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스며드는 중
서현이 태성과 약혼식을 하고 얼마 안 돼서 서현의 엄마 연실은 암을 선고받았다.
연실의 병을 알면 서현이 유학 중에 돌아올까 봐 연실도, 장 회장도 서현 몰래 병을 치료했지만 결국 병이 점점 악화되면서 더 이상은 비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서현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실은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장 회장은 연실의 간병인이었던 옥련을 집으로 들였다.
“아빠… 지금 이게… 저 여자가 왜 엄마 방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됐다.”
“아빠!”
서현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절망하고 말았다.
왜 저 방에 엄마가 아닌 저 여자가….
왜 아빠의 옆에 엄마가 아닌 저 여자가….
분노를 이기지 못한 서현은 옥련에게 달려들었다.
“당신 뭐야? 당신이 뭔데 우리 집으로 들어와? 당신 뭐냐고!”
옥련을 밀어붙이는 서현을 장 회장이 밀쳐냈다.
“장서현, 그만.”
“아빠….”
바닥에 쓰러진 서현의 눈에 옥련과 함께 서 있는 장 회장이 들어왔다.
“지금 저 여자가 아니라 날… 날 민 거예요?”
밀려난 서현을 보고 장 회장은 흠칫했지만, 더 크게 호통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버릇없는 짓이야?”
“뭐라고요? 지금 아빠가 버릇 운운할 때라고 생각해요? 이게 말이 돼요? 엄마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어른들 일이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그리고 다시 유학 가서 공부 마치고 돌아와. 이제 아빠 옆에는 새엄마가 있으니….”
“더러워.”
“뭐야, 이 자식이!”
장 회장이 서현에게 손찌검을 하려 하자, 뒤에서 숨어 지켜보던 순애가 달려와 온몸으로 서현을 감쌌다.
“때리지 마세요, 회장님. 서현이에요, 서현이. 회장님 때리면 정말 후회하셔요. 때리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순애가 울자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서현도 울음을 터뜨렸다.
장 회장은 옥련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고, 서현은 그날 순애의 품에서 비참함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이래… 어떻게….”
엄마의 병환을 알고, 그 곁을 지키기 위해 공부를 마치지도 않고 유학 도중 한국으로 돌아온 서현이었다.
이젠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장 회장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서현은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예정했던 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아니, 유학이 아니라 도피였다.
엄마를 버린 아빠와 엄마의 자리를 빼앗은 그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된 이유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였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재단의 도움으로 다시 유학을 갈 수도 있었지만 서현은 가지 않았다.
이대로 정말 엄마의 자리, 제 자리까지 그 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봐, 악착같이 버텼다.
그런데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오늘도 장 회장은 옥련과 골프를 치러 갔다. 엄마의 기일인지도 모르고….
연실의 기일을 챙기는 사람은 서현뿐이었다.
씁쓸함을 애써 감춘 서현은 연실의 사진 앞에서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꽃을 내려놓는데, 누군가 먼저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어? 이 꽃은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서현은 주위를 둘러봤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서현이 잠시 고개를 갸웃한 사이,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어?”
숙영이었다.
* * *
숙영의 미술관.
서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급하게 뛰어 미술관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숙영을 발견했다.
서현은 겨우 숨을 고르고 숙영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숙영은 숨차게 뛰어온 서현을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훑어봤다.
“왜 이렇게 늦었니?”
“조금 멀리 있었어요.”
“옷은 또 왜 이래? 낮에 중요한 약속 있었다면서, 어디 상갓집 다녀왔니?”
“…….”
엄마의 기일까지 기억해 달라는 건 욕심일 텐데,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어 서현은 말을 삼켰다.
그래도 납골당에서 바로 달려왔건만, 보자마자 잔소리를 퍼붓는 숙영이었다.
“하여간 패션 마음에 안 들어… 인사드려라. 아는 분들도 계시지?”
재벌가 사모들이 미술관 커피숍에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 서현아 오랜만이다.”
“네, 잘 지내셨죠?”
“그럼.”
서현의 엄마와도 친분이 있었던 사모님들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결혼 축하해.”
“네, 감사합니다.”
서현이 축하 인사를 받아주고 있는데, 숙영이 그녀를 툭 건드렸다.
“서현아, 작가님께도 인사드려라. 화가 이석구 너 알지?”
“네, 그럼요.”
이 작가를 알아본 서현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서현은 이 작가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숙영을 쳐다봤다.
도무지 자신이 여길 왜 왔는지 이해가 안 갔으니까.
그러자 숙영이 본론을 꺼냈다.
“이 작가가 이번에 우리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를 하게 됐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 작가가 글쎄 피아노에 대해 좀 일가견이 있더라고.”
“네….”
“그래서 피아노 연주 좀 하라고. 라이브로 듣는 게 또 맛 아니겠니?”
“네? 지금요?”
서현이 놀라자 숙영이 미간을 좁혔다.
“왜? 못 하니?”
“아니 그것보다….”
서현의 말을 자르고 숙영이 커피숍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켰다.
“피아노는 저기. 신청곡들이 있는데… 먼저 이 작가, 신청곡이 뭐라고 했지?”
서현이 당황스러움에 주변을 둘러봤다.
이 작가도 재벌가 사모들도 조금 서현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어느 누구 한 명 괜찮다고 숙영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린 됐다고 하는데, 네 예비 시어머니가….”
“뭐 어때? 오랜만에 라이브로 피아노 연주 들으면 좋지.”
잠시 후, 신청곡을 받은 서현이 피아노에 앉았다.
커피숍에는 숙영의 무리 말고도 다른 미술관 관람객들도 함께 있었다.
커피숍 곳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이 서현을 향했고,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숙영을 돌아봤다.
지인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든 숙영과 눈이 마주치자 서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건반으로 눈을 내렸다.
건반에 손을 올린 서현이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서현의 연주가 시작되자, 커피숍에 앉은 사람들은 연주를 감상한다기보다 자기 할 얘기들을 하면서 배경음악 정도로 그녀의 연주를 대했다.
이러려고 피아노를 배운 건 아닌데… 이렇게…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한 건 아닌데….
연주를 거절하는 순간, 시끄러워지는 상황이 더 싫었던 서현은 서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연주를 했다.
숙영의 웃음소리가 서현의 귀에 꽂혔다.
숙영은 처음부터 서현의 연주가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들러리로 삼고 싶었던 거였다.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숙영은 웃음꽃을 피웠고, 서현은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안 그래도 힘든 날이었다.
엄마의 기일에 이런 취급을 당하니 평소보다 더 서러움이 밀려왔다.
드디어 첫 번째 연주가 끝났다.
서현이 숙영을 쳐다보자, 연주가 끝난 지도 몰랐던 그녀는 지인이 툭 치자 그제야 서현을 바라봤다.
“뭐 해? 다음 곡 연주해야지.”
서현은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건반으로 시선을 내렸다.
* * *
외부에서 미팅이 끝나고 태성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던 고 비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부회장님, 저 잠깐만 여기 좀 들렀다 가도 될까요?”
“어디?”
“잠깐, 1분도 안 걸립니다. 맡겨뒀던 물건이 있어서요. 바로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래.”
그러면서 고 비서가 향한 곳은 바로 앞에 있는 쥬얼리샵이었다.
쥬얼리샵으로 들어간 고 비서를 보다가 태성은 쇼윈도에 걸린 목걸이를 보았다.
불현듯 서현이 생각난 태성은 그 목걸이에 이끌린 듯 문을 열고 쥬얼리샵으로 들어갔다.
태성이 들어오자, 맡긴 물건을 찾은 고 비서가 다가갔다.
“다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따로 들릴 시간이 없어서요. 일 끝나면 매장이 문을 닫아서.”
“뭐, 괜찮아.”
“그럼 가실까요?”
“잠깐….”
“네?”
천천히 쥬얼리샵을 둘러보던 태성의 시선이 쇼윈도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향했다.
눈치 빠른 점원이 태성에게 다가왔다.
“선물하시게요?”
“저거 좀 보여주시죠.”
“네.”
점원은 얼른 쇼윈도에 있는 목걸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고 비서는 지금 자신이 뭘 보고 있나 싶어 눈을 비볐다.
잠시 후, 태성의 뒤를 따르던 고 비서는 계속해서 그를 갸웃하며 쳐다봤다.
이태성 부회장이 여자 목걸이를 산다? 만약 사더라도 비서를 시켰지, 자신이 직접 산다?
이건 고 비서가 아는 이태성 부회장이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고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태성을 신기해하고 있는데, 그때였다.
태성은 뒤에 서 있는 고 비서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서현이는 지금 뭐 하지?”
“네?”
“서현이 뭐 하냐고.”
태성은 서현에게 차를 붙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최 기사를 통해 서현의 스케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 기사가 이동시마다 고 비서에게 보고를 하기 때문에 서현이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고 싶을 때 바로바로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차를 붙여주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태성이었다.
고 비서는 최 기사에게 보고 받은 내용을 전달했다.
“납골당에서 큰사모님 미술관으로 이동하셨습니다.”
태성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미술관? 거긴 왜?”
“큰사모님 호출을 받고 이동하셨습니다. 최 기사의 다음 연락이 없는 거로 봐서는 이동 없이 아직도 미술관에 계신 거로 파악됩니다. 최기사에게 연락해 볼까요?”
“아니야.”
최 기사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숙영이 서현을 일찍이 보낼 리가 없다는 걸 태성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었으니까…
고 비서를 먼저 퇴근시키고, 차에 탄 태성은 김 기사에게 대기하라는 신호를 하고는 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만 울릴 뿐 전화를 받지 않는 서현이었다.
태성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김 기사가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회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하….”
태성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미술관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향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오늘 백화점에도 못 데려가게 했는데, 미술관에 가서 또 서현을 데리고 나온다면 이 회장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숙영이 화를 낼 게 분명하니까.
대외적인 이유 때문에 서현과 결혼을 하겠다고 이 회장에게 말해 놓고 이런 감정적인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자들 일에 껴들지 말라고 당부했던 이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이상하게 눈치를 보게 되는 현실이 불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