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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4)화 (4/111)

4화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뭐? 잘 보여 봐?

그의 말이 거슬려 심기가 불편해진 서현은 그의 손을 탁 쳐냈다.

“아닌데요.”

“아니다? 그럼 딴 놈들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입고 온 건가?”

미소를 짓던 태성의 표정이 빠르게 식자, 안 보이게 움찔한 서현은 두 주먹을 꽉 쥐고 그를 노려봤다.

내가 5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데 그런 말을!

태성이 한국에 오지 않는 것에 대해 무성한 소문이 돌았었다.

그 소문에는 서현의 집안이 태성의 집안에 경제적으로 무리하게 기대서 그렇다더라. 서현이 문란해서 그렇다더라는 등 태성의 집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서현과 서현의 집안을 탓하는 이상한 소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문들을 감당해야 하는 건 한국에 있는 서현이었다.

당신이 5년 동안 한국에 안 돌아오는 바람에 내가 어떤 오해를 받았는데… 근데 뭐라고?

그런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태성은 서현을 자극했다.

“아, 얼마 전에 스캔들 났지? 그놈 보여주려고 이렇게 입고 온 건가?”

정민혁과의 소문을 말하는 거였다. 누구 때문에 난 소문인데!

서현은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면요?” 

태성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몸을 살짝 기울여 서현을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서현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

“내가 말했지?”

“네?”

“난 내 거, 공유 안 한다고.”

“……?”

“이런 옷 입지 마.”

“네?”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하늘을 찌를 듯한 태성의 오만함에 서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그래요?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을 섞을수록 분노가 끓어올라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서현은 몸에 힘을 바짝 줘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에 반해 너무나도 여유로운 태성의 태도는 더 대조되었다.

“그럼… 아닌가?”

“네, 아니에요. 나 오늘 여기 온 거, 당신한테 결혼 안 한다는 얘기 하러 온 거예요.”

“뭐?”

“다시 말해줘요? 당신한테 잘 보일 생각도 없고, 당신이랑 결혼도 안 한다고요. 파혼! 저 그거 하려고 오늘 여기 온 거예요.”

“……?”

“왜요? 저랑 결혼하고 싶어요? 그럼 잘 보여 보든가. 전 이만 가볼게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유감이네요”

태성이 입꼬리를 비틀자, 서현이 잊은 말이 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앞으로도 당신 기대에 부응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다신 보지 말죠, 당신이나 나나. 5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 이만.”

서현은 차갑게 말하고는 뒤돌아서 밖으로 향했다.

“어이없어.”

그런 서현의 뒷모습을 보며, 태성은 입꼬리를 올렸다.

* * *

열받아서 홧김에 밖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돈도 없고, 카드도 없는 신세인 서현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팔짱을 껴서 최대한 노출을 가리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때였다.

“장서현?”

민혁이었다.

영지그룹의 차남이자 피아니스트인 서현이 속해 있는 영지문화재단의 이사장.

얼마 전 서현의 스캔들 상대.

“오빠!”

서현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민혁을 향해 달렸다.

“아, 다행이다. 오빠도 여기 왔구나.”

“뭐야, 너? 이 차림새는 또 뭐고?”

“어? 아, 그게….”

서현이 민망해서 가슴을 가리자, 민혁은 얼른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줬다.

“큰일 날 아가씨네. 너 언제부터 여기 이러고 있었던 거야?”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손을 잡으려고 하는 민혁을 서현이 뿌리쳤다.

“오빠랑 들어갔다가 또 무슨 소리 들으려고요.”

“아… 남들 하는 얘기 뭐 하러 신경 써? 그냥 들어가자.”

“신경 써야죠. 저는 약혼했잖아요.”

“아… 약혼… 그랬지.”

“암튼 오빠, 혹시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돈?”

“사정이 좀 있어요.”

“무슨 일인데?”

“지금 말하긴 좀 그렇고요. 내일 바로 갚을게요.”

애처롭게 바라보는 서현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민혁은 짧게 숨을 내쉰 뒤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우선 내 차로 가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오빠, 이 손 놔요. 누가 봐요.”

“더 소문나기 싫으면 빨리 따라와.”

서현은 어쩔 수 없이 민혁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빠, 그냥 돈만 빌려줘도 되는데….”

이윽고,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서현은 민혁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못 들어?”

“내가 그랬어요?”

“후, 집에 데려다주면 되지?”

“아뇨! 오빠, 집은 안 돼요….”

“……?”

“오늘은 안 돼요. 사정이 있어요….”

“……?”

저 멀리 택시 승강장이 보이자 서현은 그곳을 가리켰다.

“어? 오빠, 저 저기 내려줘요. 그리고 돈 좀 빌려줄래요?”

“어디로 가게?”

“호텔이죠, 뭐.”

“네 그 차림으로 택시를 타겠다고?”

서현이 그제야 제 옷을 보고 한숨을 내쉬자, 민혁은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호텔까지 데려다줄게.”

잠시 후, 호텔 앞에 민혁이 차를 세웠고, 차 문이 열리자 서현이 그를 돌아봤다.

“오빠, 오빠는 내리지 말아요.”

“왜?”

“소문나요. 나 혼자 갈게요.”

“그래도….”

“남들 보면 시끄러워져요. 오해하기 딱 좋잖아요. 저 혼자 내릴게요.”

안 그래도 남의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곤란을 겪은 서현이었다.

민혁은 뒤늦게 현실을 자각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카드 빌려줘서 고마워요, 오빠. 내일 돈도 갚고, 카드도 돌려줄게요.”

“내일 전화할게. 전화나 잘 받아.”

“알겠어요.”

서현이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민혁은 차를 출발시켰다.

* * *

호텔 방으로 들어간 서현은 불편한 드레스부터 벗어 던지고 침대에 풀썩 몸을 던졌다.

머릿속은 조금 전, 5년 만에 만난 약혼자 태성으로 금세 가득 찼다.

“잘 보여 봐? 기대를 해? 그게 5년 만에 만난 약혼녀한테 할 소리야? 나랑 결혼하고 싶다며? 어이없어….”

혼자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서현은 잠시 멈칫했다.

좀 전에 그가 했던 또 다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예뻐서.”

저를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태성이 떠오르자 서현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머, 나 미쳤나 봐….”

얼른 고개를 저은 서현은 다시 괘씸함에 이를 갈았다.

“아니… 손가락이라도 부러진 줄 알았더니 멀쩡하잖아.”

이미 기사를 통해 태성이 귀국을 한 것도, 사지가 멀쩡하다는 것도 확인했지만, 어쩐지 너무 멀쩡한 걸 보니 화가 나는 서현이었다.

멀쩡한데 5년 동안 연락이 없었으니까. 왠지 멀쩡한 손가락이라도 부러뜨려야 속이 후련해질 것만 같았다.

금방 오겠다면서… 금방이 5년이라고? 나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5년 만에 나타나서는… 잘 보여 봐? 

서현은 불현듯 5년 전 태성과의 약혼식 날이 떠올랐다.

약혼식은 오늘 태성과 마주쳤던 곳. 화명그룹의 호텔인 HM 그랜드호텔에서 진행됐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태성은 서현에게 반말을 했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는데, 서현은 자꾸만 반말을 하는 태성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망할 정도로 늘 빤히 쳐다보는 그 거만한 눈빛과 비웃는 듯한 그 웃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이었으니까 해야만 했다.

어릴 때부터 아빠인 장 회장에게 결혼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귀에 못 박히게 들어왔으니까.

그래서 반항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꾸만 반발심이 들었다.

솔직히 그와 약혼을 한다고 했을 때,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 조금 우쭐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점점… 연신 쏟아지는 기사들은 모두 서현을 백마 탄 왕자를 만난 신데렐라로 표현했고, 장은그룹을 로또 맞은 집안으로 표현했다.

아빠인 장 회장도 늘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무조건 좋은 자리라고, 차지하고 싶어도 차지할 수 없는 자리라고 강조하면서.

그게 반발심을 일으켰을까?

솔직히 태성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남부럽지 않게 남들보다 더 많은 걸 누리고 살아왔다 자부하는 서현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어.

굳이 자신이 저자세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더 어깨를 폈다.

기죽지 말자. 기죽지 말자.

그랬는데… 약혼 전, 친해지라고 마련해 준 몇 번의 자리에서 늘 그에게 기가 죽은 채 당황하기만 했다.

이상하게 약혼자인 태성 앞에만 서면 기가 눌려서 실수를 하게 되는 서현은 그날도 정신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약혼식 당일까지 실수할 수는 없었으니까.

“서현아, 괜찮아?”

“어? 엄마….”

서현의 엄마인 연실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을 건넸다.

“왜? 긴장돼?”

“아니, 그냥….”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아빠인 장 회장 때문에 서현은 또 한 번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긴장은 무슨! 화명그룹 며느리 될 사람이 이런 거로 긴장하면 쓰나. 하…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장남이 아니고 차남이라서 좀 아쉽단 말이야… 이게 어떤 기술인데!”

장은그룹의 독보적인 기술력이 탐나 먼저 정략결혼을 제시한 쪽이 화명그룹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짝 없는 장남의 혼처 자리가 서현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서현의 짝이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라는 얘길 듣고 장 회장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약혼식 당일까지 거침없이 푸념을 하는 장 회장을 보며 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실도 대기실 밖에서 누가 들을까 염려되었는지 자주 문 쪽을 힐끔거렸다.

“어머! 여보, 누가 들어요.”

“듣긴 누가 들어? 그리고 내가 뭐 없는 얘기 했나?“

“여보, 이미 얘기 끝난 건데 왜 그래요? 큰아들은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그럴 겨를도 없고, 아직 뜻이 없다잖아요. 오늘도 동생 약혼식인 데도 못 온 거 보면 진짜 바쁜 거 같은데, 이젠 좀 받아들여요.”

“뭐 얼마나 바쁘다고 동생 약혼식에도 안 와 봐? 두고 보라지. 서현아, 너 장남 아니고 차남한테 시집간다고 해서 기죽을 거 없다.”

“여보! 제발 그만!”

“음!”

결국 연실이 화를 내고 나서야 장 회장은 입을 닫았다.

머쓱해진 장 회장이 시선을 돌렸고, 서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엄마.”

답답해진 서현은 화장실로 가려다가 방향을 바꿔 야외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 문을 열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서현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그 순간 청량한 바람과 함께 풀냄새, 그리고 은은한 우디 향이 서현의 코끝을 스쳤다.

살며시 눈을 뜨자 슈트 핏이 감탄스러운 남자의 뒷모습이 서현의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서현이 정원에 발을 들여놓자, 남자가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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