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끌림 (55)화 (55/111)

55화 

누구야?

-네? 힘들다니… 어디 멀리 갔습니까?

민혁의 질문에 안나 아주머니는 가자미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친하다더니… 연락도 안 해보고 왔나 보네요?

안나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질문에 민혁은 조금 흠칫했다.

-네,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요.

안나 아주머니가 필립 아저씨에게 속삭였다.

-애 아빠인가?

-또! 동양 남자만 보면 다 아빠라지?

-아니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가 둘이서만 자꾸 속삭이자, 민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건지?

민혁의 질문에 안나 아주머니는 시치미를 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서현이는 왜 찾아왔죠?

-한국 데리고 가려고 왔습니다.

-한국?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는 서로를 쳐다보며 놀랐다.

그런 모습을 보고 민혁이 또 물었다.

-왜 놀라세요?

-아니, 서현이가 한국에 갔거… 아야!

필립 아저씨는 안나 아주머니의 옆구리를 찔러 말을 막았지만 민혁은 이미 듣고 말았다.

-서현이 한국에 갔습니까? 언제요?

안나 아주머니는 입을 닫았지만, 민혁은 다시 물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발 말씀해주세요. 한국에 언제 갔습니까?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는 필립아저씨와 안나 아주머니였다.

민혁은 포기하지 않고 서현과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본인이 영지문화재단과 공연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여러 기사와 사진을 통해 확인시켜줬다.

한참 동안 설득을 하고 서현을 도와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걸 증명시켜주고 나서야 안나 아주머니는 입을 열었다.

-순애 할머니한테 간다고 갔어요. 뺑소니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언제 갔습니까?

-지금쯤이면 한국 도착했겠네요.

민혁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또 늦었다. 또.

괴로워하는 민혁을 보며 필립 아저씨는 입을 열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현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우릴 속인 거였다면 내가 당신 가만 안 둡니다.

-물론입니다. 믿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혁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서현, 아니 루시 지금 한국에 갔습니다. 최근 뺑소니 사고로 입원한 임순애 환자를 보러 갔다고 하니까 어떤 병원인지 빨리 알아보세요. 지금 당장.”

민혁은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 * *

중환자실에서 순애를 보고 나온 서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순애가 잘 버텨둔 덕분에 이번 주 내로 일반병실로 옮길 수 있다는 의사 소견이었다.

밖에서 성호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태오는 서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할머니 많이 아파?”

“아니, 많이 좋아지셨대.”

“진짜? 나도 할머니 보고 싶은데….”

“이번 주에 병실 옮기면 그때 보자. 알았지?”

“응!”

성호가 서현을 보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먼 길 와주신 것도 고마운데, 돈까지 주시고….”

“아니에요. 더 드렸어야 하는데… 많이 힘드시죠?”

“아닙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차도가 있으시니까 이제 좀 정신이 드네요.”

“그러게요.”

“근데 어머니께서 돈 받았다고 하면 또 가만 안 있으실 것 같은데….”

“많이 넣지도 않았는걸요. 받아주세요. 저한테 할머니는 친할머니나 마찬가지이세요. 당연히 제가 해야죠.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그래. 들어가세요.”

태오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서는 서현의 발걸음이 어느새 무거워졌다.

그런 서현의 기분을 금세 눈치를 챈 태오였다.

“엄마 왜 그래? 할머니 괜찮아진 거 아니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서현은 사실 성호가 부인과 통화하는 걸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병원비가 턱없이 부족해서 한숨을 쉬는 성호를 보면서 서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서현은 그동안 거의 아빠인 장 회장이 남겨주신 재산으로 살았었다.

솔직히 태오를 키우면서 학업도 하고, 생산적인 경제활동까지? 

거의 불가능했다.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가끔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기획사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는 건… 학업과 연계해서 하는 공연 말고는 정말 꿈도 못 꿀 일이었기에 돈을 많이 벌 수는 없었다.

태오는 너무나도 어렸고, 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도, 두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서 아이가 클 때까지 대학 공부에만 집중했었다.

아껴 쓴다면 돈은 충분했었으니까.

그런데 순애의 병원비를 낼 정도의 재산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도움을 줘야 하는데… 형편이 안 되어 얼마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해 서현은 속상했다.

이렇게 또 다른 걱정에 빠져 있는데, 태오가 서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엄마, 배고파.”

“응?”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어머, 미안. 많이 배고팠지?”

“응, 배가 등이랑 달라붙겠어. 봐.”

“뭐?”

배가 홀쭉해졌다고 보여주는 태오를 보며, 서현은 피식 웃었다.

“너 이런 말은 어떻게 알았어?”

“TV에서 봤어. 엄마, 배고파.”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한가지 고민에 빠져 있기란 쉽지 않았다. 이게 단점일 수도 있지만 큰 장점이기도 했다. 

혼자 있었다면 끼니도 거르고, 우울해 있을 테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이런 폼 잡을 시간이 없다. 

내 아이의 배를 채워야 하니까.

‘그래, 우선 먹고 생각하자.’ 

이렇게 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굉장히 큰 장점이고, 서현이 우울감에 젖어 들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래, 우리 뭐 먹지?”

“맛있는 거!”

서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음식이 떠올랐다.

태오 나이였을 때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생각했던 음식. 

“태오야, 자장면 먹으러 갈래?”

“자장면? 자장 라면?”

태오는 아시안 슈퍼마켓에서 사 먹던 자장 라면을 떠올리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서현은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장 라면 말고 중국집에서 먹는 자장면. 우리 그거 먹으러 가자.”

“자장 라면이랑 달라?”

“먹어보면 알아.”

“그럼 이거 먹고 우리 비행기 타는 거야?”

“응?”

“우리 짐 다 챙겨서 나왔잖아… 비행기 타는 거 아니야?”

“아, 아니. 우리 한국에 한 달 정도 있을 거야.”

태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우리 오늘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왜? 집에 가고 싶어?”

“아니, 아니. 여기서 놀지도 못했단 말이야.”

“한 달 동안 있을 거니까 실컷 놀아.”

“한 달? 한 달이면 몇 번 자는 거야?”

“삼십 번?”

“우와! 진짜?”

“그럼, 오늘 우리가 들어갈 집도 알아놨는걸?”

“집?”

한국에 한 달 정도 있을 계획이었던 서현은 옵션이 다 갖춰져 있는 오피스텔을 몇 개 봐두었다.

그리고 그중에 한 곳으로 오늘 들어가기로 계약을 했다.

호텔은 아이와 함께 지내기에는 역시 불편한 점이 많아서, 한국에 있는 동안 오피스텔에서 지내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한국에 더 머문다고 하니 너무나도 좋아하는 태오였다.

“그렇게 좋아?”

“응!”

“아, 그러고 보니 이사할 때 먹는 음식이 자장면인데! 오늘 우리 이사하는 거니까 자장면 먹는 거 맞네.”

“어? 그런 거야? 그럼 빨리 자장면 먹으러 가자. 우리 이사한다. 한국에도 집 생긴다.”

태오가 신나서 뛰어가자, 서현이 그 뒤를 따랐다.

“태오야, 같이 가.”

“엄마, 빨리 와.”

그때였다.

“장서현!”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서현은 고개를 돌렸다.

서현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민혁이었다.

“오빠….”

“서현아.”

민혁이 서현에게 다가왔다.

“너 진짜….”

“오빠가 여긴 어떻게….”

민혁은 서현을 와락 껴안았다.

그 모습을 본 태오는 멍해졌다.

“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

태오의 목소리에 민혁이 흠칫 놀라 몸을 떨어뜨렸다.

“엄마?”

민혁의 반응에 서현은 태오의 손을 잡았다.

“태오야, 이리 와.”

“서현아… 이 아이는….”

“내 아들. 태오야, 인사드려. 엄마랑 친한 아저씨야.”

“안녕하세요.”

“어, 어 안녕?”

민혁은 당황했지만, 아이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어 애써 태연한 척했다.

서현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민혁을 바라봤다.

“오빠,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좀 아닌 것 같고.”

“그, 그래… 아! 연락처.”

“오빠 번호 그대로죠?”

“응.”

“연락할게요.”

서현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민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서현아.”

서현은 태오의 눈치를 봤다.

“오빠, 이 손 좀….”

민혁도 태오의 눈치가 보였지만, 서현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너 연락한다는 거 못 믿겠어. 네 연락처 알려줘.”

서현은 태오를 한 번 쳐다보고는 민혁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민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혁이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서현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얘기해요, 오빠.”

멀어지는 서현과 태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여전히 혼란스러운 민혁이었다.

* * *

태성은 마치 중요한 발표를 기다리듯이 고 비서의 보고를 긴장해서 들었다.

“그래서?”

“말씀해주신 택시 번호 확인해서 기사님께 여쭤보니 호텔로 갔다고 합니다.”

“그 호텔 투숙객은? 확인해 봤어?”

“네, 확인 결과 작은 사모님을 확인했습니다.”

“하….”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사실에 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드디어 서현을 찾았다.

“그 호텔 어디야? 내가 지금 갈게.”

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 비서가 말렸다.

“잠깐만요, 부회장님.”

“왜?”

이미 재킷을 든 태성이었다.

빨리 말하라는 듯 눈빛을 보내는 태성을 향해 고 비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체크아웃을 하셨습니다.”

“뭐야? 어디로 갔는데?”

“그걸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호텔 투숙객 다 확인해 봐.”

“그게… 호텔로 가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웬만한 호텔 투숙객 명단은 다 확인했지만 작은 사모님은 안 계셨습니다.”

“하아….”

태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게 무슨….”

분노를 이기지 못한 태성은 책상을 내려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