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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32)화 (32/111)

32화 

힘들면 놔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보고 뭘 어쩌라고요?”

태성은 서현의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당신은 오래전부터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았고, 아버지가 재혼한 뒤로는 아예 인연 끊고 지낸 거야. 그러던 중 당신 아버지는 성폭행을 저지른 거고.”

“…당신 무서운 사람이네요.”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그러니까 얼른 차에 타.”

“아뇨, 안 타요.”

서현은 태성의 손을 뿌리치고 택시를 잡으려고 걸어 나갔다.

그런 서현을 태성이 또 붙잡았다.

“장서현.”

“당신한테는 이미 제 아빠가 성폭행범인 거네요?”

“이성적으로 생각해.”

“어떻게 가족한테 이성적일 수가 있어요? 아빠한테 직접 얘기 듣고 나서 비난해도 그때 비난할 거니까 이 손 놔요.”

그래도 태성이 손을 놓지 않자, 서현이 그를 째려보면서 손을 뿌리쳤다.

“놔요. 걸어서라도 집에 갈 거니까.”

“하….”

고집을 부리는 서현을 보고, 차로 걸음을 돌릴까 하다가 태성은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장서현….”

“놔요.”

서현의 목소리도 눈빛도 너무 단호하자, 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려다줄게, 타.”

서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태성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데려다준다고.”

태성은 차 문을 열어 보조석에 서현을 태우고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다시 생각해. 정말 집으로 가야겠어?”

“저 그냥 내릴….”

“알았어, 가.”

서현이 내리기 전에, 태성은 운전을 시작했다.

* * *

장 회장 관련 뉴스를 텔레비전으로 확인한 백 회장은 텔레비전을 끄고 박 실장을 바라봤다.

“너무 편집된 거 아니야?”

“그래도 내용은 다 밝혔으니까요. 그리고 궁금한 사람들은 동영상을 찾아보고 있어서 조회수도 굉장히 높습니다”

그 말에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백 회장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지금쯤 이 소식이 화명 이 회장 귀에도, 이태성이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겠구만?”

“물론입니다. 대한민국이 떠들썩합니다.”

“떠들썩한 집안과 그것도 범죄로 떠들썩한 집안과의 혼례라… 과연 어떻게 될까?”

백 회장이 호탕하게 웃자, 박 실장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멈춘 백 회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되고 있구만.”

“물론입니다.”

“김 실장이란 여자는?”

“김은영 씨는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허튼짓 못 하게 하고, 일 끝날 때까지 긴장 풀면 안 돼, 박 실장.”

“물론입니다. 지금 심리가 조금 불안한 상태이긴 한데… 가족들을 약점으로 잡고 있는 한 비밀을 누설할 일은 절대 없어 보입니다.”

백 회장은 앞에 놓인 차를 들어 향을 맡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 비서 엄마가 아프시다고 했나?”

“네, 어머니가 현재 암 투병 중인데다가 동생들이 줄줄이 있어서 돈이 아주 궁한 상태였습니다. 빚도 많았고요.”

“하늘이 돕는구만. 장 회장 옆에 그런 비서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게요. 장 회장이 평소에 보너스 이외에도 그렇게 잘 챙겨줬다고 하는데… 돈 앞에서 사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래서 내가 자네한테 월급 많이 주는 거 아니야. 하하하. 어디 아픈 가족 없지?”

“네, 건강합니다.”

“그래그래, 그리고 사람이 원래 부모 자식한테는 약해지는 법이야. 아주 적당한 애 잘 골랐어. 잘했어, 박 실장.”

“감사합니다.”

“그 비서가 자네한테 고마워할 거야. 자네가 한 불쌍한 사람을 살렸구만. 아니 그 집안을 살렸어.”

백 회장과 박 실장은 서로를 마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아! 박 실장.”

“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 여자 인터뷰도 바로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 * *

서현의 집으로 가는 길.

운전을 하는 태성도, 보조석에 앉아 있는 서현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집 근처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소란스러운 주변 분위기에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서현은 차 창문을 열었다.

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곧 구급차가 옆을 지나갔다.

이때, 태성의 휴대전화로 고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

“어… 뭐라고? 알았어….”

태성의 목소리에 서현이 그를 바라봤다.

심각해 보이는 통화에 서현은 신경이 쓰였다.

태성이 전화를 끊자마자 서현이 다급히 물었다.

“아빠 얘기예요?”

태성이 우선 차를 돌려 운전을 시작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장 회장님, 병원으로 실려가셨대. 아무래도 지금 저 구급차인 것 같다.”

“네? 아빠….”

“가정부 아주머니께서 발견하셔서 함께 구급차 타고 가신다니까 우선 병원으로 가자.”

그 말에 서현이 순애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순애였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장 회장은 긴급수술에 들어갔고, 서현과 태성은 수술실 앞을 지켰다.

멍해진 서현을 대신해 태성은 바쁘게 통화를 나눴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전화였겠지만, 병원 관계자에게 전화해서 더 신경 써 주십사 부탁을 하고, 고 비서에게 업무 지시도 내렸다.

“고 비서, 경호업체 불러서 병원에 배치하고, 1인 병실 알아봐. 간병인도 알아보고.”

통화를 마친 태성이 서현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전화가 또 걸려왔다.

걸려온 전화를 확인하는 순간, 태성은 미간을 좁혔다.

* * *

태성이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이 회장과 숙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파혼 얘기를 꺼냈다.

“이런 집안과 결혼을 하는 건 집안 망신이다. 얼른 정리하는 게 맞아.”

“맞아요. 태성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비서 성폭행이나 하는 그런 장인을 넌 두고 싶니? 난 절대 그런 사람 사돈으로 못 둔다. 돈 없는 거야 넘어간다지만 이건 문제가 다르잖아.”

“이미 예전에 끝난 사이인 거로 기사부터 내고….”

대꾸 없이 듣고만 있던 태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뇨, 안 됩니다. 대신 결혼은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파혼은 안 합니다.”

태성의 말에 이 회장과 숙영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냐?”

“태성아! 너 제정신이야?”

“이건 서현이 잘못도 아니고….”

“이태성!”

이 회장의 호통에 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분노에 가득 차 잔뜩 눈살을 찌푸린 이 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뭐? 서현이 잘못? 이 결혼, 네 와이프를 고르는 게 아니라 화명의 안주인을 고르는 거다. 정신 차려.”

태성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이 회장이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너까지 실망시키지 말아라. 벌써 잊은 거냐? 여자한테 빠져서 인생 망친 놈은 그놈 하나로 족하다.”

“여보!”

숙영이 이 회장의 말을 끊자,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걸음을 옮긴 태성의 뒤로 이 회장이 말했다.

“서현이 정리해라. 네 혼처 자리는 다시 알아볼 테니.”

태성은 잠시 멈칫했던 걸음을 옮겨 본가를 나왔다.

* * *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 이상이나 가린 김 실장이 출국 수속을 마치고 돌아서자, 뒤에서 김 실장을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받아보시죠.”

김 실장은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바꿨습니다.”

- 접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박 실장의 목소리에 김 실장은 소름이 돋았다.

“알고 있습니다.”

- 평생 한국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이제 한국도 떠나는데…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죠? 누가 뭐 때문에 이런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을까요?”

-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죠? 그걸 알게 되면 김 실장님은 물론 가족들도 무사하질 못할 겁니다. 제가 가족들 목숨 줄을 잡고 있다는 거 잊으셨습니까? 받을 거 다 받아놓고 이러면 곤란하죠?

“…약속은 꼭 지켜주세요. 장 회장님이 감옥에 가는 건 절대 안 됩니다. 그저 흔들어 놓는 것뿐이라는 말 꼭 지켜주십시오. 장 회장님께서 감옥에 가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진 않겠습니다.”

- 알았으니 평생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사십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비밀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김 실장님 가족들이 무사하길 바라면 말이죠.”

“압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죠.”

-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전화를 끊은 김 실장은 남자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그러고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런 김 실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는 몇 걸음 옮겨 간단한 통화를 나눴다.

“네, 지금요? 알겠습니다. 근데 박 실장님? 하은 아가씨 어디로 모시면 됩니까? 네. 알겠습니다.”

박 실장? 하은?

이어폰만 꽂고 있었을 뿐, 음악은 듣지 않고 있던 김 실장은 남자의 통화를 모두 엿들었다.

남자가 통화를 끝내고 다가오자, 김 실장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연기했다.

“가시죠.”

“네?”

김 실장은 한쪽 이어폰을 뺐다.

“뭐라고 했죠?”

“가시죠.”

“아, 네.”

김 실장은 바로 출국 게이트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끝까지 감시했다.

* * *

“나 왔어.”

홀로 병실을 지키고 있는 서현을 찾아온 태성은 고 비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고 비서는 챙겨온 음식들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뭐라도 먹어. 당신도 쓰러지니까.”

“괜찮아요.”

“상태는 어떠셔?”

“기자 인터뷰하고 그대로 기절하셨어요. 너무 무리하신 것 같아요.”

“그래… 고 비서가 기자들한테도 결백하다는 증거 자료 뿌렸으니까 반박 기사 나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장 회장은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를 불러 반박 기사를 냈다.

누구보다 결백을 주장하는 장 회장을 보며, 서현은 아빠를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서현이 아는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장 회장은 잠들기 직전까지도 서현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잠든 장 회장을 보고 있던 서현은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아, 김 실장님은요? 찾았어요?”

“출국했어. 계획적으로 준비했더라고.”

“아직도 김 실장님이 그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런 서현을 태성이 조용히 껴안아 줬다.

“많이 지쳐 보인다. 좀 눕는 거 어때?”

서현이 고개를 젓자, 태성이 고개를 내려 눈을 맞췄다.

“좀 쉬자. 영양제라도 준비해 둘게.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야, 당신.”

서현은 못 이기는 척, 태성을 따라 병실 안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잠시 후, 태성은 침대에 누워 링거로 영양제를 맞는 서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 그를 서현도 빤히 쳐다봤다.

“지금은 무슨 생각 해요?”

“당신은?”

“미안해요….”

“갑자기?”

“미안해요, 자꾸….”

서현의 미안하다는 말에 태성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안하다는 말 그만하고, 눈 좀 붙여.”

“태성 씨….”

“응?”

“너무 힘들면 놔요… 그래도 돼요.”

서현의 말에 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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