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끌림 (10)화 (10/111)

10화 

나도 모르게…

민혁은 잠시 머뭇대다가 얘기를 꺼냈다.

“아 그게… 어제 장 회장님 만났어.”

“아빠요? 아빠가 오빠를 왜?”

금방 흥분을 한 서현이었다.

그런 서현을 진정시키듯 민혁은 타이르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별일은 아니고, 네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

“그러니까 아빠가 왜 오빠를 만나서 내 걱정을 하냐고요.”

“화내지 말고 들어. 별말 안 했어. 그냥 네 공부 문제랑 뭐 이것저것.”

“하… 쓸데없는 얘기를 또 하셨네요. 미안해요.”

“아니야, 그럴 건 없고. 그래서 말인데, 네 공부 말이야. 공부 다 못 마치고 한국 들어온 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쓰이시는 모양이더라고.”

태성과 결혼 못 할 것을 대비해 장 회장은 차선책으로 서현이 피아노 유학이라도 지원받을 수 있도록 손을 쓴 거였다.

부쩍 안 좋아진 건강 때문에 더욱 조급해하는 아빠의 그 마음이야 이해는 가지만, 서현은 민혁에게 미안해졌다.

“오빠, 신경 쓰지 말아요. 그리고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재단에서 많이 지원해주는 거 아는데 저….”

“잠깐, 서현아.”

민혁이 덥석 서현의 손을 잡았다.

민혁이 손을 너무 꼭 잡자, 서현은 어색해서 슬쩍 잡힌 손을 뺐다.

그러자 민혁도 그제야 자신이 너무 힘을 준 걸 깨닫고 서현의 손을 놔줬다.

“미안.”

“아니에요.”

“근데 서현아. 너무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집안 사정이고 뭐고, 재단한테 미안한 거고 뭐고, 다 제쳐두고 너만 생각하라고.”

“오빠….”

“너 피아노 좋아하잖아. 네가 독일에서 피아노 공부할 때… 너 그때 정말 행복해 보였어. 아니야?”

서현은 잠시 독일에서 있었던 때가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솔직히 저… 피아노 좋아서 배운 거 아니에요. 하다 보니까 피아노가 유일한 제 돌파구가 된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이름 떨치라고 부모님이 배우라고 한 건 아니었어요. 화명그룹에 어울리는 며느리가 되기 위한 구색 맞추기였던 거죠.”

말하고 나니 더 참 별 볼 일 없는 인생에 서현이 한숨을 작게 내쉬자, 민혁도 따라 한숨이 나왔다.

“아니, 내가 보는 넌 피아노 좋아해.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네 인생이잖아. 어느 누구도 너보다 먼저일 수는 없어. 난 네가 공부 마쳤으면 좋겠다. 이건 재단 이사장으로서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널 잘 알고, 널 많이 아끼는 네 팬으로서의 바람이기도 해.”

“오빠도 참… 당사자 앞에 두고 이런 말 진짜 아무렇지 않게 한다니까….”

“진심이니까.”

“알았어요, 고마워요.”

“너 실력 있어. 그러니까 언제든 말해. 실력 있는 아티스트한테는 지원 아끼지 않으니까.”

민혁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살짝 머쓱해지자 서현은 화제를 바꿨다.

“아, 맞다… 지난번에 오빠한테 빌린 돈… 호텔비요. 왜 계좌번호 안 보내요?”

“됐어.”

“왜요? 받아요.”

“됐어. 내가 너한테 그런 것쯤 해줄 수도 있지.”

“오빠….”

“돈은 됐으니까 지금 한 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 알았지?”

바로 그 순간, 서현의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태성이었다.

“헉….”

서현이 놀라자, 민혁이 갸웃했다.

“누구 전화길래 놀라?”

“아 그게….”

서현은 당황해서 전화를 받지 않고 액정이 보이지 않게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중요한 전화 아니에요.”

“전화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진동 계속 울리는데?”

“괜찮아요.”

막상 전화가 오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왜 하필 이 상황에 전화를 했나 싶어 서현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기다렸던 전화였건만 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휴대전화를 노려보고 있는데,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요즘 진짜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아!”

진동이 멈췄다. 전화가 끊긴 거였다. 

순간 아쉬움이 몰려왔다.

받을 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오려고 할 찰나에 또 전화가 걸려왔다.

얼른 액정을 확인하니, 태성이었다.

받을까? 말까? 

계속 전화 한 통 없다가 갑자기 왜 이럴 때 전화를 하는지…. 

서현이 불편해하는 게 보이자, 민혁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나 먼저 일어날게, 통화해. 내가 얘기한 거 잘 생각해 보고.”

“아, 네. 고마워요, 오빠.”

“그래….”

민혁은 서현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으려는데 전화가 끊겼다.

“아?”

아쉬움에 서현이 고개를 떨군 순간이었다.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 서현은 숨도 안 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나야.

그의 목소리였다. 

이태성.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서현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 나야.

“…….”

- ……

“…….”

- 장서현?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현은 갑자기 가빠지는 숨을 겨우 진정시키고 입을 뗐다.

“여보세요.”

- 왜 전화를 안 받지?

역시나 안부를 묻지 않는 그였다. 

며칠 만에 연락한 거면서 차가운 그의 말투에 서현은 화가 울컥 올라왔다.

“…….”

- 여보세…

“지금 받았잖아요, 왜요?”

그의 말을 끊고 서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물론 그는 이번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어디야?

“연습실요.”

- 저녁까지 있을 건가?

“왜요?”

- 묻는 말에 좀 대답을 하지?

그동안 기다렸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이 갈리게 하는 그였다.

“아니요, 지금 집에 가려고요. 왜요?”

- 그럼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7시.

“네? 저기….”

서현의 말은 다 듣지도 않고, 태성은 통보를 한 채 전화를 끊었다.

“참나… 어이없어. 자기도 내가 묻는 거 대답 하나 안 하면서….”

서현은 다시 전화해서 거절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말 들을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좀 전까지만 해도 기운이 없었는데, 갑자기 화가 나서 그런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서현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7시… 또 7시… 두근.

7시를 떠올리자,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 * *

태성은 아버지인 화명그룹 이승경 회장의 집무실에서 업무 보고를 마치고 일어났다.

“그럼 출장 다녀와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출장 언제 떠난다고 했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입니다.”

“잘됐구나. 그럼 오늘 저녁 시간 비워 놔.”

이 회장의 갑작스러운 말에 태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녁엔 약속이 있습니다.”

“캔슬해.”

“급한 일입니까?”

“선정그룹 백 회장이 딸내미 데리고 나온단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

“네?”

태성의 한쪽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백 회장 막내 딸 하은이… 너도 여러 번 봤으니까 기억할 게다. 오늘 하은….”

“회사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가정이 자리를 잡고 안정을 찾아야 바깥일도 잘되는 법이다. 슬슬 네 약혼 없던 일로 하고 다른 데로 고개 돌려야지.”

“선정그룹으로 결정하신 건가요?”

“아직이야. 두고 봐야지.” 

“아직 결정하신 게 아니라면, 선정그룹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냐?”

“선정그룹한테서는 그리 탐나는 게 없어서요.”

“그럼 네가 생각하고 있는 자리는 따로 있고?”

“장은그룹과 예정대로 결혼하겠습니다.”

“장은? 장은과는 더는 엮이지 마라. 선정에서 널 좋게 보고 있더구나. 다 망해가는 회사인 장은보다야 선정이….”

“그래서 전 장은이 낫다고 보는데요.”

“뭐야? 망해가는 게 낫다. 왜지?”

이 회장은 자세를 고쳐 잡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어디 한번 그 이유나 들어보잔 식으로 태성을 향해 손짓했다.

“얘기나 들어보자. 왜 장은이 나은지.”

“화명과 장은은 오랜 시간 약혼 관계를 유지해 온 사실상 혼인을 한 거나 다름없는 관계를 5년 동안이나 이어왔습니다.”

“그랬지.”

“그런데 지금 장은이 5년 전과 달리 힘이 많이 약해지고, 기술력이 필요 없어졌다고 해서 장은을 내친다는 것은 기업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겁니다.”

“그렇다고 쓸모없는 장은을….”

이 회장이 생각에 잠기자, 태성은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였다.

“쓸모없는 게 낫습니다. 망하면 허튼짓은 못 할 테니까요.”

“허튼짓을 못 한다?”

“선정은 나름 잘나가는 재벌이라고 같잖은 자존심은 있어서 결혼생활 내내 사사건건 잡음을 만들 겁니다. 화명을 이용해 사업을 불리려고 끊임없이 요구할 테고요. 냉정하게 말해, 결혼 후 선정은 우리 화명을 통해 얻을 게 많지만, 우리는 선정그룹에게 얻을 게 없습니다. 그건 앞으로도 물론입니다. 그런데도 선정과의 결혼을 추진하시려는 건… 제 능력을 못 믿으시는 거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하하! 배짱이 많이 두둑해졌구나.”

이 회장이 크게 웃자, 태성은 말을 덧붙였다.

“둘 다 얻을 거 없는 결혼이라면 잃을 것도 없는 장은 장서현과 원래대로 결혼하겠습니다. 괜한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선정하고 혼인을 맺는 순간 귀찮아질 거다, 이거 아니냐?”

“네, 남의 얘기 떠드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도 않고요.”

“음… 하긴 이래저래 떠들겠지. 그리고 서현이 정도면 어디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거슬리지 않는 수준이긴 하지. 오랫동안 화명에 길들여져 있기도 하고….”

이 회장은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은 좀 미루는 게 좋겠구만.”

“캔슬하십시오. 장은그룹 장서현과 예정대로 결혼하겠습니다.”

“…….”

꿰뚫어 보듯 쳐다보는 이 회장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태성은 애써 여유로움을 유지했다.

“제 판단… 믿어주십시오. 실망시켜 드린 적 없지 않습니까?”

“단지 그 이유 때문이냐?”

“……?”

“혹시 여자에 미쳐서 그런 건 아니겠지? 며칠 전 서현이를 집에 불렀더구나.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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