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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16)화 (16/111)

16화

이게 네 할 일이라며?

“무슨 일이길래 이래?”

서현은 민혁의 시선을 피한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별일 없어요.”

민혁이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자, 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모르는 척 좀 해줄래요?”

서현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자, 민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넌 피아노 소리부터 티 나. 네 피아노 소리만 들어도 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다 알겠는데 모르는 척은… 뭐, 네가 원한다면. 말하기 힘든 일이야?”

“그냥….”

“말하기 힘든 거구나?”

“네….”

민혁이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

“난 언제든 너한테 이렇게 손 내밀고 있다고. 그러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구해주고, 밀어주고, 잡아줄 수 있으니까.”

서현이 민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왜 그렇게 봐?”

“오빠 이거 병이에요.”

“병?”

“이게 오빠가 연애를 못 하는 이유라고요. 난 전에 나랑 스캔들 난 거 때문에 오빠가 연애 못 하는 줄 알고 죄책감 가졌었는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여자들은 이렇게 모든 여자한테 친절한 남자 싫어해요. 나한테만 친절한 남자를 좋아하지.”

“넌 내가 모든 여자한테 다 이런다고 생각해?”

서현을 향한 민혁의 눈빛도 목소리도 너무 진지했다.

“……?”

서현은 조금 당황한 나머지 커피를 살짝 흘렸다.

“아, 뜨거워.”

“괜찮아?”

민혁이 서현의 손에 있는 커피를 뺏어 내려놓고는 자신이 들고 있는 아이스커피를 그녀의 손에 갖다 댔다.

“조심해야지.”

“아, 괜찮아요.”

“잠깐 이러고 있어. 연주회 얼마 안 남았는데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요….”

민혁은 서현의 손을 잡고 아이스커피잔으로 냉찜질을 하면서 동시에 입김을 불었다.

“병원 가자.”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괜찮긴.”

서현이 손을 빼서 보였다.

“이봐요.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정말 살짝 빨개진 것 말고는 괜찮아 보였다.

그제야 민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잠깐 이러고 있어.”

민혁은 다시 서현의 손을 끌고 와 아이스커피 잔으로 냉찜질을 했다.

“괜찮다니까… 그럼 내가 할게요.”

“내가 해준다니까.”

서현이 아이스커피 잔을 뺏어 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언제 왔는지 연습실 문 앞에 서 있는 태성이었다.

서현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혁도 고개를 돌려 태성을 바라봤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연습은 끝난 것 같네. 아니면 연습은 핑계였던 건가?”

비꼬는 듯한 태성의 말투에 서현은 민혁의 눈치가 보였다.

저 폭탄 같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민혁을 바라보는 태성의 눈빛을 보자마자 서현은 덜컥 겁이 났다.

괜히 민혁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민혁의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 저 먼저 가볼게요.”

서현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가방을 챙겨 태성에게 다가갔다.

“가요. 얼른. 오빠, 저 먼저 갈게요.”

태성은 연습실에 남은 민혁에게 끝까지 시선을 둔 채, 서현에게 끌려가듯 자리를 옮겼다.

시끄럽기 싫었던 서현은 빠르게 걸음을 옮긴 뒤, 태성의 차 앞에 섰다.

“문 열어요, 얼른.”

“……?”

“빨리요. 저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요?”

태성이 문을 열자마자 서현은 얼른 그의 차에 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한들 말 들을 그도 아니었고,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태성의 집에 도착했고, 그를 따라 서현은 집으로 들어갔다.

“저 먼저 씻을게요. 그래도 되죠?”

입고 있는 겉옷을 벗은 서현이 태성을 앞질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성은 미간을 좁혔다.

평소와 다른 서현이었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서현은 욕실에서 나왔다.

바에서 술 한잔을 하고 있던 태성은 그런 그녀를 보고 티 안 날 정도로 흠칫 놀랐다.

“……?”

몸에 큰 수건 한 장만 걸치고 나온 그녀였다.

서현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태성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할 거예요?”

“……?”

“여기서 할 건가요? 아니면 침실?”

“지금 뭐 하는 거지?”

“당신이 하려는 거, 그거 하려는 거잖아요.”

아무 감정 없이 말하는 서현을 보고 태성은 불쾌함을 느꼈다.

“마치….”

태성은 입에서 심한 말이 나올 것 같아 뒷말을 삼켰다.

제 입이 더러워지는 게 싫었다.

화를 애써 삼킨 채 헛웃음을 지은 태성은 술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서현의 시선도 저절로 느릿하게 술잔을 돌리는 그의 손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 잔만 돌리던 그의 손이 멈추고, 태성이 고개를 들자, 서현의 눈이 그와 마주쳤다.

태성이 서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술잔을 천천히 비웠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자, 서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탁-

술을 다 비운 그가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였다.

순간 마주한 그의 눈빛이 온몸을 얼려버릴 듯 싸늘했다.

“지금 이게….”

화를 삼키는 그가 보였다.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장서현?”

“내가 화낼 타이밍은 아니라는 건가요? 난 오늘 싫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근데 이렇게 찾아온 건, 난 거절할 주제도 안 된다는 건가요?”

괜한 자격지심이 발동하고 말았다.

서현의 머릿속에 숙영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주제 파악이 빨라서 좋다고?

그 말이 왜 맴도는지 모르겠는데, 기분 나빠할 일이 맞는지도 헷갈리는데 화가 났다.

그저 서로 필요에 의한 관계끼리.

감정이 담겨서는 안 되는 관계끼리.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서운함이 불러온 자격지심은 서현을 자꾸 비딱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생채기를 내고 싶어졌다. 

짧게 숨을 내쉰 서현이 입을 열었다.

“제가 주제 파악이 빠른 편이거든요. 그리고 당신과 내가 해야 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나랑 자고 싶어서 연습실까지 온 거 아니에요? 빨리해요. 당신 좋아하는 거. 제가 해야 할 게… 이거 아니에요?”

“아… 이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네….”

제 얼굴에 침 뱉은 격이었지만, 정말 최악이었지만, 말을 하고 나니 분명해졌다.

내 주제는 이게 맞았다.

서현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태성은 비웃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서현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기울여 서현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오랜만이야.”

“……?”

“너무 오랜만에 봤나? 적응이 좀 안 되네? 뭐가 꼬인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지금 나한테 이럴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태성이 조소 띤 얼굴로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자 서현은 수치심이 밀려왔다.

“오늘은 당신도 나도 아닌 것 같네요. 저 갈게요.”

서현이 뒤로 도는 순간이었다.

서현을 쉽게 제자리로 돌려세운 태성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순식간에 벗겨냈다.

“헉!”

“왜 놀라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이잖아.”

서현이 수건을 뺏으려고 하자, 태성이 수건을 던져 버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어차피 벗을 거였잖아. 당신 할 일이었으니까.”

“그건….”

의자에서 일어난 태성이 서현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왜?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아니야? 이게 네 할 일이라며?”

“…….”

‘그래, 그게 내 주제니까?’ 

자신을 노려보는 서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자, 태성이 거칠게 그녀의 턱을 놓았다.

“가.”

“……?”

“흥미 없어졌어.”

바에 다시 앉아 술잔을 채운 태성은 빠르게 술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다시 술잔을 채웠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술잔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서현은 태성이 던진 수건을 주워 얼른 몸을 가렸다. 

그러고는 제 옷을 하나씩 챙기는데 참으려 해도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네가 뭔데. 네가 얼마나 잘났길래.

넌 왜 아쉬운 게 없는 건데….

서현은 자꾸만 화가 올라왔다.

근데 자신이 왜 화를 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감정 담지 않기로 해놓고, 또 담고 말았다.

쾅-

서현이 밖으로 나가고, 태성은 잔을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 유리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변명도 하지 않는 서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캔들 상대였던 정민혁을 만나러 가?

서현이 연습실에서 민혁과 다정하게 있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자 태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좀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랑 자고 싶어서 연습실까지 온 거 아니에요? 빨리해요. 당신 좋아하는 거. 제가 해야 할 게 이거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닌데, 맞는 말인데….

분명 원했던 관계가 맞는데… 그런데 왜 화가 나는 거지?

태성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 * *

높은 담벼락들이 세워진 저택이 즐비한 골목의 끝, 태성의 차가 멈추자 커다란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대문이 열리고 태성의 차가 진입하자, 문은 저절로 닫혔다.

가는 길 곳곳에는 입구부터 CCTV가 설치돼 있고, 양옆으로는 조경이 잘 꾸며진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에는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석조상들과 석조 분수, 고풍스러운 정자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비추고 있는 조명들까지.

그 자체가 작품으로 보일 정도로 잘 꾸며진 정원이었다.

정원을 지나 정돈된 길을 따라 더 올라가니 차고의 문이 열렸고, 태성의 차가 차고로 들어갔다.

* * *

“적당히 해. 적당히.”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이 회장이 앞에 앉아 있는 숙영을 향해 핀잔을 줬다.

“적당히가 어디 있어요?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고요.”

숙영은 조용히 속삭이고는 말이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가서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주방에서는 서현과 도우미 두 명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숙영은 서현을 한번 슥 보더니 도우미를 향해 말했다.

“얘가 방해만 되는 거 아닌가?”

“아니요. 작은 사모님께서 손끝이 너무 야무지세요.”

“그래?”

숙영은 서현이 일하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살림은 좀 배웠니?”

“네, 엄마 계실 때는 주방에 자주 들어갔었어요.”

“아, 맞다. 너희 어머니가 요리는 참 잘하셨지. 예전에 김치며 간장게장이며 다 맛있었는데 너도 요리 좀 하니?”

“조금요.”

“그래, 그건 좋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새침하게 말한 숙영은 식탁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근데 가짓수가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사모님, 식탁 자리가 부족할 정도인걸요.”

도우미의 말에 조금 머쓱해지자 숙영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가? 아니야… 샐러드 하나만 더 해요. 반찬도 더 꺼내놓고.”

“네, 알겠습니다.”

“식기는 이걸로.”

숙영은 최고급 식기를 가리켰다. 평소에는 꺼내지도 않는 식기였다.

숙영의 눈짓에 도우미들은 그녀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식기를 꺼냈다.

그때였다.

“아드님 오셨어요.”

태성이 왔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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