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멋있는 아저씨
-루시.
루시는 서현의 외국 이름이었다. 서현이라는 이름이 외국인들에게는 발음하기도 힘들었고, 여기서 학교생활을 하려면 좀 더 편하게 불려질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루시.
유일하게 서현의 한국 이름을 아는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 빼고는 모두들 서현을 루시하고 불렀다.
서현은 루시라고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학교 친구였다.
밖에서 만난 서현에게 아는 척을 한 거였다.
서현은 학교 친구와 가볍게 수다를 떨고 다시 안나 아주머니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날씨가 좋으니까 모두들 나왔네요.
-그러게. 평화롭구나.
안나 아주머니는 필립 아저씨와 태오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서현아, 네가 없었다면 오늘 같은 날도 없었겠지?
도시락 먹을 준비를 하던 서현은 따뜻한 커피를 따라 안나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무슨 소리세요?
안나 아주머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필립 아저씨와 태오를 또 지그시 바라봤다.
-네가 저 양반 쓰러진 거 발견 못 하고, 응급조치 제대로 못 했다면 저렇게 뛰어다니는 거 어디 상상이나 하겠니?
-저야말로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태오를 잃을 뻔한 걸요? 감사해요. 늘 태오를 돌봐주시는 것도.
-에이, 무슨 말을… 태오가 우릴 돌보는 거지.
-네? 태오가요?
-그래. 필립한테는 약 제때 챙겨 먹으라고 해주고. 내가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이는 건 태오가 대신 봐주고, 가게 찾는 손님들한테도 잘해서 태오가 우리 가게 마스코트라니까?
-정말요?
서현이 태오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안나 아주머니도 태오를 같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애가 어쩜 저렇게 똑똑하고 예쁜지… 태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니?
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오를 보고 있으면, 제 아빠를 너무나도 판박이처럼 닮은 모습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데,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를 쓰는 태오를 볼 때면 너무나도 신기했다.
그 사람도 어릴 때 이랬나 싶어서.
생각에 잠긴 서현을 보며, 안나아주 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태오 아빠를 떠올리는 서현의 표정이 그 사람을 너무 그리워하는 표정이라서…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의 표정이 아닌, 애틋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라서 보고 있으면 저절로 짠해졌다.
-태오 아빠를 만날 생각은 없는 거야?
-그 사람은 이미 결혼했을 거예요. 아이도 있거든요.
순애가 가끔 전화 통화로 한국 소식을 알리려고 하면, 서현은 알레르기 반응하듯 거부했다.
행여나 태성의 소식을 듣게 될까 봐.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그것도 백하은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으니까.
잠깐이지만 기분이 좀 씁쓸해진 서현은 안나 아주머니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나오니까.
-그러게. 좋네. 딸 하나 있는 거 타지에 시집보내고 많이 외로웠는데, 네가 딸처럼, 태오가 손자처럼 함께 해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고마워.
-제가 더 고맙죠.
악보 가게를 운영하는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는 서현이 피아노를 치러 갈 때마다 태오를 가게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시곤 하셨다.
안나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가 없었다면, 혼자서 태오를 키우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서현은 늘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들 또한 필립을 구한 생명의 은인으로 서현을 대했다.
태오가 워낙 예쁘기도 했고.
안나 아주머니는 필립과 태오가 공놀이하는 걸 보다가 놀랐다.
-아이고, 어째?
안나 아주머니의 소리에 과일을 꺼내던 서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저기 봐라.
안나 아주머니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태오가 공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고 야속하게 계속 굴러가는 공이었다.
태오가 아주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저 양반이! 애랑 놀면서 공을 저렇게 멀리 차면 어떡해?
-오랜만에 많이 뛰고 좋죠, 뭐.
-괜히 의욕만 앞서서, 저 봐라. 자기 무덤 자기가 판 거지.
태오를 따라가느라 헉헉대는 필립 아저씨를 보면서 서현은 피식 웃었고, 안나 아주머니는 눈을 흘겼다.
이젠 두 사람 다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태오야, 천천히 가. 넘어져.
필립 아저씨가 외쳤지만, 멈출 생각이 없는 태오였다.
지금 이 순간, 태오에게는 저 멀리 도망가는 공만 보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굴러가는 공을 누군가 발로 막았다.
“어?”
태오가 멈춘 공에 뒀던 시선을 올리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외국 사람이 아니었다.
나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한국 사람인가?
태오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가 허리를 구부렸다.
태오에게 눈높이를 맞춘 남자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 공이야?
독일어를 제법 유창하게 하는 태성이었다.
태성은 독일어를 했지만, 태오는 동양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네… 아!”
자기도 모르게 한국말을 해버린 태오는 다시 독일어로 답했다.
-네, 제 공이에요.
좀 전에 한국말을 들은 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 사람?”
엄마랑 똑같은 언어를 쓰는 태성이 신기해서 태오는 입을 떡 벌렸다.
“아저씨 한국 사람이에요?”
“응. 자, 공.”
태성이 공이 굴러갈 정도로 살짝 차자 태오가 그 공을 발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래.”
태성은 통화를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태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래, 고 비서. 이어서 얘기해 봐.”
- 한국 사람 만나셨습니까? 작은 사모님 좀 물어보시죠?
“아냐, 꼬마야. 그래서 뭐라고? 꼬마랑 부딪쳐서 못 들었어.”
태성은 통화를 다시 시작했고, 태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그때, 뒤늦게 따라온 필립 아저씨가 발로 공을 잡고 있는 태오를 발견했다.
-태오, 공 찾았구나.
-네… 근데요, 아저씨.
-응?
-우리 아빠도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겠죠?
-뭐?
-저기요.
필립 아저씨는 태오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는 태오를 바라보며 필립 아저씨는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태오와 눈을 마주쳤다.
-태오, 아빠 보고 싶니?
-네?
필립 아저씨의 물음에 멍하니 있던 태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니요. 아저씨, 이거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요. 엄마 또 울어요.
태오는 한밤중에 서현이 다른 방으로 가서 가끔 몰래 우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서현이 휴대전화 사진을 보면서 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짐작하건데, 그 사진이 아빠 사진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서현은 태오에게 아빠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쁜 말도 하지 않았다.
태오가 한 번은 서현에게 물은 적이 있다.
“엄마,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무슨 소리야?”
“아빠는 태오랑 엄마 버렸잖아.”
“태오야, 왜 그렇게 생각해?”
“루카가 그랬어. 아빠가 엄마랑 나랑 버린 거라고.”
태오는 낮에 친구 루카가 한 말이 너무 화가 나서 말다툼을 했었다.
그땐 분명히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루카에게 당당히 말했지만, 태오는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아빠가 진짜 버린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엄마, 아빠가 진짜 엄마랑 나랑 버린 거야?”
태오의 질문에 서현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태오야.”
“그럼 왜 나는 아빠랑 같이 안 살아?”
“그건… 엄마도 아빠도 사정이 있어서 그래. 그건 엄마가 우리 태오가 좀 더 크고 때가 되면 말해 줄게.”
“그럼 엄마도 사정이 있으면 나 버릴 거야?”
“태오야….”
엄마가 슬퍼하는 걸 알았지만, 태오도 불안했다.
엄마마저 아빠처럼 저를 버리고 떠날까 봐. 그게 늘 불안했다.
“엄마도 사정 생기면 나 버릴 거야?”
태오는 참으려고 했지만, 금세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태오를 서현은 꼬옥 안아줬다.
“태오야… 네 이름 뜻이 뭐라고 했지?”
“신의 선물.”
“그래, 엄마한테 우리 태오는 그런 아들이야.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그런데 엄마가 우리 태오를 버리다니… 엄마는 우리 태오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어.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알았지?”
“그럼 아빠는 살 수 있어? 우리 없이 살 수 있대?”
평소라면 그냥 알았다고 넘어갔겠지만, 낮에 루카가 한 말이 가슴에 꽂힌 태오는 불안감에 또 투정을 부렸다.
그런 태오를 서현은 더욱더 꼬옥 안아주었다.
“태오야, 이건 꼭 기억해 줄래? 아빠는 절대 우릴 버리지 않으셨다는 거. 그것만 알고 있어. 알았지?”
엄마는 또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태오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아빠 얘기를 할 때마다 보이는 엄마의 슬픈 눈을 보고 더는 아빠에 대해서 물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슬퍼하는 건 너무 싫었으니까.
잠깐이지만 투정을 부린 자신을 원망했다. 엄마의 저 슬픈 눈을 또 보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태오는 평소에도 아빠에 대한 얘기는 일부러 더 하지 않았다. 엄마를 위해서.
근데 오늘 아빠와 비슷할 것 같은 아저씨를 보는 순간, 그때처럼 또 아빠가 보고 싶어진 태오였다.
다른 친구들이 아빠와 함께 있을 때 정말 부러웠는데… 이 사실을 엄마가 알까 봐 애써 아닌 척했지만 태오는 저도 모르게 또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필립 아저씨, 진짜 엄마한테 제가 아빠 얘기했다고 말하시면 안 돼요. 알았죠?
필립 아저씨가 대답을 하지 않자, 불안해진 태오가 다시 물었다.
-필립 아저씨, 진짜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요.
-그래. 알았다.
필립 아저씨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태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진짜 엄마한테 아빠 얘기하지 말아야지. 태오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필립 아저씨가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갈까?
-네, 아저씨.
발은 필립 아저씨를 따라가는데, 눈길은 자꾸만 태성을 향하는 태오였다.
한국 남자를 본 적은 있었지만, 저렇게 멋있는 아저씨를 본 적은 처음이라.
엄마 또래의 아저씨를 본 적은 처음이라 태오는 자꾸만 태성에게 눈길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