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끌림 (46)화 (46/111)

46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

숙영이 핸드백을 열어 뒤지더니 사진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봐라.”

“이게….”

“태성이 이제 애 아빠 된다.”

“네?”

“이건 초음파 사진이고, 우리 하은이 배 속에 태성이 아이가 있어.”

서현이 화들짝 놀라자 하은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서현아, 미안해.”

“너…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뭐하긴? 너 말 가려서 안 하니?”

숙영은 서현을 쏘아붙인 뒤, 하은을 달랬다.

“어머, 얘! 네가 왜 우니? 울지 마. 애한테 안 좋아.”

숙영은 서현이 받을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은의 상태만 살폈다.

“어머니, 죄송해요.”

“네가 왜 죄송해. 그런 말 하지 마.”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서현이한테도 미안하고, 어머니한테도 죄송하고… 그리고 오빠한테도….”

“왜 그런 말을 해….”

숙영이 달래자, 하은이 고개를 들어 서현을 바라봤다.

“서현아, 오빠는 아무 죄도 없어. 그저 너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길래….”

“하은아, 얘한테 뭘 그런 걸 설명해? 진정하고, 내가 말하마. 서현이 너도 알다시피 얘네 스캔들 기사 났잖니? 사이 좀 됐단다… 우리 태성이가 너한테 미안해서 계속 잘해준 모양인데, 이제 알겠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러니까 절대 돌아오지 마. 너 돌아온다고 반길 사람도 없고, 괜히 돌아와서 잘살고 있는 가정 깨고, 아이 불행하게 만들면, 내가 너 가만 안 둔다. 알겠니?”

마치 서현이 불륜녀라도 된다는 듯 말하는 숙영이었다. 

서현은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얘는 왜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건지… 하은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하은이 제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떨궜다.

“부탁이야. 제발 돌아오지 마, 서현아. 태성 오빠 더 힘들게 하지 말아줘.”

머릿속이 하얘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숙영과 하은만 자꾸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너 이 길로 태성이한테 쪼르르 가서 일렀다간 알아서 해라. 하은이가 시간 두고 직접 말한다고 했으니까 태성이한테 괜히 말해서 일 망치지 말고, 떠날 거면 조용히 가.”

서현이 대답하지 않자, 숙영이 다시 물었다.

“왜 대답이 없니? 대답 안 해?”

“네….”

서현이 대답하자, 숙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하은아.”

“네, 어머니.”

두 사람이 떠나고 난 자리는 폭탄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그들이 헤집고 간 마음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비행기에 앉아 있는 지금도 충격이 채 가시질 않았다.

이건 꿈이야… 악몽… 악몽이라고.

곧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안내음이 나오자 서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리던 비행기가 점점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잠시 후, 하늘로 솟구치던 비행기가 비로소 안정을 되찾자, 서현은 밖을 바라봤다.

점점 멀어지는 대한민국 땅을 바라보며, 서현은 생각했다.

영원히 이별이라고.

* * *

서현이 떠난 이후로, 잠도 제대로 못 잔 태성은 곧 쓰러질 것 같은 몰골로 회사에 출근했다.

이 와중에 고 비서에게 서현에 대한 소식을 보고 받는데… 정말이지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태성에게 절망적인 소식뿐이었다.

“한국에 없다?”

“네, 그날 출국하신 거로 확인됩니다. 미리 체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젠장, 하….”

서현이 남긴 쪽지를 보자마자 태성은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찾아다녔다.

이렇게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나?

친한 친구, 동료 번호 하나가 없었다.

유일하게 아는 공간인 문화재단에 찾아가 봤지만, 재단은 또 언제 정리를 했는지, 정민혁도 서현이 사라진 걸 모르는 눈치였다.

아님, 연기를 굉장히 잘하거나…

정민혁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해 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서현과 만나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출국자 명단에서 그녀를 찾다니….

“어디로 갔지?”

“오스트리아 빈 국제공항이었습니다.”

“빈….”

태성은 괴로움에 마른세수를 하고는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빈으로 사람 보내. 음대 다닐 가능성이 크니까 학교 다 뒤져. 피아노 관련된 건 다 찾아다니고.”

“네, 알겠습니다.” 

“오피스텔 CCTV는?”

“네, 확인했습니다. 오피스텔 나가시는 것부터 확인을 했는데, 누구의 강요도 없이 혼자 짐 챙겨서 나가신 거로 확인이 됐습니다. 다만….”

“다만 뭐?”

“1층 커피숍에서 큰 사모님과 백하은 씨와 대화하시는 걸 확인했습니다.”

태성은 거슬리는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

“백하은?”

“네.”

“확실한 거야?”

“네.”

“백하은 어디 있어? 아니야, 어머니부터 만나봐야겠어.”

태성은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다.

* * *

미술관을 찾은 태성은 서현을 만났다고 순순히 말하는 숙영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어쩔 수 없었어. 네 아버지는 계속해서 널 압박하려만 드는데, 말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까지 잘못되는 거… 난 못 봐.”

“그래서 보내셨어요? 그 가여운 애한테 얼마나 모진 소리를 하신 거예요?”

“…….”

“어디로 보내셨어요? 서현이 어디로 갔냐고요.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 서현이 찾아올 겁니다. 그러니까 행여 또 빼돌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서현이 찾습니다. 꼭 찾을 겁니다.”

“서현이 절대 안 나타날 거다. 그러니까 헛수고 그만해.”

“도대체 뭐라고 협박을 하셨길래….”

“협박이라니? 그런 거 없었어. 그저 자기 주제 파악하고 떠난 거니까 그런 애 잊고 하은이하고나 잘 지내.”

“……?”

“하은이가 널 많이 좋아하더라.”

“그래서 백하은 데리고 서현이한테 가셨어요?”

“그건….”

숙영은 하은이 태성에게는 절대 임신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임신만큼은 자신이 말하고 싶다고 한 하은의 의견을 숙영은 존중하고 싶었다.

괜히 섣불리 말했다가 태성과 하은이 잘못되면 배 속의 아이까지 불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숙영은 입을 다물었다.

“하은이한테 들어.”

“아뇨, 들을 얘기 없습니다. 저는 서현이 찾을 겁니다, 그렇게 아세요.”

“태성아!”

태성이 밖으로 나가자, 숙영은 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은아, 아직 태성이한테 얘기 안 했니? 서현이도 갔는데 얼른 사실대로 얘기를 해야….”

- 어머니…

하은의 울먹이는 소리에 숙영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 저 유산이래요…

“뭐야? 어쩌다가… 아니지. 너 어디야? 병원이니?”

- 병원 다녀와서 집이에요… 어머니 저 어떡해요? 우리 아이 어떡해요?

“울지 마, 하은아. 어쩌다 그랬어….”

“오빠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서현이한테 그런 것도 너무 미안하고… 오빠가 우리 아이 싫어할까 봐 고민하다가 며칠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했더니… 흑.”

“하은아…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쩌니….”

“어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네가 무슨 잘못이겠니… 태성이는 이렇게 착한 널 두고… 하….”

숙영은 친정 엄마도 없고, 태성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하은이 안쓰러워 속이 다 상할 정도였다.

“하은아, 우선 끊어 봐. 아무래도 내가 태성이한테 얘기해야겠다.”

- 어머니…

숙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태성에게 전화를 걸려고 통화 목록을 확인하는데 하은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하은아, 왜?”

- 어머니, 안 돼요. 오빠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아니야, 이건 말을 해야지….”

- 어머니, 제발요…

하은은 한사코 태성에게 전화를 못 하게 했다.

또 혼자 감당하려고 하다니… 이 착한 아이를 어쩌면 좋지?

처음 하은이 임신을 했다고 얘기했을 때, 일이 커질 것을 염려해 자기 아버지에게도 심지어 태성에게도 비밀로 하면서, 친정 엄마도 없어 자신을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숙영은 생각했다.

내가 챙겨야겠구나.

게다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 설움, 누구보다 숙영은 잘 알고 있었기에 태성이 외면하는 하은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이 가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하은이 결혼해서 행복하길 바랐는데 유산이라니… 아빠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떠난 아이도 불쌍하고, 하은도 불쌍해 숙영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무심한 제 아들 대신 하은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은아,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태성이한테 말하자.”

- 아뇨, 아이도 없는데, 오빠한테 말해서 괜히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 오빠까지 힘든 거 싫어요.

“하은아… 그래도 이건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야.”

- 어머니, 오빠 위해서라면 저 혼자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오빠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안 그래도 오빠 힘들 텐데…

“이 와중에도 태성이 걱정뿐이니? 너도 참… 태성이가 네 마음을 빨리 알아줘야 할 텐데… 미안하다, 하은아.”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러니까 절대 오빠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알았어….”

- 흑흑…

“하은아, 그만 울어.”

- 어머니, 오빠랑 저… 이제 끝인 거겠죠? 어머니도 저 이제 안 보실 거죠?

“그런 게 어디 있어. 하은아….”

-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아이 지켰어야 했는데….

“아니야, 죄송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내가 다 해줄 테니까.”

- 감사합니다. 

“그래, 마음 편히 먹고.”

- 네, 조금 쉬고 싶어요. 내일 연락드릴게요, 어머니.

통화를 끝낸 숙영은 마음이 무거워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편, 전화를 끊은 하은이 누워 있는 곳은 피부관리샵의 마사지 베드였다.

“아, 전화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이 정도 했으면 절대 전화 안 하겠지? 아, 피곤해….”

하은은 호출 벨을 눌렀다.

“이제 들어와도 돼요.”

하은의 부름에 관리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 오늘은 등 좀 집중적으로 해줘요. 스트레스 받았더니 등이 자꾸 뭉치네.”

“네, 알겠습니다. 어제 보톡스랑 필러 시술 받으셨다고 했죠? 그래서 오늘 얼굴 관리는 그냥 팩 정도로 가볍게 진행하겠습니다.”

“알아서 해요.”

하은은 돌아 누워서 마사지 베드에 엎드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