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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44)화 (44/111)

44화 

멀어지는 연습

“뭔데 그래요?”

무언가 이상해 서현이 보려고 하자, 선배가 얼른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별거 아닌데 호들갑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어색해 서현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열고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실시간 검색어에 태성의 이름이 뜨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그리고 하은의 이름… 이태성, 백하은 결혼 임박… 

“……?”

서현이 멍… 하자, 선배가 일부러 후배에게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우와,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선배, 오늘 미세먼지 장난 아닌데?”

“아, 그… 그래? 미세먼지 운치 있잖아.”

“미세먼지가 운치가 있다고요?”

“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너 자장면 먹을래? 시켜줄까?”

선배가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알아들은 후배는 서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 그… 그럴까요?”

횡설수설하면서 자꾸만 눈치를 보는 두 사람을 보는 게 불편했던 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나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네. 다음에 봐요. 나 갈게.”

선배와 후배에게 급하게 인사를 하고 서현은 쫓기듯 녹음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포털사이트를 검색해보는데, 그때였다.

Rrrrrr- Rrrrrrr-

전화가 걸려왔다.

* *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전화를 받지 않는 서현 때문에 태성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스캔들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에 태성은 기가 막혔다.

사진을 보아하니 회사 주차장이고, 이 포즈는… 태성은 이상하게 하은이 엉겨 붙던 그날이 떠올랐다.

“하….”

괴로워하며 한숨을 내쉬는 태성을 보던 고 비서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막았어야 했는데… 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야, 작정하고 장난질하려는 사람을 무슨 수로 막아.”

“작정하고요?”

“이거야 원… 생각보다 더 머리가 나쁘잖아? 죄질도 나쁘고….”

태성은 스캔들 사진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고는 고 비서를 바라봤다.

“고 비서, 반박 기사 올려.”

“네, 알겠습니다.”

고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서현에게 전화를 거는데, 여전히 받지 않는 그녀였다.

답답한 마음에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오늘 스케줄 취소해.”

“네? 부회장님!”

고 비서가 애타게 불러봤자, 태성은 이미 집무실을 나간 뒤였다.

* * *

“이게 얼마 만이여?”

“할머니!”

“어떻게 지냈어? 더 말랐네….”

순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지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지낸 이야기, 걱정과 잔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아이고, 내가 중요한 얘기를 하러 나와서… 보니까 좋은 마음에 또 떠들기만 했네.”

“무슨 얘기인데요?”

이제야 본론을 시작하는 순애였다.

“내가 어제 뭘 발견해서 이렇게 연락했어.”

“뭐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내가 깜빡 까먹고 있었지 뭐여.”

“뭔데요?”

“자, 이거.”

순애가 건넨 건 열쇠였다.

“이게 뭐예요?”

“장 회장님이 재혼할 때, 나한테 줬던 열쇠.”

“네?”

“혹시라도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서현이 너한테 주라고 한 거여.”

“이게 무슨 열쇠인데요?”

“금고.”

“이걸 왜….”

“그땐 네가 아빠 돈으로 유학도 안 가겠다고 하고, 아무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였으니까 장 회장님이 나한테 맡기더라고. 근데 이 늙은이가 깜빡했지 뭐야.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여.”

“할머니….”

“모르긴 몰라도, 금고 안에 있는 돈으로 생활은 될 거여. 빚잔치 다 끝났겠다 네 돈이니까 가져다 써.”

“할머니 퇴직금도 못 드렸는데, 우선 할머니 퇴직금부터….”

“됐어. 진짜 됐어.”

“할머니….”

“일찍이 과부 되고 막막할 때, 장 회장님 덕분에 내 새끼들 공부 다 시키고 시집 장가도 보낼 수 있었던겨. 어디 가면 이 월급 주는 줄 알아? 택도 없지. 그리고 애들 결혼 시키고도 나 어디 갈 데 없을까 봐 이 늙은이 데리고 있어 준 거 나 다 알고 있다. 늙어서 간도 제대로 못 맞추는데 타박 한 번 안 하시고, 장 회장님 은혜… 나 다 못 갚어.”

“할머니….”

“그 나쁜 년만 아니었어도, 빌어먹을 여편네. 장 회장님이 그 망할 여편네를 믿지 못했던 거여. 그러니까 나한테 이런 걸 맡기지.”

옥련을 욕하는 순애를 보며 서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믿지도 못할 거였으면, 아빠는 도대체 왜 재혼을 한 걸까?

서현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순애가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능력이 안 돼서 같이 데리고 살지도 못하고… 우리 가여운 서현이… 내가 네 새끼도 같이 키워주고 싶었는디….”

“아니에요, 할머니.”

“힘든 일 있으면 그래도 할미 찾아, 알겠지?”

“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혼자가 아님을 느낀 서현은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잠시 후, 은행 금고를 찾은 서현은 금고 문을 열었다.

현금과 금괴가 들어 있었다.

금괴를 보는 순간, 참 아빠답다는 생각에 서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흔한 편지 한 장도 남기지 않은 아빠였다.

행여 편지가 있나 뒤져봐도 보이질 않았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독단적인 아빠였다. 끝까지 이렇게 밉게 아무 설명 없이 떠나버린 아빠였다.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아빠였다.

서현은 복잡한 심경에 한참 동안 금고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 * *

옥련의 딸 지은은 갑자기 증상이 안 좋아져서 보조장치를 이용해 심장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곧 이식을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버텼는데, 기증해 주기로 했던 심장 기증자가 갑자기 취소를 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심장 이식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가 실망을 하고 나니, 지은의 상태는 더욱더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옥련은 담당의를 만나 또 한 번 사정했다.

사정해서 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옥련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담당의가 회진을 돌고 병실을 나가자 옥련은 따라 나갔다.

그러고는 담당의 앞에 옥련이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뭐든지 하겠습니다. 저 이제 돈도 있어요. 수술 이제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지은에게 딱 맞는 심장이 왔을 때,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시킨 옥련이었다. 그래서 장 회장을 이용할 나쁜 생각까지 하고, 이젠 드디어 돈이 있는데… 돈이 있는데 심장이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옥련을 담당의가 일으켰다.

“이러지 마시고, 저도 해드리고 싶죠. 부모 마음 다 똑같지 않습니까? 저도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어머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식이라는 게… 아시잖아요. 누군가의 장기를 받아야 하는 건데….”

“그 기증 취소한 아이 부모님이요. 제가 가서, 제가 그 부모 좀 만나보면 안 될까요?”

“지은 어머님!”

“제발요, 선생님.”

옥련은 담당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지은 어머님, 남의 자식도 생각을 하셔야죠. 뇌사에 빠진 그 아이 부모의 마음도 어머님 못지 않다는 걸, 아니 더 지옥일 수 있다는 걸 왜 모르세요?”

“그래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려야죠, 제발요…. 그 아이는 어차피 살기는 틀린 거잖아요. 그렇다면 살릴 수 있는…”

“어머님!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지만 남의 자식도 자식입니다. 어머님 자식만 귀한 거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은 버리고, 이타적인 생각도 좀 하시면서 기다리셨으면 좋겠네요.”

남의 자식도 자식이라고?

내 자식이 지금 죽게 생겼는데, 남의 자식 챙길 정신이 어디 있어?

이 돈이 어떻게 마련한 돈인데… 돈만 있으면 딸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옥련은 절망했다.

* * *

급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오피스텔로 들어간 태성은 집 안 구석구석 찾아봤지만, 서현이 보이지 않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는 서현이었다.

“후….”

태성은 뭘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오피스텔 주변을 불안하게 서성이는데,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서현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어디야?”

- 저 지금 누굴 좀 만나서요.

“어디야? 데리러 갈게.”

- 아니요. 전에 함께 살던 할머니 만났어요. 할머니 집에서 자려고요.

“그냥 오면 안 돼? 할 얘기 있는데….”

- 다음에요. 기다릴 것 같아서 연락했어요.

“장서현, 봤지? 기사?”

- 그거라면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진짜 괜찮아? 아닌 거 알지?”

- 네, 쉬어요.

서현이 먼저 전화를 끊고, 태성은 이를 악물었다.

한편, 전화를 끊은 서현은 호텔 방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태성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서현이었다.

숙영의 말도, 하은과의 스캔들 기사도, 서현을 옥죄고 있었다.

자신만 빠지면 모든 게 완벽할 것 같은 그의 삶에, 마치 불순물처럼 느껴졌다. 

절대 섞일 수 없는, 섞여서도 안 되는 불순물.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그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지금쯤이면 연락 올 때가 됐는데… 왜 전화가 안 오지?”

하은은 오늘 난 스캔들 기사를 보면서 태성의 전화를 기다렸다.

“사진 좀 잘 찍어주지… 내가 너무 안 예쁘게 나왔잖아.”

기자를 불러서 돈을 주고 일부러 기사를 낸 하은이었다.

이렇게라도 그를 자극해야 제 존재를 알아줄 것 같아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태성과 자신의 관계를 알아주길 바랐고.

그런데 정작 제일 기다리는 태성의 전화는 오지도 않고, 지인들의 전화만 빗발치고 있었다.

오늘 종일 태성과 어떤 사이냐는 연락을 받느라 하은은 바쁜 하루를 보냈다.

Rrrrrr- Rrrrrr-

“또 전화야?”

하은은 싫은 척하면서도 입가엔 미소를 띤 채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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