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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49)화 (49/111)

49화 

이번에는 꼭

“하…”

달뜬 숨을 내쉬고 있는 서현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태성은 뜨거운 열락에 휩싸인 채 허리에 힘을 주었다.

“읏.”

“태성 씨…”

제 아래에서 느끼고 있는 서현의 신음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순간, 본능에 이끌린 태성의 움직임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태성 씨….”

격한 움직임이 절정에 다다르고, 이젠 태성에게도 제어할 수 없는 흥분이 몰아치는 순간이었다.

“헉!”

자다가 번쩍 눈을 뜬 태성은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호흡이 진정되질 않았다.

절망스러운 얼굴로 가쁜 호흡을 진정시킨 태성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젠장….”

요즘은 도통 꿈에도 나타나질 않아 서운하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또 꿈을 꾸고 나니 감정이 격해져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는 태성이었다.

벌써 서현이 떠난 지도 5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지 모르겠다.

미친놈처럼 그녀를 찾아 헤매고, 언젠가 만날 그녀를 위해 겨우겨우 살아냈다.

오늘 살아내면, 내일 만날 수 있겠지. 또 오늘을 살아내면, 내일은 만날 수 있을 거야…

서현을 만날 그날을 그리며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버틴 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꿈에라도 나타나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나날들이 벌써 5년이나 지났다.

서현을 꿈에서 만나고 깨어나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그녀였다.

꿈에서라도 만나지 않으면 그녀를 잊게 될까 봐 두려웠다.

서현에 대한 건 하나도 잊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그녀의 온기도 그녀의 향기도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다. 점점 흐릿해지려고 하는 서현을 태성은 오늘도 붙잡고 있었다.

태성이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협탁 위에 세워진 액자를 보는 거였다.

액자 속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태성의 옆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서현이 있었다. 웨딩샵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이 사진을 볼 때면 희망이 생겼다.

서현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녀가 남기고 간 쪽지가 거짓말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그때 직원이 찍어준다고 할 때 거절하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태성은 한참 동안 사진 속 서현을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욕실에서 나오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띵동-

태성은 모니터를 확인하자마자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현관문을 열고 고 비서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회장님.”

오는 길에 사온 모닝커피를 건네며 태성을 바라보는데, 어째 상태가 별로인 것 같자 고 비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간밤에 또 잠 설치셨어요?”

“뭐, 그냥.”

태성은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근데 좀 빨리 왔네?”

“공항 가는 길이 막힐 것 같아서, 제가 좀 더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간단히 아침 식사로 샌드위치도 좀 사왔고요.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도우미 여사님 출근 안 하시잖아요.”

고 비서는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식탁에 차리며 어제 퇴근 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백 회장이 또 반성문을 제출했다고 하더라고요. 죽어도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수 없다는 건데… 자기가 저지른 짓이 있는데 양심도 없죠. 백 회장이 매번 자기반성 없이 반성문 제출할 때마다 분노가 끓어오른다니까요. 게다가 자기 딸 내보내달라고 탄원서까지… 글짓기하려고 감옥 간 줄 아나….”

태성이 식탁 의자에 앉자 고 비서가 그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드세요.”

“됐어.”

“부회장님, 드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오스트리아 도착 전에 쓰러지세요.”

야근을 하고, 어제 점심 식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태성이었다.

끈질기게 샌드위치를 들이미는 고 비서의 성의에 못 이겨 태성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태성이 먹는 걸 확인한 고 비서는 그제야 그의 맞은편에 앉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보고를 가장한 수다를 다시 시작했다.

“근데 여기서 더 웃긴 건 말이죠. 같이 수감된 박 실장 말입니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백 회장 감형시켜달라고 탄원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물론 자기 반성문도 함께요. 둘 다 정말 양심 없죠?”

“그러게, 끈질기네.”

태성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해주자, 고 비서는 신이 나서 또 입을 열었다.

“네, 안 그래도 저도 그 생각했습니다. 게다가요. 백회장은 수감되기 전에도 지병이 있다고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쇼를 하더니 지금도 그런답니다. 얼마 전에도 아프다며 병원 진료를 받아야겠다고 했다는데… 또 쇼겠죠?

“그렇겠지.”

“부녀가 똑같습니다. 얼마 전에 백하은 씨도 억울하다며 단식하다가 병원에 입원했잖습니까? 교도소로 돌아가기 싫어서 여기도 안 좋다 저기도 안 좋다… 이번엔 미친 척을 했답니다. 또 병원에 가려고요. 추합니다. 추해.”

안 그래도 입맛도 없어 죽겠는데, 입맛 떨어지는 얘기를 계속하는 고 비서를 향해 태성이 샌드위치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안 넘어간다.”

“네, 죄송합니다. 드세요.” 

태성이 또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자, 눈치를 보던 고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회장님. 저는요 그저… 이런 상황을 좀 아시면 작은 사모님께서도 돌아오실 법도 한데… 도대체 어디 계시길래 안 돌아오시나 답답한 마음에….”

“그러게, 서현이는 어디 있길래 안 나타나는 걸까?”

“모르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알면 당연히 나타나셨겠죠.”

그래서 태성은 더 불안했다.

장 회장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걸 알면 다시 나타날 법도 한데,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던 이 사건도 모른다면, 도대체 서현은 어디 있는 건지….

설마 나쁜 일은 당한 건 아닐까, 이런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건 아니겠지?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밀려드는 불안감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태성이었다. 

“부회장님, 이번엔 정말 제가 같이 안 가도 되겠습니까? 짐은 챙기긴 했는데요.”

“이번엔 혼자 다녀올게. 고 비서도 매번 휴가 때마다 오스트리아만 갔는데, 다른 곳도 가봐야지.”

“저야 뭐… 그래도 말씀하시면 나중에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고 비서는 오스트리아에서 서현과 비슷한 머리 스타일이나 체구를 가진 여자만 보면 정신없이 쫓아가는 태성이 걱정돼서 한 말이었다.

고 비서가 왜 이렇게 걱정하는지 태성도 알고 있었지만, 매번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매년 휴가 때마다 오스트리아에 가느라 어찌 보면 휴가를 반납하는 거나 다름없는 고 비서였다.

그런 고 비서에게 미안해서 태성은 이번엔 혼자 오스트리아로 떠나기로 했다.

이름도 바꾼 건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서현을 찾는 건 매년 반복하는 허탕이었다.

행여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진 않았을까 싶어서 다른 나라들도 다녀봤지만, 태성은 왠지 서현이 오스트리아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꼭 거기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확신이 들어 올해도 태성은 오스트리아행 티켓을 끊었다.

이번에는 만날 수 있겠지?

* * *

오스트리아 빈은 크고 작은 공원이 많아 언제든 푸른 잔디밭 위에서 일광욕을 즐길 수 있었다.

서현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깔았다.

돗자리 위에는 금세 음식들이 차려졌다.

함께 나들이를 온 옆집 안나 아주머니는 솜씨를 발휘해 샌드위치를 준비했고, 서현은 아침부터 한국 음식인 김밥을 준비했다.

안나 아주머니는 이렇게 피크닉을 나올 때면 서현이 싼 김밥을 좋아했다. 물론 필립 아저씨도 좋아하셨다. 

순애가 한국에서 보내주는 진미채와 멸치볶음을 넣고 만든 김밥이 별미라며 유독 좋아했다.

필립 아저씨는 5년 전에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이후로 건강에 유독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피크닉을 자주 나오는 이유도 있었다. 맑은 공기도 마시고, 가볍게 운동도 즐길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피크닉을 더 자주 나오게 된 이유…

“태오야, 넘어져! 필립 아저씨 힘드시잖아. 천천히!”

올해 여섯 살이 되면서 기운이 더 좋아진 태오 때문에 더 피크닉을 나올 수밖에 없는 서현이었다.

어찌나 체력이 좋은지… 필립 아저씨가 곧잘 태오와 놀아주곤 했는데, 늘 체력이 부족해 헉헉대곤 했다.

-태오! 같이 가.

-필립 아저씨! 빨리요.

태오가 태어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섯 살이 되다니….

기어 다니던 아이가 저렇게 뛰어다닌다는 게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필립 아저씨는 다른 의미로 숨이 벅차고 있었고.

힘들면 태오의 요구 좀 덜 들어줘도 괜찮은데, 필립 아저씨는 태오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시늉도 하는 분이었다.

지금도 숨이 차지만 태오의 부탁이라고 하니 최선을 다해 달리는 필립 아저씨였다.

처음에 느꼈던 필립 아저씨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알고 보니 낯가림이 워낙 심해서 처음에 서현을 보고도 어색함에 인상을 썼다고 하는데, 태오에게는 처음부터 무장해제,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린 필립 아저씨였다.

흐뭇한 표정으로 태오와 필립 아저씨를 보고 있는데, 그때 서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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