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뭐든 해보라며?
태성이었다.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가진 태성에게서는 중세 유럽의 황태자를 연상케 하는 고고한 기품이 느껴졌다.
특히 눈빛에서 느껴지는 관능미와 슈트를 입어도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근육.
넓은 어깨와 187cm나 되는 키는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완성해 주고 있었다.
햇살에 비친 그 모습에 순간 넋을 잃은 서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고개를 숙인 채, 서현은 후회했다.
‘에이….’
이번에도 당황한 티 팍팍 내며 어리바리 고개를 먼저 숙인 쪽은 서현이었다.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여유로웠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해 놓고, 또 기가 눌리고 말았다.
좀 전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 서현은 인상을 구긴 채 그를 지나쳐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뒤에서 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만난 적 있나?”
이건 뭔 소리인가 싶어 서현이 고개를 돌렸다.
태성이 벽에 기댄 채 여유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애 경험 있냐고.”
“있으면요?”
서현은 또 기가 눌리고 싶지 않아 차갑게 대꾸했다. 물론 태성은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없으면 됐고, 있으면 정리해.”
“……?”
“난 원래 누가 내 거에 손대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그거 지금 절 두고 하시는 얘긴가요?”
“여기 누구 또 있나?”
“제가 그쪽 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다른 남자 건가?”
그건 또 아니라 서현의 말문이 막히자, 태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게 너무 약 올라서 괜한 반발심이 생겼다.
“허! 그렇다면요?”
서현이 헛웃음을 짓자, 태성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서현을 빤히 쳐다봤다.
“지금 내가 말장난하는 거로 보이나?”
“……?”
“말했어. 난 공유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남자가 있다면 정리해. 허튼짓으로 날 우습게 만들 생각하지 말고.”
서현은 애써 태연한 척 센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는 그쪽은요?”
“……?”
“그쪽도 여자 정리해요. 나도 우스워지기 싫으니까.”
서현의 도발에 태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하면… 당신은 뭘 해줄 수 있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서현은 잠시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쪽은 저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요?”
“뭐든.”
언제나 여유로운 그였다.
그렇다면 나도 기꺼이.
서현도 최대한 여유롭게 응했다.
“그쪽이 할 수 있다면 저도 뭐든요.”
“그래?”
“네.”
태성은 서현을 빤히 쳐다봤다.
“뭐든?”
“네, 뭐든.”
서현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지기 싫었다.
태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또 저 웃음… 왜 웃는 거야?
인상을 쓰는 서현을 향해 고개를 기울긴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기자들이 우리를 찍고 있는 거 알아?”
“……?”
서현이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태성이 낮게 말했다.
“돌아보지 말고. 티 나잖아.”
“어떻게 들어왔대요?”
“경비 때문에 들어오진 못했고, 근처 건물에서… 지금 내 눈엔 보이는데?”
태성의 말에 몸이 빳빳하게 굳은 채 눈동자만 굴리는 서현이었다.
“그래서요?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우리 지금 말하는 거 다 찍혔을까요?”
“걱정돼?”
“…….”
말다툼한 게 들켜서 좋을 건 없었다.
안 그래도 돈 보고 하는 결혼이다, 사랑 없이 하는 결혼이다, 재벌끼리의 혼맥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많은 결혼이었다.
그런데 약혼식 날 싸우는 사진이라니… 기업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꾸중을 들을 게 뻔했다.
“안으로 들어가죠.”
“잠깐. 이대로 들어가면 당신이 나한테 화내는 사진이 내일 대한민국 여기저기에 다 뿌려질 텐데?”
“그럼 어떡해요?”
“표정 관리. 지금도 표정 관리해야지.”
서현은 그제야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요?”
“별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네.”
“그럼 어떡해요!”
“뭐든 하겠다고 했나?”
“네?”
“내가 여자 정리하면 아까 뭐든 해줄 수 있다며?”
“그랬죠.”
“정리했어.”
“네? 이렇게 빨리요?”
“응, 그럼 이제 뭐든 해주는 건가?”
“네, 뭐… 근데 갑자기 이 얘기는 왜 하는 건데요? 사진 막자는 얘기 하고 있다가….”
“지금 그걸 막을 얘기를 하고 있잖아. 당신이 나한테 화내는 사진도 막고, 당신과 나, 우리 기업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시선을 한 번에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어때?”
“그 방법이 뭔데요? 말만 하지 말고 뭐든 해봐요.”
태성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서현은 답답하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왜 쳐다만 보는 거예요? 방법이 있다면서요. 뭐든 해보라니까… 읍!”
순간 태성의 입술이 서현의 입술에 닿았다.
너무 놀란 서현이 그를 밀어내려고 하는 순간, 그가 건장한 몸으로 카메라를 등진 채 그녀를 감쌌다.
그러고는 살짝 입술을 떼고 말했다.
“뭐든 해보라며?”
“그래도 이건….”
“기자들에게 선물 좀 해주자고. 회사 이미지도 살리고. 당신 이미지도 살리고.”
“……?”
“여자 정리하면 뭐든 해주겠다며.”
“그랬죠, 근데 이건….”
“아.”
“……?”
“아.”
“…아?”
서현이 저도 모르게 ‘아’를 따라 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꼬리에 걸친 태성은 그녀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읍!”
고개 방향을 바꿔 더 깊게 파고드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서현은 제 의지와 다르게 온몸에 힘이 풀리고, 눈꺼풀에도 힘이 풀린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첫 키스였지만, 서현은 그가 키스를 참 잘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음처럼 굳은 저를 녹이며 참 능숙하게 밀고 들어오는 그였으니까.
밀어낼 생각조차 못 하게 정신을 빼놓는 그는 서현에게 진하게 얽혀들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지만, 서현은 취한 듯 본능에 이끌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였고, 이내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찾았다.
“……?”
서현이 허공에서 입술을 옴짝거리자, 태성이 피식 웃었다.
“아쉬워?”
그의 말에 눈을 뜬 서현은 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무언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혼란스러움에 잠시 멍해진 서현은 이내 정신을 챙기고 발끈했다.
“미쳤어요?”
“미치게 좋았나 봐? 또 해달라는 말인가?”
태성의 입술이 다가오자, 서현이 제 입술을 가렸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태성이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줘 제 몸으로 끌어당겼다.
“어딜 가?”
“놔요.”
“기자들 있다는 거 잊었나? 기껏 잘해놓고?”
“……!”
서현은 당혹감에 대꾸조차 못 했다.
머리의 회로가 잠시 멈춘 것 같았으니까.
그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서현은 더욱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남자는 없는 거 같네. 키스하는 거 보니까. 내가 첫 키스인가?”
“……!”
태성이 웃음을 보이자, 당황한 서현은 한 박자 늦게 반박했다.
“아뇨, 첫 키스 아니거든요.”
“그래?”
“네….”
미세하게 떨리는 서현의 입술을 보며, 태성은 피식 웃었다.
“거짓말에는 소질 없어 보이네. 마음에 들어.”
“무슨 소리예요? 첫 키스 아니라니… 읍!”
태성은 아주 짧게 서현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놓았다.
쪽-
“헉.”
“처음도 아닌데 왜 놀라?”
“미쳤….”
태성의 입술이 또 닿을 듯 바짝 다가오자 서현은 얼어붙은 채 하려던 말을 멈췄다.
“……?”
“다음 키스는… 유학 다녀와서. 그다음 진도도… 유학 다녀와서. 걱정 마. 금방 오니까.”
가볍게 미소 지은 태성은 너무 놀라 굳어버린 서현을 의자에 앉히고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자리를 떠났다.
다, 다음 키스? 다음 진도?
거, 걱정? 뭐, 뭐라는 거야?
기분이 이상했다.
기분이 엄청 더럽고, 화가 나야 하는 게 맞는데… 오히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 이거 뭐야?”
서현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한 손으로는 입술을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약혼식을 끝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다음 날, 서현과 태성의 키스 사진은 온 매스컴을 도배했다. 그야말로 난리였다.
돈만 보고 하는 결혼이 아닌 세기의 사랑이라며 기업의 이미지 또한 긍정적으로 상승했다.
심지어는 예능에서, 드라마에서 두 사람을 패러디한 장면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가 노린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핑크빛으로 물들인 사랑꾼은 약혼식 다음 날 피앙세를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그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연락도 한 통 없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김밥 한 줄만 주세요.”
어쩌다 보니 서현은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녹음실로 향하던 서현은 분식집에 들러 김밥으로 허기를 달랬다.
휴대전화로 다음 스케줄을 확인하는데, 빽빽한 스케줄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 그래도 불러주는 게 어디냐….”
서현은 입에 김밥을 밀어 넣고는 꼼꼼히 스케줄을 확인했다.
얼른 독립하려면 쉬어서는 안 됐다.
태성과 예정대로 결혼한다면 자연스럽게 집에서 독립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파혼 얘기가 나오는 마당이니 혼자 힘으로라도 독립을 해야만 했다.
아빠는 절대로 독립을 시켜주지 않을 테니까.
서현은 한시도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엄마 자리를 꿰차고 있는 그 여자가 있는 집은 더 이상 서현에게는 집이 아닌 지옥이었으니까.
대충 김밥을 입에 밀어 넣은 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녹음실로 향하려고 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 네? 아빠가요?”
* * *
똑똑-
“네.”
소파에 앉아 있던 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부회장님께서 회의가 길어지셔서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태성이 아니라 실망한 서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서현이 태성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린 지도 벌써 두 시간 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비서가 나가고, 한숨을 내쉰 서현은 반짝이는 소파 테이블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 뭐 하냐, 장서현….”
순간 마주한 자신의 표정이 너무 초라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잘 정돈된 물건들, 딱 필요한 것만 배치되어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 책상 위 서류 한 장, 펜 하나도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집무실은 방주인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반듯하고, 철저하고, 약점이 없는 그 남자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