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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6)화 (6/111)

6화

내 결혼의 조건

“그래, 진행시켜 봐. 확실히 네가 오니까 일의 진행 속도가 빠르구나.”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래도 아직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라.”

“네, 알겠습니다.”

업무 보고를 마친 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장은그룹과 진행하고 있는 거래랑 투자금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이 회장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회장님.”

“너도 왔는데, 슬슬 장은그룹은 정리해야지. 서현이 말고 다른 혼처 자리 알아보마.”

“아뇨, 지금은 그런 거로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그냥 두시죠.”

“그래도 더 시간 끌 거 없이….”

“급할 거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회사 일이 우선입니다.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알았다.”

이 회장의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태성은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했다.

“이거 때문에 온 건가?”

태성은 뒤따라오는 고 비서에게 살짝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이 지시하셨던 장은그룹 거래 건과 투자 건 다시 검토해서 예전처럼 진행하는 쪽으로 결재 올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장서현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나?”

“네.”

“얼마나 기다렸지?”

“두 시간 좀 넘었습니다.”

태성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 * *

무슨 말부터 꺼내지?

그의 집무실에서 두 시간 동안 그를 기다렸는데도, 서현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정하지를 못했다.

“미안하다고 먼저 해야 하나? 아니지… 내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미안한 쪽은 내가 아니지. 그럼 뭐라고 하지? 음… 회사 얘기? 회사 얘기부터 꺼내면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이건 나중에… 그럼… 잘 지냈어요? 아, 이건 또 뭐야… 바보 같잖아.”

혼자서 이 말 해봤다가 저 말 해봤다가 서현이 할 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집무실 문이 열렸다.

또 비서인가 싶어 별 기대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태성이었다.

드디어 태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한참을 기다리게 해놓고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책상으로 가서 앉는 태성을 보며, 서현은 할 말을 잃었다.

두 시간 동안 고민했던 말들이 뒤죽박죽 머릿속에서 엉키자 입이 딱 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현이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다신 보지 말자고 했던 거 같은데?”

“……?”

분명 기대에 부응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시 보지 말자고 큰소리를 친 건 서현이었다.

그래놓고 이렇게 찾아오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화명에서 거래와 투자를 끊는다고 하는 순간, 장 회장은 쓰러졌다.

과거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적이 있는 장 회장이었기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현은 아찔했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은 망하게 생겼고, 하나뿐인 가족인 아빠는 살려야 했다.

어차피 할 결혼이었고, 안 하겠다 고집부릴 이유도 없었다.

화명에서 자꾸 결혼을 미루고 파혼 얘기를 흘리는 게 자존심 상하긴 했지만… 이 모든 건 결혼을 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심지어 이대로 결혼을 안 했다가는 그동안 돌았던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격이었다.

이 남자와의 결혼, 하는 게 여러모로 맞는 거였다.

서현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걸어가 섰다.

“결혼해요, 우리.”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성이었지만, 서류를 살피던 그가 조금 흠칫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피식 웃음을 지은 그가 턱을 괸 채 서현을 바라봤다.

밝고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서현에게서는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몸매를 한껏 드러낸 블랙 드레스로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풍길 땐 언제고, 오늘은 이게 또 무슨 콘셉트이지?

이게 평소 모습인가?

그러고 보니 꽤 신경을 쓰고 온 모습이었다. 언제 봐도 예뻤지만, 오늘은 딱 제 나이대로 보이는 차림새였다.

그러면서도 풍만한 몸매는 감춰지지 않았다.

자꾸만 욕망을 자극하는 그녀였다.

결혼을 하자고?

억눌렀던 욕망이 스물스물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이 닿는 곳 그 어디 한 군데 자극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살결과 탐스러운 가슴, 한 손에 움켜쥐고 싶은 엉덩이, 지금 당장이라도 빨고 싶은 입술… 그리고 거기….

거기는 어떤 맛일까?

서현을 바라보는 태성의 눈빛이 곧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태성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서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

서현은 제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말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뭐, 청혼을 받았으니까.”

서현의 얼굴이 민망함에 살짝 구겨지는 게 보이자, 태성은 피식 웃었다.

“청혼한 사람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어떤데요?”

“즐거워 보이질 않네.”

“…….”

“다신 보지 말자더니… 나랑 다시 결혼하고 싶어진 이유는?”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급하니까. 거래랑 투자… 유지해 줘요.”

“아… 그 이유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녀의 입으로 듣고 나니 기분 참….

태성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돈 때문에 결혼한다? 맞나?”

“…네. 너무 노골적이었나요?”

“아니야, 사랑 따위로 역겹게 포장하면서 결혼하자고 하는 것보다… 이게 낫네. 부담스럽지도 않고. 나한테 돈이 떨어질 일은 없을 테고… 나보다 돈 많은 놈도 없을 테니 뒤통수 칠 일도 없을 거 같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단조로운 그의 말투에 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태성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기억하고 있던 그와 조금 느낌이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그였다.

“…조금 변한 것 같네요?”

“그런가? 당신도 변했어. 물론 좋은 쪽으로.”

“…다행이네요.”

태성의 눈치를 잠깐 살핀 서현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당신 집안에서 계속 결혼을 미루는 거 알고 있어요. 정말 파혼할 생각인 건가요?”

피식 웃음을 흘린 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현에게 다가갔다.

“글쎄… 당신 하는 거 봐서?”

“…무슨 뜻이죠?”

“당신은 원하는 돈을 챙길 테니 됐고, 나도 당신한테 원하는 걸 챙겨야 이 결혼이 성립되지 않겠어?”

“……?”

“5년 전과 달리 당신 회사의 기술은… 이젠 우리 화명에 필요가 없어졌잖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할게요.”

“물론 당신이 할 수 있는 거야.”

“그럼 할게요. 원하는 거 말해요.”

“여전하네, 뭔지도 모르면서 무모한 거.”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해야죠. 저도 얻는 게 있는데….”

“말이 잘 통하네.”

태성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서현은 저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왜, 왜 그래요?”

어느새 더 가까이 다가온 태성이 서현의 허리를 감싸 안아 제 몸으로 끌어당겼다.

“읏.”

“오랜만이네, 이렇게 안아보는 거?”

서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결혼하자며?”

“……?”

“나도 돌려 말하지 않을게, 널 보는 순간 급해졌거든. 내가 원하는 건….”

그의 얼굴이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 정확히 말하면 당신 몸.”

“……?”

놀란 서현이 그의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태성은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잡아당겨 더욱 가까이 몸을 밀착시켰다.

주고받는 서로의 숨결과 마주한 눈빛의 온도가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입술이 가까워졌다.

서현이 노골적으로 결혼의 이유를 말한 이상, 태성도 더는 욕망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어떤 맛일까?”

“……?”

놀라서 얼음이 된 서현을 바라보며, 태성의 눈동자는 뜨겁게 끓어올랐다.

“당신은 오늘 나랑 밤새…”

화들짝 놀란 서현은 태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힘껏 밀어냈다.

“미쳤어… 제정신이에요?”

짙은 욕정 어린 눈빛으로 서현을 바라보던 태성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결혼하면 부부관계야 당연한 거 아닌가? 당신만 결정한다면, 난 오늘부터 할 생각이야. 물론 오늘부터 당신 회사의 투자와 거래도 정상으로 돌아갈 거야. 거래는 정확해야 하니까.”

“……!”

그의 뒷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형식적인 결혼에… 정말 나랑 그걸 한다고?

서현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는데, 태성은 별일 없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책상으로 돌아갔다.

“결정해.”

“잠깐만요… 조금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혹시 아이를 원하는 거예요?”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너라고.”

“그러니까 왜 저를?”

“그럼 다른 여자를 원해야 하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닌데….”

또 서현이 멍하니 있자, 태성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오늘 저녁 7시.”

“네?”

“7시까지 집으로 와.”

“가면요?”

“아까 말했잖아? 밤새….”

“아, 그만요!”

서현이 말을 못 하게 막자, 태성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다.

“오지 않으면 결혼은 없었던 일로. 거래와 투자도 없었던 일로.”

“저기 그건….”

똑똑-

“들어와.”

태성의 목소리에 집무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 비서인 고 비서가 들어왔다.

“부회장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고 비서에게 알았다는 손짓을 한 태성은 재킷을 걸치며 서현을 바라봤다.

“이만 가봐. 보시다시피 내가 좀 바빠서.”

서현은 고 비서와 함께 집무실을 나가는 태성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죄송해요….”

공연을 위해 바이올린과 연주를 맞춰보는데 자꾸만 실수를 하는 서현 때문에 연주가 또 끊기고 말았다.

“죄송해요, 잠깐만 쉬었다 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그럼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죠.”

바이올린 연주자가 밖으로 나가고, 피아노 앞에 앉은 서현은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그와 나눈 대화만 맴돌 뿐이었다.

“오늘 저녁 7시.”

“당신은 오늘 나랑 밤새…”

“오지 않으면 결혼은 없었던 일로.”

서현은 건반 위로 엎드렸다.

쾅-

7시.

…집.

그리고 밤새….

서현의 가슴속에서 하루 종일 둥둥 떠다니는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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