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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53)화 (53/111)

53화

드디어

서현과 태오는 늘 집에서는 한국어를 생활화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독일어를 쓰지만, 집에서만큼은 절대로 독일어를 쓰지 않고 한국어 쓰기! 이게 집안의 규칙이었다.

한국 소식을 듣지 않으려 한국 방송을 보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태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해서 한국 애니메이션과 유아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프로그램은 늘 거실 TV에서 흘러나왔다.

태오는 집에 오면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한국어 공부 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곤 했다.

오늘도 재미있게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야, 양치해야지.”

엄마의 양치하자는 소리에, 몰래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던 태오는 소파 옆 작은 틈에 음료수를 숨기고 얼른 달려갔다.

“엄마, 나 불렀어?”

태오는 시치미를 뗐지만, 달콤한 향과 입 주변이 지저분한 건 숨길 수가 없었다.

서현은 태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장태오!”

“응? 엄마?”

모르는 척하는 태오였지만, 서현은 모르는 척할 생각이 없었다.

“너 밤에 음료수 마시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 아… 그게….”

“엄마가 거짓말이 제일 나쁜 거라고 했지?”

서현의 따가운 눈총에 태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어떻게 알았어?”

태오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웃음으로 때울 생각이었다.

“너 웃어도 소용없어. 엄마가 밤엔 안 된다고 했지?”

“네… 근데 엄마! 이건 낮에 먹었던 거 남아서 먹은 거야. 버리면 아깝잖아.”

“뭐?”

그러면서 태오가 또 씨익 웃는데, 어쩜 제 아빠를 이렇게 빼다 박았는지 가끔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지금도 저 웃는 모습에 서현은 저도 모르게 같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너 진짜….”

“어? 엄마 웃었다.”

“너 또 이대로 넘어가려고!”

“안 그럴게요. 약속!”

“맨날 약속만 하지?”

“진짜 약속!”

못 살아.

태오가 미소를 지으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고, 무장해제가 되는 서현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네!”

까부는 태오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이 시간에 무슨 전화지?”

모르는 번호로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한국은 지금 새벽일 텐데…

받지 말까 하다가 서현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접니다… 성호.

순애의 큰아들 성호였다.

잠긴 목소리로 짧게 인사를 건넨 성호는 서현의 목소리를 듣고 울먹였다.

- 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서….

“네? 할머니가 왜요?”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자 척추부터 머리끝까지 긴장감이 관통했다.

“무슨 일 있나요?”

- 어머니께서 뺑소니를 당하셔서… 늦은 시간인 거 알지만 그래도 전화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서현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할머니가….”

눈물이 나와서 서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금 할머니 상태 어떠세요? 심각한가요?”

- 우선 응급 수술을 들어가셨는데, 나이도 연로하시고….

“할머니….”

- 지금 수술 중인데, 경과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갈게요. 저 지금 한국 갈 테니까 그동안이라도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주세요.”

순애는 서현에게 친할머니 그 이상의 존재였고, 엄마가 돌아가시고는 엄마 역할까지 해주시던 분이었다.

오스트리아에 와서도 순애는 친정집처럼 서현을 챙겨주었다. 그런 가족 같은 존재인 순애가 잘못된다면….

서현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순애의 사고 소식에 서현이 오열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태오도 함께 울었다.

“엄마 왜 울어? 울지 마. 엄마 왜 울어… 울지 마….”

“어, 태오야….”

서현은 태오를 끌어안았다.

왜 자꾸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을 떠나는 건지… 서현은 태오를 꼬옥 껴안았다.

* * *

태성은 공항 라운지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면서 한국에 있는 고 비서의 보고를 들었다.

- 오시면 며칠 못 쉬실 것 같은데… 이런 말 전해서 죄송합니다.

“고 비서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 푹 쉬었으니까 괜찮아. 돌아가면 그때 이야기하지.”

가볍게 식사를 마친 태성은 고 비서와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에서 서현을 찾진 못했지만, 어쩐지 전과 같이 허망한 느낌은 아니었다.

전에는 오스트리아에 서현을 두고 가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젠 마음에 굳은살이라도 생긴 걸까?

태성은 커피를 가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편, 그 시각 서현은 한국에 가기 위해 태오와 함께 공항에 왔다.

어떤 정신으로 짐을 쌌는지 모르겠다.

우선은 한국에 며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오스트리아에서 해야 할 일들을 대충 정리하긴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꼭 본인이 정리해야 되는 일만 서둘러 정리하고 그 외의 것들은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에게 맡겼다.

고마우신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는 일을 도와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순애의 쾌유까지 바라며 서현을 위로했다.

평소에도 순애의 밑반찬을 함께 나눠 먹고 여러 번 영상 통화로 고마움을 표시했던 사이였기에 이번 사고를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두 분이었다.

게다가 순애와 그 가족들에게 가져다주라며 선물과 음식을 바리바리 싸준 고마운 분들이었다.

서현이 탑승수속과 함께 짐을 막 다 부쳤을 때였다.

순애의 큰아들 성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술은 어떻게 됐나요?”

- 수술은 잘 끝났고요.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엄청난 대수술이었다.

서현은 고령의 나이에 10시간이 넘는 수술을 버틴 순애가 걱정됐다.

“어떻게… 괜찮으시대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 수술은 잘 끝났지만 워낙 나이가 있으셔서 버텨내실지가 걱정이라고 하시네요. 

“고생하셨어요.”

- 고생은요 무슨… 지금 오고 있는 중이세요?

“네, 지금 공항이에요.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서현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서현의 작은 심경 변화에도 더 크게 반응하고 걱정하는 태오가 곁에 있어서 불안함을 티도 못 냈었다.

태오가 더 불안해할까 봐 애써 괜찮은 척 표정을 유지했었는데, 전화 통화를 하고 나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감사합니다를 되뇌는 서현을 보며 태오가 물었다.

“엄마, 뭐가 감사해?”

“할머니 수술 잘 끝나셨대.”

“진짜? 그럼 할머니 이제 안 아파?”

“아니, 좀 더 지켜봐야 한대. 그래도 수술 잘됐으니까 다행이다. 그렇지?”

“응, 다행이다.”

서현이 작게 미소 짓자, 태오는 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조그만 게 서현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공항 오는 내내 걱정을 하더니 이제 겨우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내 태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태오야, 왜 그래?”

태오의 입이 어느새 10cm는 나와 있었다.

“왜 그래? 태오 입, 또 오리 됐네?”

서현이 태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오리 흉내를 냈다.

“왜 그럴까? 꽥꽥! 왜 오리가 됐을까?”

태오가 그래도 말을 하지 않자, 서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지었다.

“말해 봐. 갑자기 왜 이러는지? 엄마한테 뭐 할 말 있어?”

“그게 엄마….”

“응?”

“그럼 우리 한국 안 가?”

“뭐?”

“할머니 수술 끝났으니까 안 가는 거야?”

“뭐야, 한국 안 갈까 봐 이렇게 오리입이 된 거야?”

태오가 입을 또 쭉 내밀자, 서현이 피식 웃었다.

“갈 거야. 한국.”

“진짜?”

태오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밝아졌다.

“엄마, 진짜 가는 거지?”

“그래. 할머니가 수술은 끝났지만 그래도 아직 회복은 다 못하셨으니까 할머니 건강해지시는 거 보고 와야지.”

“아, 진짜? 진짜지? 진짜 가는 거지?”

“그럼. 우리 태오 한국 안 갈까봐 서운했어?”

“응, 가보고 싶었거든. 할머니도 보고 싶고, 한국 궁금해. 우리랑 똑같은 말을 하고 우리랑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며. 너무 궁금해. 한국 친구들도 사귀어야지. 루카는 맨날 내가 자기들하고 다르게 생겼다고 놀리는데 한국 가면 안 그럴 거 아니야. 친구 만들어야지. 엄마, 나 그래도 되지?”

숨도 안 쉬고 말하는 태오였다.

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오가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오예!”

이럴 때 보면 아이는 아이였다.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태오도 이럴 땐 영락없이 아이 티가 났다.

그런 태오를 보며 서현은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한국에 가고 싶어 하는데, 타지에서 이 아이를 너무 외롭게 한 건 아닐까… 죄책감이 밀려왔다.

“한국 가면 뭘 가장 해보고 싶어?”

“우선 할머니 병원 가서 그림도 그려주고, 안마도 해줄 거야.”

“그리고?”

“음… 그리고….”

태오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아빠를 보고 싶다는 말을 엄마 앞에서 할 수 없어서 태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다물지 않으면 실수로 말하게 될까 봐 태오는 손까지 동원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태오를 보며 서현은 갸웃했다.

“왜 그래, 태오야?”

태오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저었다.

“왜?”

서현이 손을 내리게 하자, 태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건지…

태오는 혼자서 걸음을 옮겼다.

“엄마, 우리 빨리 한국 가자.”

“응? 태오야 같이 가.”

“엄마가 빨리 와.”

잠시 후, 서현은 태오를 데리고 공항 라운지에 들어갔다.

아침 일찍 서두르는 바람에 태오의 끼니를 제대로 못 챙긴 서현은 자리를 잡자마자 음식을 담으려고 일어났다.

“태오야, 여기 잠깐 앉아 있어. 아니면 엄마랑 같이 가서 음식 담아올까?”

“엄마, 나 화장실….”

“화장실?”

서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동동거렸다.

“엄마, 나 화장실 어디 있는지 알아.”

“어디?”

“저기!”

태오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화장실이 있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

“어, 엄마. 엄마 나 쌀 거 같아.”

“알았어, 갔다 와.”

태오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다.

태오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서현은 음식을 담으러 걸음을 옮겼다.

한편, 화장실에 들어간 태오는 요란하게 발을 동동거리며 소변기로 향했다.

근데 변기가 너무 높아서 태오가 낑낑대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어? 넌….”

“어? 아저씨….”

태오에게 다가온 남자는 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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