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놔주기 싫던 밤
“여보세요. 아… 태성 오빠? 음… 나중에 얘기해줄게. 이렇게 기사로 먼저 나와서 태성 오빠도 나도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몰라. 응? 반박 기사가 났다고?”
태성이 바로 반박 기사를 낸 줄은 몰랐던 하은은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나중에 정식으로 기사 내려고. 그래서 반박 기사 낸 거야. 그래. 당연하지. 나중에 좋은 소식 있거든 연락할 테니까 그때 보자. 응. 알았어.”
태성과 곧 결혼할 것처럼 뉘앙스를 풍기고 전화를 끊는 하은이었다.
이런 통화를 할 때마다 하은은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있었다.
“반박 기사 아무리 내봐라… 그나저나 이런 희열을 그동안 혼자 느끼고 있었니, 장서현?”
기분이 좋아서 혼자서 방방 뛰는데, 이때 방문을 열고 백 회장이 들어왔다.
“기분 좋아 보이는구나.”
“어? 아빠!”
“가만히 있으랬더니 기사까지 내고… 하은아, 이젠 아빠한테 맡기고….”
“아빠, 제 일이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빠는 제가 들키지 않게, 그것만 잘 막아주세요.”
“백하은.”
“아빠,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태성 오빠도 곧 저한테 오게 돼 있다고요. 도와주세요.”
백 회장은 그런 하은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이대로 손을 놓기에는,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면 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지금은 뭐 해?”
“일하고 있었어요. 어? 이제 제 차례 됐어요. 저 조금 바빠서 끊을게요.”
며칠째 통화만 되는 서현이었다.
통화를 하면, 화가 났다거나 삐친 기색은 보이지 않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 점이 태성을 더 미치게 하고 있었다.
차라리 화를 내면 좋겠는데, 화를 내지도 않고.
서현은 하은과의 스캔들 기사에 대해서도 절대 묻지 않았다.
일부러 얘기를 꺼내 변명을 하려고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오는 대답은 괜찮다, 신경 안 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대답뿐.
그러면서도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오피스텔에 가도 만날 수가 없는 서현이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나 오는 건지.
태성은 서현의 얼굴을 못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답답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고 비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회장님, 저녁 약속 장소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어, 그래.”
태성은 마음을 다잡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잠시 후,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한 태성은 고 비서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나누려고 하는데, 맞은편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현이었다.
서현을 보느라,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모를 정도로 태성은 그녀에게 정신이 빼앗기고 말았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이렇게 만나니까 더 좋아 기분이 들뜨는데… 서현은 아직 태성을 보지 못한 듯 같은 테이블에 있는 여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태성은 같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과 좀처럼 대화에 집중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서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서현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는 서현에게 눈짓을 한 태성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그제야 같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태성의 신경은 여전히 서현에게 향해 있었다.
어느새 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태성은 조급해졌다.
이내 서현이 레스토랑을 나가자, 태성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제가 다음 스케줄이 있는 걸 깜빡했네요. 얘기는 충분히 나눈 것 같으니 고 비서 통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얼른 자리를 정리한 태성은 달려가 호텔을 나서는 서현을 붙잡았다.
“장서현.”
“……?”
서현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냈다.
“누가 봐요. 여기 사람들 많잖아요.”
“뭐 어때?”
그러면서 태성은 서현의 손을 꽉 잡았다.
“스케줄 끝난 거지? 이 시간에 또 약속이 있을 리는 없고.”
서현이 머리를 굴리려는 게 보이자, 태성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가자.”
“어딜요?”
“사람들 신경 쓰인다며.”
“저 약속….”
“없는 거 다 알아. 있어도 나랑 같이 가. 나 오늘 너 놔줄 생각 없으니까.”
“태성 씨….”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태성은 서현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은 뒤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하은아, 큰일 났어.”
하은은 호들갑 떠는 친구의 목소리에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왜?”
“말할까 말까 했는데… 아무래도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사진 보내줄 테니까 봐.”
“무슨 사진인데?”
“보면 알아.”
하은의 친구는 통화 도중에 사진을 전송했다.
“봐, 보냈으니까.”
뭐길래 이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어 하은은 바로 사진을 확인했다.
태성과 서현이 호텔 로비 한복판에서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을 본 순간, 하은은 혈압이 올랐다.
하지만 친구에게 티를 낼 수는 없어서 애써 태연한 척 반응했다.
“이게 뭐?”
“뭐라니? 둘이 관계 아직 정리 안 한 거야? 어쩐지 너무 빨리 반박 기사를 냈다 했어. 태성 오빠 지금 양다리 걸치는 거 아니야?”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두 사람 만나는 거 이미 알고 있었어.”
“뭐?”
“서현이가 하도 매달려서 태성 오빠가 오늘 확실히 정리하겠다고 했거든.”
“근데 왜 손을 잡고 가?”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이니까 조용한 곳으로 가려고 한 거겠지.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다른 상상은 하지 마.”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너 드라마 너무 본 거 아니니? 좀 전에도 태성 오빠랑 통화했어. 이따 밤에 만나자고 해서 나 외출 준비 중이니까 이만 끊자.”
“어? 어 그래….”
전화를 끊은 하은의 표정이 빠르게 식었다.
“장서현…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 이거지?”
하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태성은 서현을 호텔에서 본 순간부터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며칠 못 봤을 뿐인데도, 업무상 미팅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서현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며칠 동안의 답답함과 불안함을 해소하려는 듯 태성은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서현에게 몸을 붙였다.
한치의 여유로움도 찾을 수 없는 몸짓으로 서현을 밀어붙이는 태성이었다.
“태성 씨, 천천히요….”
‘천천히’라고 말하는 그녀가 야속할 정도로 태성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어떻게 참을 수 있지?
어떻게 천천히 하라는 거야?
네가 내 눈 앞에 있는데, 네가.
태성은 서현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 빈틈없이 맞물렸다.
점점 흥분하는 그녀를 보면서 하반신은 뜨겁게 피가 돌기 시작했다.
서현의 앞에서는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태성이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옹졸해지는 이 마음을 어찌할 줄을 몰랐고, 행여 이 마음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모습조차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서현을 보는 순간, 이 참을 수 없는 욕망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불안했다.
서현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설명하기 힘든, 평소와 다른 느낌에 태성은 불안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쳤지만, 서현의 앞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자꾸 그녀 앞에서 조마조마해지는 이 마음이… 불안해지는 이 마음이… 태성의 욕망을 더 불태우고 있었다.
그녀를 안는 순간에도 그녀를 더 안고 싶은 충동이 일던 밤.
그녀를 놔주기 싫던 밤….
몇 번이고 그녀의 마음을 확인받고 싶던 밤…
태성은 밀려오는 불안감에 서현을 눈에 가득 담고 싶었다.
그녀의 안에 저를 깊이 새겨 넣고 싶었다.
그녀가 어디론가 도망갈 것만 같아서,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내가 이런 못난 생각을 한다는 걸 넌 모르겠지?
태성은 못난 생각, 말도 안 되는 불안감을 애써 밀어내고 다음 날 아침 겨우 출근을 했다.
서현에게 저녁에 보자는 말과 함께.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그날 저녁, 서현은 없었고… 쪽지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태성 씨, 이젠 당신이 필요 없어졌어요. 잘 지내요.]
그렇게 서현은 떠나버렸다.
* * *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끝인 거야. 끝.
비행기에 올라탄 서현은 창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태성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게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그의 온기가 몸에 남아 있는 듯한데…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나니, 이젠 볼 수 없는 사람이 됐다는 게 현실로 다가왔다.
서현은 태성이 준 목걸이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서현이었다.
꿈이라면 이건 악몽이 분명했다.
서현은 공항으로 오기 전 숙영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오피스텔에 쪽지를 남기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
마침 오피스텔을 찾아오던 숙영을 맞추진 서현은 멈칫했다.
그녀의 뒤에 하은이 있어 더 깜짝 놀랐다.
왜 저 두 사람이 같이 온 거지?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숙영과 하은이 함께 앉고 맞은편에 서현이 앉았다.
어쩐지 2대 1로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떼인 돈 받으러 온 사람들처럼 서현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숙영은 서현의 물음에 답할 생각은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가는 길인가 보구나?”
“네.”
그 말에 숙영과 하은이 서현의 옆에 있는 짐을 힐끔 바라봤다.
“짐을 보아하니… 아예 나가는 거니?”
“네.”
“이래놓고 또 나타나려고?”
“아뇨….”
“아니라고 잘도 말하는구나? 내가 지난번에 알아듣게 설명한 것 같은데… 어제 호텔에서 소동을 일으켰다고?”
“어제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서현이 변명을 하려고 입을 떼려고 하는데, 숙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가는 길이라고 했지? 다신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성이가 모르는 곳으로 가서 평생 숨어 살아.”
죄인 취급을 하는 숙영에게 서현은 더 이상 고분고분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태성에게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런 결심을 안 했다면, 지금 그를 떠나지도 않을 테니까.
근데 끝까지 상처를 주는 숙영을 보며, 서현은 서운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 그래도 태성의 약혼녀로서 보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하은을 끌고 나온 숙영을 보면서 배신감까지 들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서현을 본 하은은 숙영을 향해 울먹였다.
“어머니… 저 불안해요.”
그 말에 숙영이 하은을 달래듯 그녀의 등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서현을 째려봤다.
“네가 다신 돌아오지 말아야 하는 이유, 말해주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