 설 대리는 귀국 연주회 계획에 대해 서현에게 설명했다.
“대표님께서 서현 씨 일정은 좀 여유롭게 잡으라고 말씀하셔서요. 연주회 일정은 러프하게 우선 잡을게요. 하지만 1년은 안 넘기는 거로요.”
“네, 고맙습니다.”
“장소는 아시죠? 영지문화재단에서 하는 거?”
“네, 그럼요.”
“네, 그럼 이것도 넘어가고요. 포스터 촬영 말인데요. 프로필 촬영도 함께할 거라서 이건 좀 빨리 찍으려고요. 일정 언제가 괜찮으세요? 서현 씨 일정에 맞출게요.”
강 과장의 질문에 서현은 조금 머뭇거렸다.
“제가 아이가 있어서요. 들으셨나요?”
“네,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아이 일정에 맞추셔야 하는 건가요?”
“네, 그래서 아이가 유치원 가는 시간인 오전에 진행하는 거면 다 괜찮고요. 오후에 진행하는 거라면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그때 진행해야 할 거 같아요. 아이 돌봐주시는 이모님이 계시긴 한데… 아직 얼마 안 돼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은 오전 일찍이나 오후 늦게로 잡겠습니다. 설 대리, 사진 작가님께 연락드려서 일정 잡으시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설 대리가 메모를 정리하고, 강 과장은 다음 스케줄을 체크했다.
“그럼 일정은 거의 정리가 됐고요. 변경되는 사항 있으면 따로 연락드릴게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스케줄 다니실 텐데, 앞으로는 담당 매니저가 배정이 될 거예요. 매니저와 함께 다니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서현 씨 활동명 말인데요. 루시로 갈까요? 장서현으로 갈까요?”
“루시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서현의 말에 설 대리가 화들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