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진짜로 만들고 싶은
“하….”
태성은 그녀의 목덜미, 쇄골을 스치고, 가슴을 지나 온몸 구석구석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몸을 붙였다.
“장서현,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정염에 휩싸인 그의 목소리가 서현의 심장을 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인 건지…
이래도 되냐고요? 뭘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그런 눈빛을 하고 있으면 난… 난….
감정을 담아선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이 모든 감정을 억누른다는 건 서현에게 힘든 일이었다.
꾹꾹 누르면 누를수록 이미 넘쳐흐른 그를 향한 감정들이 봇물처럼 새어 나올 뿐이었다.
“하….”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소용없었다.
의무라 할지라도, 도리라 할지라도, 감정 하나 섞여 있지 않다 하더라도 진하게 눈빛을 부딪치며 살결을 부딪치는 이 순간, 이 남자의 눈은 진심 같았다.
지금 당장 그와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정도로 그의 눈빛은 진심 같았다.
이게 어떻게 감정이 없는 거지?
이 남자… 자기 진심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이대로 이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싶은데… 마음은 가지려 하지 않는 이 남자를…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지?
당신은 내 몸만 원하지만… 난 그럴 수 없는데 어떡하죠?
뜨겁게 몸을 붙여오는 이 순간, 진심처럼 느껴지는 그의 눈빛을 진짜 진심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 * *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눈 부셔 서현은 눈을 떴다.
몇 시지?
서현은 고개를 돌렸다.
“어?”
침대에 태성이 없자 서현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그 어디에도 태성은 없었다.
“어디 갔지?”
서현은 침대에서 나와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인기척이 들리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통창 밖으로 태성이 노천욕을 하는 게 보였다.
밤엔 잘 몰랐는데, 개인 노천탕이 딸린 객실이었다.
서현은 문을 열고, 그에게 다가갔다.
“언제 일어났어요?”
서현의 목소리에 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현을 향해 오라는 고갯짓을 했다.
오라고 해서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수건으로만 하체를 가린 채 노천탕에 들어가 있는 태성과 가까워지는 게 서현은 조금 부끄러웠다.
서현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부끄러운 건가?”
“아침부터 왜 이렇게 벗고 있어요?”
“당신도 벗으면 되겠네.”
“전 사양할게요.”
“들어올래?”
“…….”
태성이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서현은 조금 고민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태성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서현이 무심결에 그의 손을 잡는 순간, 태성이 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어?”
순식간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 서현은 태성의 품에 안겨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헉… 이게 뭐예요?”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나?”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웃는 그를 보는 순간, 서현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이없어….”
입고 있던 슬립이 다 젖어 몸이 비치자, 서현이 손으로 몸을 가렸다.
“다 젖었잖아요….”
태성이 물속에서 나풀거리는 슬립을 잡아 벗겨내려 하자 서현이 막았다.
“누가 보면 어떡해요?”
태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여기 누가 있지?”
서현도 그를 따라 고개를 좌우로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이었다.
태성이 여전히 슬립을 손에 쥔 채 빤히 쳐다보자 서현이 막았던 손을 거뒀다.
태성은 피식 웃으며 서현의 몸에서 슬립을 벗겨내고는 그녀의 입술에 짧게 뽀뽀를 건넸다.
그러고는 자신의 하체를 덮고 있는 수건을 풀어 벗어 던졌다.
“……?”
서현이 놀라자, 태성은 그녀의 몸을 더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농염해졌고,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 서현은 순종적으로 그에게 이끌렸다.
태성은 서현을 향해 느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의 앉은 자세를 고쳐 마주 보게 만들었다.
탕 속에 있는 몸은 따뜻한데, 공기에 노출된 살은 차가웠다.
마주한 맨살도 열도, 마주치는 눈빛의 열도 함께 오르고 있었다.
태성은 서현의 턱을 끌어당겨 입술을 머금었다.
부드럽게 시작한 키스는 고개를 틀 때마다 더 깊게 맞물려 서로의 입 안을 헤집었다.
“음….”
언제나 달콤한 키스를 건네는 그였다.
거친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다정하고 섬세하게 어루만져주는 느낌…
입술이 떨어지고 마주한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서현은 눈동자가 떨렸다.
그의 눈빛을 보는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 어떡해요? 너무 좋아….’
서현은 진심을 들킬 것만 같아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일어나 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태성이 붙잡았다.
“어디 가?”
“나갈래요.”
태성이 서현을 휙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서현은 반항하지 못한 채, 더 세게 껴안는 그의 품에 안겼다.
“이렇게 있어.”
이 품은 왜 이렇게 따뜻한 건지….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서현은 그를 더 세게 껴안았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눈물짓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혼자만 진심이 되어버렸다.
그가 믿어주기는 할까?
그의 배경을 원해서 시작한 관계였다. 절대 순수하지 않은 관계였다.
근데 이제와 진심이라고?
서현은 스스로를 의심했다.
배경이 좋아 그가 좋아졌다 착각한 건 아닐까? 난 진짜 진심이 맞을까?
이렇게 나조차 날 의심하는데 그가 믿어줄 리 없겠지…?
상처받기 싫은데… 이런 관계에서 촌스럽게 당신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할 수도 없는 현실이 너무 가혹했다.
서현은 물로 얼른 눈물을 감췄다.
그러고는 살짝 몸을 떨어뜨려 태성의 눈을 바라봤다.
쪽-
그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이 마음이 전달되길…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살짝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태성은 서현의 눈을 바라봤다.
어젯밤부터 조금 달라진 그녀였다.
태성은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처음과는 전혀 달라진 그녀였다.
이제 반항하는 건 완전히 단념한 건가?
태성은 서현을 떠보듯 말을 던졌다.
“오늘 같이 있어.”
“네.”
“내일도.”
“네.”
“내가 부르면 언제든 올 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와.”
“그럴게요.”
서현은 대답을 끝내자마자 태성의 품에 안겼다.
“……?”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서현이었다.
이렇게 말을 잘 듣는다고?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뭐지?
태성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금방 생각을 정리했다.
서현과 어떤 사이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는 걸.
그래, 당신에겐 내가 필요하니까.
잠시 착각할 뻔했다는 사실에 태성은 어이가 없었다.
필요에 의한 관계였지.
내가 꽤 쓸모 있다고 느꼈나 보군.
그래, 내가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듯. 당신도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돼야지. 어떤 식으로든.
당신과 난 그런 관계니까.
태성은 서현의 눈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노골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거칠게.
* * *
태성이 고 비서와 함께 미팅 겸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설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민혁이 눈에 들어왔다.
민혁도 일 관련해서 관계자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 비서와 함께 레스토랑을 찾은 거였다.
태성과 민혁은 서로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려는 민혁을 향해, 태성이 말을 걸었다.
“아는 척 좀 하자.”
“어, 오랜만이네.”
“서현이한테 대할 때랑은 공기가 다른데?”
그 말에 민혁이 태성의 앞으로 걸음을 옮겨 눈을 마주쳤다.
“서현이니까.”
“아… 장서현은 좋겠네? 이렇게 친절한 오빠도 다 있고?”
“…….”
“난 네가 남의 거에 침 흘리는 취미 있는 줄은 몰랐는데….”
태성은 민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툭툭-
“선 지켜. 그거 추하다.”
태성은 민혁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경고하든 꽉 쥐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은 태성은 이내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갔다.
그 뒤로 주먹을 말아 쥔 민혁이 보였다.
* * *
혼자 밥을 먹고 있던 옥련은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순애를 불렀다.
“할머니, 이리 좀 와보세요.”
“네.”
“음식 간이 왜 이래요? 너무 싱겁다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회장님은 싱겁게 드셔야 한다고 김 박사님이 당부를 하셔서….”
“주치의 바뀐 지가 언젠데 김 박사 타령이에요? 간 좀 하세요.”
끝까지 알았다고 대답은 안 하는 순애였다.
“근데 회장님은 식사 안 하세요?”
“지금 주무시니까 깨우지 마세요. 그나저나 이거… 무슨 맛이 나야 먹죠. 도저히 못 먹겠네. 회장님 입만 입이에요? 간 좀 하세요. 이걸 무슨 맛으로 먹으라고. 다시 하세요.”
옥련이 순애에게 나물 접시를 건네고, 다시 숟가락을 들려는데 전화가 왔다.
“누구야?”
모르는 번호였지만, 옥련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통화를 하는 옥련의 얼굴색이 사색이 되었다.
전화를 끊은 옥련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외출해요.”
“네, 갑자기요?”
밥은 먹지도 않고, 자리를 뜬 옥련의 뒷모습을 보며 순애는 이를 갈았다.
“저 불여시.”
한편, 집 밖으로 나간 옥련은 집 앞에 세워진 차에 몸을 실었다.
옥련이 타자마자 차는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