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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7)화 (7/111)

7화 

7시, 집, 그리고 밤새…

정말 나랑 그걸 하겠다는 거야? 왜? 내가 싫은 거 아니었어? 날 원한다고? 왜?

여전히 혼란스러운 머리를 붙들고 서현은 고개를 저었다.

5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더니, 갑자기 나타나서는 뭐? 

서현은 팔로 몸을 감쌌다.

내 몸을 원해서 결혼을 한다고?

이태성이라면 얼마든지 자신보다 더 예쁜 여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정말 날 원한다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서현은 미간을 좁혔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서현은 바람을 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문 앞에 민혁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좀 전에… 너무 심각해 보여서 말을 걸 수가 있어야지.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아니에요.”

“커피 한잔할까?”

잠시 후, 커피를 마시면서도 혼자 멍때리는 순간이 많은 서현을 보며 민혁은 그녀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거 몇 개?”

“……?”

“이거 몇 개냐고.”

서현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민혁의 손을 쳐냈다.

“에이, 장난치지 마요.”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거야?”

“뭐 그냥….”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 좋아하는 커피를 앞에 두고… 너 원래 기분 별로더라도 휘핑크림 올라간 커피 마시면 바로 기분 좋아지잖아… 근데 오늘은 왜 이렇게 반응이 없을까?”

서현의 손에 들려 있는 아이스커피에 높이 올라가 있던 휘핑크림이 얼음이 녹으면서 함께 숨이 푹 죽어 있었다.

“아… 그냥….”

“왜? 오늘 맥주라도 한잔 사줄까?”

“오빠.”

“응?”

“오빠는 저랑 잘 수 있어요?”

“크읍!”

서현의 말을 듣자마자 민혁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당황한 민혁은 넋이 나간 채로 서현을 바라봤다.

“장서현?”

“나랑 잘 수 있냐고요, 네?”

“그거야….”

민혁이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서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봐. 안 되겠죠?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자?”

민혁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서현은 혼잣말로 푸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또 놀리는 건가? 아님… 날 좋아해? 좋아하면 그동안은 뭐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들릴 듯 말 듯 혼자서만 중얼거리던 서현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오빠?”

“왜?”

“정말 관심도 없고, 아니다 싶은 여자인데도… 그저 성욕 때문에 자는 남자… 오빠 주변에 있어요?”

“뭐?”

“아니다… 오빠도 그런 적 있어요?”

“야, 좀 알아듣게 말해. 자꾸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남자들은 마음이 진짜 이만큼도 없어도 할 수 있는 거냐고요. 할 수 있어요?”

“왜 해야 하지?”

“안 해요?”

“왜 해야 하냐고. 굳이.”

“안 하는구나.”

민혁이 수상한 눈빛을 보내자, 서현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니, 제 친구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제 친구가 궁금하다고 해서요. 이거 말해 주면 되겠네….”

서현이 어설프게 얼버무리자, 민혁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넌?”

“네?”

“그러는 넌,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할 수 있어?”

“…아니요!”

“그래, 그 당연한 걸 왜 물어?”

“아니, 남자들은 다른가 해서….”

“남자도 인간이야. 근데 갑자기 이게 왜 궁금해?” 

“제가 궁금한 게 아니라, 제 친구가 궁금해해서 물어본 거라니까요.”

조금 민망해진 서현이 고개를 돌리는데, 연습실로 바이올린 연주자가 들어가는 게 보였다.

서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 아니 이사장님! 저 연습하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커피 잘 마실게요.”

“야….”

주위 시선이 신경 쓰인 민혁이 더 크게 부르지는 못하고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요즘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연습실로 들어가는 서현의 뒷모습을 민혁은 한참 동안 바라봤다.

* * *

퇴근길 차 안, 뒷좌석에 앉은 태성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 순간, 왜 화가 그 정도로 치밀었는지….

서현에게 저녁 7시까지 집으로 오라는 말을 하고 나서부터 머릿속에서 그녀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더 짜증 나는 것은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오지 않는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하….”

제 덫에 걸린 기분이 이런 걸까?

왜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한 건지.

왜 그녀에게 선택권을 준 건지.

지금 그녀의 상황으로서는, 그냥 그녀의 의견 따위 무시하고 안을 수도 있었다. 근데 왜 의견을 물었던 건지… 저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투성이었다.

서현은 5년 전,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하게 시선을 끌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로.

보고 있으면, 너무 다양한 표정을 지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그게 또 웃기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는 그녀였다.

흥미로웠다.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눈에 보이게 튕기는 것도.

사소한 것에도 해맑은 눈웃음을 보이고, 어느새 박수 치며 좋아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것도.

그렇게 어느새 마음속에 들어온 그녀였다.

그래서 약혼식 날, 도장 찍듯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건넨 키스였는데, 그녀의 입술 맛을 보는 순간 더욱더 그녀에게 빨려들었다.

너무 좋아서….

유학을 다녀오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겠다… 정략결혼이었지만 한때 그녀와 함께하는 행복한 꿈을 꿨었다.

염치없게도… 한때는… 한때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건 달라졌고, 그녀를 잊었다 생각했다.

근데… 5년 만에 마주한 그녀는 강한 욕망을 불러왔고, 그 욕망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5년 전과는 다른 의미로 넋을 잃게 만드는 그녀였다.

굵은 웨이브가 가슴까지 내려온 헤어스타일에 몸매가 드러나는 블랙 드레스.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녀의 머리카락, 눈, 코, 입술을 거쳐 쇄골, 그리고 그녀의 가슴 순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를 보는데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고개를 돌려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살피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어느덧 자라 다른 남자들이 탐을 낼 정도로 성숙한 여인의 향을 풍기는 그녀였다.

집안 어른들이 계신 가족 모임에서 서현과 자주 만났기에 늘 단정한 모습의 그녀만 봐왔던 태성으로서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감추고 있던 육감적인 몸매를 확연히 드러내고 나타난 서현에게 한참 동안 시선이 빼앗겼었다.

순간적으로 나쁜 욕심이 들 정도로. 

그러다 눈이 마주친 서현은 시선을 피했다. 어색해서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눈이 마주쳤으니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다가오기는커녕 다른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녀였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른 남자들 틈에서 그 시선을 즐기며 웃고 있는 장서현.

태성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5년 만에 만난 약혼자를 소, 닭 보듯 하는 여자.

게다가 약혼자를 두고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는 여자.

결혼해 달라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럼 재미없지. 장서현인데….

그래도 자꾸만 신경을 긁은 대가는 치러야지? 

내가 누군지 잊은 건가?

비틀린 심사를 티 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의 곁으로 간 다음 모르는 척하고 파티장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 안 가는 유치함이었지만, 오늘은 더 유치한 짓을 하고 말았다. 

돈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고 서현이 말했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 분노는 억눌렀던 욕망을 드러내고 말았다.

돈 때문에 하는 결혼, 이 결혼에 사랑 따위 기대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진심 갖지 않겠다는 뜻인데, 원하던 바였는데…. 

사랑 따위 원한다면 이 결혼, 못하겠다고 먼저 파혼을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녀의 입으로 듣고 나니… 하….

“젠장.”

자꾸 옹졸하게 만드는 그녀에게 화가 치밀어 애먼 창문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사랑 따위 원하지 않는다는 그 말을 왜 당신이 하는 거지? 내가 아니고?

난 왜 이게 화가 나고?

그녀가 매달리는 꼴을 보고 싶었다.

이 결혼을 얼마나 하고 싶은지… 나를 얼마나 원하는지… 

제 밑에서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오늘 저녁, 그녀가 제 발로 찾아온다면 더는 욕망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고, 나도 내가 원하는 걸 얻으면 되는 것, 그뿐이다.

서로 진심 따위 없이 원하는 것만 탐하면 되는 사이다.

그녀가 원하는 걸 분명히 밝힌 이상, 이제 욕망을 억누를 이유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 * *

연습을 마친 지는 한참이 지났지만, 서현은 연습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갈까? 말까?

결혼을 하자고 한 건 나잖아.

다 깨진 결혼을 붙잡으며 원하는 걸 먼저 요구한 것도 나고.

그래서 그도 원하는 걸 말했고.

그리고 결혼을 한다면 그가 원하는 걸….

생각이 발전하는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을 떨쳐내려 해도 이미 불순해진 머릿속은 이내 약혼식 날, 그와의 키스를 떠올렸다.

능숙하게 밀고 들어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던 그의 키스… 참 잘하던 키스….

키스가 끝나고 그가 유학 다녀와서 보자고 했던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그의 말투, 표정, 분위기까지 떠오르자, 그때의 그와 오늘 마주한 그가 조금… 아니 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변할 수 있다지만, 어쩐지… 마음 한편이 씁쓸해지는 그의 변화였다.

뭐가 변했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분명 그는 변했다.

그리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원래도 예쁘게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마치 일부러 상처를 주려는 것처럼 말하는 그가 보였다. 

그의 입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야한 말이 쏟아져 나올 때는 정말이지 경악했다.

아직도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 저녁 7시. 당신은 오늘 나랑 밤새…”

또 야한 상상을 하고 말자 서현은 세게 머리를 저었다.

그때,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태성이 말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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