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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47)화 (47/111)

47화 

이혼해 줄게요

며칠 걸려서 짐 정리를 끝낸 서현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가 이제 내 공간이구나.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고 생각했을 때, 서현은 주저 없이 오스트리아가 떠올랐다.

유학 시절, 한 번 왔을 때 첫눈에 반했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는데, 꿈이 현실이 된 거였다.

좋게 생각하자. 

이제 좋은 것만 보고,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아야지.

오스트리아는 서현에겐 희망의 나라였다.

그리고 평생을 배운 피아노와 더욱 친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게 다 떠나고 서현에게 남은 건 피아노밖에 없었다.

피아노가 이렇게 귀한 친구가 될 줄이야…

억지로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 그래도 피아노를 할 때 즐거웠던 기억이 많았다.

할 수 있고, 제일 잘할 수 있는 것. 피아노와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음대 입학 원서도 준비하기로 했다.

천천히 뭐든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갑자기 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하지만, 아버지인 장 회장이 남긴 유산 덕분에 좋은 집도 구할 수가 있었고, 생활비 걱정도 덜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에서 유학을 해서 언어도 어느 정도 익숙했고, 한국에서 오스트리아 생활에 대한 준비를 어느 정도 해놨기 때문에 적응은 수월했다. 

바쁘긴 했지만, 모든 게 평화로웠다.

한국 소식은 일부러 귀를 닫으려고 노력했고, 한국 방송은 틀지도 않았다. 물론 기사도 절대 보지 않았다.

정말 아예 상관없는 나라, 처음부터 몰랐던 나라인 것처럼 오로지 오스트리아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버티기로 했다.

* * *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태성은 역겨운 점심 식사를 한 탓에 소화제를 마셨다.

먹은 것도 별로 없이 체한 이유는, 이 회장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 숙영이 하은을 데리고 나온 까닭이었다.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약혼 얘기를 하고, 결혼 얘기를 하는데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태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태성을 따라 나온 하은이 그를 붙잡았다.

“오빠.”

“놔.”

“오빠, 제발….”

“놓으라고 했을 텐데?”

그 말에 하은은 더 세게 태성의 양복 재킷을 붙잡았다.

그러자 태성이 하은의 손을 거칠게 내쳤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하은이 태성의 앞을 막았다.

“저랑 얘기 좀 해요.”

“비켜.”

“내가 왜 이렇게 싫은데요?”

태성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하은을 피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하은이 그의 앞을 또 막아섰다.

“난 오빠 좋아해요. 저한테도 기회 주시면 안 돼요?”

태성이 하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힘을 줬다.

어깨가 아파 하은이 눈을 찌푸리자, 태성이 조소를 지었다.

“기회? 지금도 기회 주고 있잖아, 도망칠 기회.”

“……?”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널 죽이고 싶은 거 겨우 참고 있으니까. 기회 줄 때 꺼져.”

태성의 차가운 말에 하은은 몸이 벌벌 떨렸다.

태성이 어깨에 올린 손을 거두고 걸음을 옮기자, 하은이 뒤에서 소리쳤다.

“이, 이혼해 줄게요.”

“……?”

“우선 결혼해요. 서현이 오면 헤어져 줄게요.”

태성이 걸음을 멈추자, 하은이 다시 그의 앞에 섰다.

“집안에서는 어차피 오빠랑 저랑 결혼시키려고 할 텐데, 언제까지 안 한다고 버티는 거… 오빠도 그거 힘들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선 결혼해요. 그리고 서현이 오면… 오빠가 원하면 언제든 물러날게요. 그러니까 나랑….”

“진짜 죽고 싶나?”

“……?”

“어디서 좋지도 않은 머리를 굴려?”

경멸하듯 직선으로 하은을 노려본 태성은 얼어붙은 그녀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끓어올랐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다시 또 어이없는 하은의 말이 떠올라 화가 치민 태성은 다 마신 소화제 병을 신경질적으로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두 달 내내 하은과 자신을 연결해주지 못해서 안달 난 숙영 때문에 이젠 알레르기가 오를 정도였다.

태성은 휴대전화를 열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태성은 그녀가 떠난 이후로 자꾸만 메시지와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혹시나 못 본 게 있을까 봐.

그러고는 한참 동안 서현과 주고받았던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정말 별 내용도 없었다.

「지금 나와.」

「네, 알겠어요.」

「나와」

「네, 알겠어요.」

「기다려.」

「네, 알겠어요.」

이런 일방적인 통보에 서현이 같은 답을 하는 문자 아니면…

「미안해요,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했어요. 늦으니까 기다리지 말아요.」

「어디야?」

「일해요.」

「집으로 갈게.」

「약속 있어요.」

서현이 자신을 피하는 문자였다.

좀 더 다정한 문자 좀 나눌 걸 이게 뭐가 힘들다고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했을까? 후회될 정도로 무미건조한 문자들만 주고받았다는 게 아쉬웠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내게 그런 기회가 올까?

태성은 휴대전화 사진첩에서 서현의 사진을 찾았다.

웨딩샵 직원이 찍어준 사진이었다. 서현에게도 있는 사진.

여러 장의 사진 중,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서현이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사진에서 손이 멈췄다.

사진 속 서현의 눈빛은 절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날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절대.

태성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서랍에서 서현이 남긴 쪽지를 꺼냈다.

[태성 씨, 이젠 당신이 필요 없어졌어요. 잘 지내요.]

“거짓말….”

이때, 고 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부회장님.”

잠시 후, 고 비서의 보고를 들은 태성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고 비서는 그런 태성을 기다리며, 고개를 떨궜다.

겨우 속을 다스린 태성이 입을 열었다.

“거기도 아니었다?”

태성의 물음에 고 비서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네, 죄송합니다.”

한숨을 내쉰 태성은 지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오스트리아로 입국했다며? 분명히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피아노 때문에 간 게 아니었단 말이야?”

“잠깐 들리셨을 수도 있다는 걸 배제하지 않고 찾고 있습니다. 벌써 두 달이나 시간이 지났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셨을 수도 있어서 주변 나라도 찾아보는 중입니다. 우선은 피아노를 다시 치신다는 가정하에 관련 학교는 다 알아보는 중입니다.”

“하….”

태성의 한숨이 더 깊어지자, 고 비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더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

태성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 나가라고 손짓하자, 고 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보고 할 게 있습니다.”

“뭐지?”

“김 실장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 실장이라는 말에 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김 실장? 그 동영상에 나온 김 실장 말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장 회장님 비서 김 실장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의 전화가 왔는데, 부회장님과 꼭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번호를 알아놨습니다. 부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고 비서가 직접 통화한 거야?”

“네.”

“전화한 이유는?”

“부회장님께 직접 진실을 말하겠답니다. 작은 사모님을 되찾고 싶다면 전화를 달라고 하는데….”

“서현이?”

“네.”

태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뗐다.

“어때 보여?”

“장난 전화일 수도 있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한데, 전화 걸려온 곳이 미국으로 뜨긴 합니다.”

“그래, 김 실장이란 여자가 미국으로 갔다고 했지?”

“네.”

“연결해 봐.”

“네?”

“서현이를 되찾고 싶다면 연락하라고 했다며? 해봐야지. 뭐라도.”

이윽고 김 실장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와 통화를 하게 된 태성은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듣고 분노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도 죗값은 치러야 한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뭡니까?”

- 당신이 백하은이랑 결혼하는 건 막아야 할 것 같아서요. 

미국에 가서도 한국 소식을 계속해서 접한 김 실장이었다.

출국 전 엿들은 통화에서 알게 된 박 실장과 하은에 관한 조사도 미국에서 진행한 결과, 이 모든 일을 꾸민 건 선정그룹이라는 걸 김 실장은 확신했다.

그 확신을 갖고 조사를 하다보니 모든 퍼즐은 맞춰졌다. 

아는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 얼마 전에 당신과 백하은의 스캔들 기사 봤어요. 물론 서현이와 당신의 파혼 기사는 그 전에 접했고요. 서현이와 파혼을 하더라도, 백하은과는 절대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럼 서현이가 너무 불쌍해서 안 돼요.

김 실장의 말에 태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겁니까?”

- 장 회장님을 배신하고, 하루도 편히 잠을 청한 적이 없었어요. 선정그룹에서는 제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장 회장님을 몰아갔고, 그 사실을 알고부터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근데 제가 그런 선택을 하면, 누가 좋을지 생각해보니 안 되겠더라고요. 제 죗값은 받겠습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뭐죠?”

- 제 가족들을 지켜주세요.

“가족?”

- 제 가족들을 약점으로 잡고 저를 협박했습니다. 그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자백을 하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걱정입니다. 제 가족들을 지켜주신다고 약속만 하시면, 자백하겠습니다.

“증거는?”

- 증거는 고 비서님 메일로 보냈습니다. 백 회장의 오른팔인 박 실장이 제게 했던 협박과 종용이 담긴 녹음파일입니다.

“날 믿나 보네요? 내가 백 회장한테 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합니까?”

- 백 회장에게 말하면 서현이를 잃으실 텐데요. 괜찮으세요? 서현이 좋아하시잖아요?

“……?”

- 백 회장이 장 회장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서 파혼을 시킬까 생각해 봤는데, 딱 하나더군요. 이태성부회장님께서 서현이를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자기 딸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게 다 내 탓이라는 건가?”

- 글쎄요. 서현이 찾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저도 그쪽이 확실한 도움이 될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좀 알아봤죠. 그러니 꼭 장 회장님의 누명 벗겨주세요. 그렇게 되면 서현이도 나타날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끊은 태성은 같이 통화를 듣고 있던 고 비서에게 바로 지시했다.

“고 비서, 증거부터 수집해.”

“네, 알겠습니다.”

태성은 머릿속에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고 비서, 잠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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