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오늘만이야
태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도 늘 당당한 이 회장이었다.
화명 그룹 후계자로서의 삶… 태성은 또 숨 막힘을 느꼈다.
“같이 있었던 건 맞지만… 생각하시는 그 이유 때문에 결혼을 추진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래, 사내대장부가 여자한테 홀려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되지.”
“…물론입니다.”
“네가 보는 서현이는 어떠냐?”
“솔직한 사람입니다. 누구와 달리요.”
“그래… 솔직한 거 중요하지. 그리고 또?”
“현명한 여자입니다.”
“제 주제를 잘 아는 게 현명한 거다. 주제 파악 못 하고 설치는 것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주제 파악은 빠른가 보군. 근데 요즘 서현이 걔가 여기저기 피아노로 푼돈을 벌러 다닌다던데… 알고 있냐?”
태성이 대답을 못 하자, 이 회장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결혼할 생각이라면 그 품위 떨어지는 행동부터 조심시켜.”
“네, 알겠습니다.”
“장은그룹과 혼사라….”
한 번 더 빤히 쳐다보는 이 회장의 눈빛을 태성은 피하지 않고 버텼다.
* * *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간 서현은 거울 앞에 서서 목에 붙였던 반창고를 떼어냈다.
붉게 물든 태성의 흔적이었다.
처음보다는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자국은 남아 있었다.
그 밤, 한시도 놔주질 않던 그가 떠올랐다.
이미 체력의 한계를 느낀 자신에 반해 그의 체력은 한계를 모르고 있었다.
하룻밤에 여러 번 욕정에 휩싸인 그에게 안기고 또 안기고, 아침이 되어서야 그의 품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했다.
온 힘을 다해 그의 욕정을 받아주고 나니 체력의 한계를 느껴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었다.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벗으니 그 밤이 선명해졌다.
그가 밤새 새겨놓았던 흔적이 붉은 꽃물이 든 것처럼 온몸에 가득했다.
서현은 손을 가져가 그 흔적 위에 올렸다.
그 밤,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장서현?”
“하… 아아….”
“그런 표정을 지으면 읏… 장서현, 내가 미치잖아. 좋아서.”
밤새 야한 말을 속삭이던 그였다.
평소의 그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그였다.
그때를 떠올리니 아랫배가 조여오는 게 느껴졌다.
“하….”
서현은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샤워를 시작했다.
잠시 후, 외출 준비를 마친 서현이 1층으로 내려가자 기다렸다는 듯 장 회장과 새엄마인 옥련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여기 좀 와 봐라.”
서현이 본 척도 하지 않자, 옥련이 입을 열었다.
“서현아, 회장님이 부르시잖아.”
옥련의 말도 가볍게 넘긴 서현은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아니 저게….”
“회장님, 진정하세요.”
옥련이 장 회장에게 차를 건넸다.
서현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가사도우미인 순애가 얼른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어디 가? 저녁 다 차려놨는데?”
“약속 있어요.”
“아이고, 요새 도통 먹질 못하길래 좋아하는 잡채 만들어 놨는데 조금만 먹고 가지.”
“다녀와서 먹을게요. 그리고 저 오늘 늦으니까 먼저 주무세요.”
“많이 늦어?”
“걱정 말고 먼저 주무세요.”
순애는 가사도우미이긴 했지만 할머니가 없는 서현에게는 친할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서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순애의 밥을 먹었고, 그녀의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서현에게 순애는 특별한 존재였고,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존재였다.
순애에게도 서현은 친손녀나 다름없었다.
순애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고 주방에서 나온 서현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옥련과 함께 있는 아빠를 보기 싫은 서현은 늘 집에만 있으면 삐딱했다.
“이리 와서 앉아라.”
장 회장이 불렀지만, 서현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장 회장의 호통이 이어졌다.
“장서현! 너, 이리와 앉으라는 말 안 들려?”
장 회장이 호통을 치자, 순애가 주방에서 달려 나와 서현을 붙잡았다.
“서현아.”
불같은 성격의 장 회장이었다.
또 싸움이 일어날까 봐, 순애는 서현에게 장 회장 말을 들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서현은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왜요? 저 시간 없어요.”
“날 어두워졌는데 어딜 가?”
“누구 좀 만나려고요.”
“누구? 늦었는데, 못 나간다고 해라.”
“이태성이에요.”
태성이라는 말에 장 회장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뭐? 이태성?”
서현은 옥련도 있는 자리에서 굳이 대꾸하기 싫어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흥분한 장 회장이었다.
“그래, 투자금 돌아온 거 태성이가 한 거지? 맞지? 왜 그동안 물어도 말을 안 했어? 네가 병든 닭처럼 누워만 있길래 뭔 일 난 줄 알았는데, 얘기가 잘된 거야?”
숨도 안 쉬고 질문을 쏟아내는 장 회장을 서현은 외면했다.
“저 나가봐야 돼요.”
“결혼은? 결혼 얘기는?”
서현이 일어나려 하자, 장 회장이 다급히 물었다.
서현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오늘 만나면 얘기해 볼게요.”
“아니, 그걸 물어봤어야지….”
“회장님, 거래 유지되고 투자금 돌아온 거 보면 모르시겠어요? 서현이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서현아, 고생 많았어.”
옥련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지만, 서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뭘 고생했다는 건지… 그 말이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옥련은 서현에게 미소를 보이고는, 장 회장을 향해 눈웃음을 보였다.
“회장님, 이제 좀 편히 주무세요. 요 며칠 서현이 걱정 때문에 잠도 편히 못 주무셨잖아요. 또 쓰러지실까 봐,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몰라요.”
“알았어. 그나저나 이거 결혼 준비하려면 서둘러야겠는데?”
“회장님, 걱정 마세요. 딸 결혼하는데 당연히 엄마가 챙겨야죠. 제가 신경 쓸게요.”
딸이라는 말에 서현이 옥련을 죽일 듯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약속 시간이 돼서.”
“저, 서현아….”
장 회장이 서현의 눈치를 보자, 옥련이 미소를 지었다.
“다녀와, 서현아.”
서현이 나가자, 장 회장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 장 회장을 보며, 옥련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서현이 앞에서 엄마 얘기는 하지 마. 애가 아직 힘들어하니까….”
“네, 저는 그저 서현이가 정말 제 딸 같아서….”
“그래, 자네 마음 알지. 당신이 있어서 그래도 내가 많이 의지가 되네.”
“아니에요, 제가 뭘 했다고요.”
“아, 나 혈압약 좀 줘. 신경을 썼더니 혈압이 오르네.”
“약이요? 아까 드셨잖아요.”
“뭐? 내가?”
“그럼요, 아까 제가 챙겨드렸잖아요.”
“그랬나? 내가 또….”
“너무 자책 마세요. 제가 옆에서 챙겨 드리면 되죠.”
“그래… 고마워.”
장 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옥련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대문을 나선 서현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더는 집에 있고 싶지 않아서 나오긴 나왔는데… 약속 시간은 아직 좀 남은 상황이었다.
집 앞에 선 서현은 이어폰을 꽂고 휴대전화로 음악을 재생시켰다.
흔한 사랑 노래였지만 마음 편해지는 음색이 지금의 공기와 어울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지옥이었는데, 순간적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이 평화도 그가 나타나면 곧 깨지겠지?
잠깐이라도 이 기분을 느끼고자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불빛이 스몄다.
살며시 눈을 뜨니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약속한 7시가 되려면 10분이나 남았는데….
차는 서현의 집 앞에서 멈춰 섰고, 운전석에서 태성의 운전기사가 내렸다.
서현이 이어폰 한쪽을 빼고 인사를 건네려는데, 태성의 운전기사가 서둘러 차 문을 열었다.
“타시죠.”
문이 열리자 태성이 보였다.
그 순간, 귓가를 울리던 사랑 노래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그 때문이었을까?
심장이 간질거렸다.
떨려오는 감정에 얼굴은 순간적으로 열이 올랐다.
얼마 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을까?
“타시죠.”
운전기사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든 서현이 얼른 시선을 거두고 차에 올라탔다.
그의 옆에 앉았지만, 대화는 없었다.
며칠 만에 만나는 건데도, 서현과 태성은 형식적인 인사도 생략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전에 한참 동안 눈을 마주칠 때는 언제고, 태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태블릿에 시선을 뒀다.
장소가 이미 정해진 듯 차는 움직였고, 10분쯤 지났을까?
결국 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삼키기로 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저녁 먹었나?”
“아뇨, 아직.”
그다음 말은 없었다.
태성은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며칠 전, 침대에서 서현을 놓아주기 싫어 안고 또 안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니 조금 전 눈을 맞추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태성은 차가워 보였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남자… 침대에서와 밖에서 많이 다른 남자… 도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인 거야?
서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 왜 전화 안 받았지?”
태성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서현은 잠시 멈칫했다.
서현이 질문에 답을 않자, 태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전화 안 받았냐고 물었어.”
“연습하느라 못 받았어요.”
일부러 안 받았다고 솔직히 말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서현은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태성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오늘만이야.”
“네?”
태성은 다시 태블릿에 시선을 둔 채 대꾸했다.
“전화 안 받는 거 봐주는 건 오늘뿐이라고.”
봐준다고? 봐준다는 말이 거슬려 서현은 조금 삐딱하게 대꾸했다.
“또 안 받으면요?”
태성이 태블릿을 움직이던 손을 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