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179/181)

32.

한참을 기절해 있던 그 사람은 우리가 뒷수습을 마치고, 치안대에 상인과 그 무리를 넘긴 뒤에야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단테의 얼굴을 보고 까무러치며 다시 기절할 뻔했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렸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처신만 똑바로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제야 이 모든 게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를 듣고, 수천 번 정도 이어지는 죄송하다는 인사를 받았다. 사과를 하면서 어찌나 많이 떠는지 누가 보면 우리가 못된 사람들처럼 보일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가짜 마탑주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재밌기까지 했었고, 단테도 다소 어이없어할 뿐 별 신경을 쓴 건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물론 우리가 사칭을 당한 것치고는 무던한 것도 있겠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별다른 일이 없었다.

마탑주 이름을 단 명소 몇 곳이 생겨났다는 것 정도가 별일이라면 별일일까.

“하지만 앞으로 마탑주라고 말하고 다니시는 건 금지예요. 누가 마탑주 아니냐고 물으면 제대로 해명하시고요.”

“예, 예!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됐어요.”

내가 깔끔하게 대답하며 물러서자, 닉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더,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네, 없는데요.”

“뭔가 조금 더, ‘한 번만 더 사칭을 했다간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늘 지켜보고 있겠다’ 같은 말이라든가…….”

“대체 뭘 기대하시는…… 그런 거 없어요. 제 남편이 소문과 달리 그리 험악하지는 않아서.”

나는 바람 빠지듯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한나 씨가 옆에 있을 테니까 또다시 애먼 짓을 하시진 않을 거고, 애초에 그런 일까지 당했으니까 엄두도 못 내실 거고. 그거면 됐어요. 단테가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요, 뭘.”

“워, 원래 이렇게 자비로우십니까?”

“이런 게 자비로운 건가요? 그렇다면, 자비로운 걸로 치죠.”

내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자, 어물거리며 무어라 말을 하려던 닉이 한나에게 꼬집힘을 당하고 입을 합 다물었다. 그 대신, 닉의 옆에 서 있던 한나가 여전히 미안함이 가득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마탑주님의 명성에 해가 되는 일이 없게 열심히 해명하고 다닐게요. 다시 한번 제 동생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죄송하다는 말보다는 감사하다는 말이 훨씬 듣기 좋네요.”

그렇게 이야기하자 한나는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듯 웃었다. 그대로 그 남매와는 헤어지고, 단테와 나는 산책도 할 겸 별장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눈밭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에 빠진 나를 보고, 단테가 손을 잡아 오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

“아주 가끔은 이런 일이 있어도 재밌겠다는 생각.”

단테는 사칭범이 나타난 게 그렇게 재밌었냐며 불만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고, 나는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새삼 네가 유명하다는 걸 알게 되어서 신기했어. 다른 사람들 입에서 마탑주가 오르내리는 걸 보니까 옛날 생각도 좀 나고.”

“난 네가 그 ‘옛날 생각’이라는 걸 좀 안 하길 바랐는데.”

“음, 그리고 무엇보다 네 반응이 귀엽기도 했고?”

단테가 반사적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가 다시 힘을 푸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한걸음 정도 앞서가며 계속해서 미소를 띠었다.

“앞으로 네가 부끄러워하는 걸 보고 싶으면 그때 일을 언급해야겠어.”

“제발 그러지 마……. 잠깐만, 너 지금 나 또 놀린 거지?”

“놀린 거야 놀린 건데, 그게 왜……. 아.”

그러고 보니 세 번 이상 놀리면 소원권을 하나 주기로 했었지. 그냥 단테를 달래기 위한 말이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선 뒤 슬쩍 눈만 굴려 단테를 바라보았다. 곁눈질로 확인한 단테의 눈빛에는 방금까지 없었던 장난기가 가득해서,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단테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너무 무리한 소원은 안 되는 거 알지?”

“음, 무리한 소원의 기준이 뭔데?”

“그걸 이제부터 생각해봐야 알……. 잠깐만, 너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마. 웃는 얼굴이 수상해.”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에이. 아직은.”

“‘아직은’이잖아!”

나는 그 말만 남긴 채 언덕 위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단테는 그런 나를 잡으러 내 뒤를 빠르게 따라왔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뛰어도 단테의 빠른 걸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열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잡힐 듯 말 듯 하다가 내가 넘어질 뻔하고 나서야 추격전은 멈추었고, 그 이후로는 내가 넘어질까 봐 불안하다는 단테의 핑계로 단테에게 손과 팔을 꽉 붙잡힌 채 별장까지 돌아가야만 했다.

* * *

창밖에는 눈발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집 앞 풍경을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내리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다가, 나는 창문의 커튼을 마저 쳤다.

“단테.”

“응.”

벽난로 앞에 위치한 의자에 반쯤 누워있던 단테가 내 부름에 자세를 바로 했다. 단테의 손에는 각각 종이 몇 장과 깃펜이 들려 있었는데, 듣기로는 루크가 보내온 일감이라고 말했다.

“많이 바빠?”

“아니, 괜찮아. 왜?”

단테가 비워준 옆자리에 앉자, 단테가 곧바로 종이와 펜을 저 멀리로 치웠다. 보라색 바람이 문밖으로 물건들을 실어나르는 걸 보면서, 나는 일을 안 하는 상사를 둔 루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밖에 못 나갈 것 같으니까, 바쁘면 마저 일하라고 말하려고 했지.”

“음…… 그래? 눈이 그렇게 많이 와?”

“나 같은 사람이 밖에 나갔다가는 눈사람이 될 정도로 많이 와.”

“네가 눈사람이 된다고?”

귀엽겠는데. 단테의 중얼거림은 늘 그랬듯이 무시하고, 나는 아까 읽다 만 책에 책갈피를 꽂았다.

참고로 이 책갈피는 이 지역에 와서 산 거였는데, ‘마탑주가 구경하고 간 책갈피’라는 문구에 관심을 가졌다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구매한 물건이었다. 보라색 꽃이 그려져 있어서 단테가 생각나더라고.

단테는 그 문구에 민망해하다가도 내가 보라색 물건을 사자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왜 세상에 갈색 꽃은 없는 거냐는 헛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그 물건을 사는 걸 말리지는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시장을 떠올리니 생각나는 게 더 있는데.

“있잖아, 단테. 저번에 나 혼자 시장에 내려갔을 때 뭔가를 들었거든.”

“응. 내가 잠에 들었다는 이유로 네가 날 버렸던 그 날 말이지?”

“버린 게 아니라 네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못 깨운 거라니까. 하여튼, 그때 주워들은 말이 몇 마디 있어.”

나는 내 어깨에 기대오는 단테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떤 사람들이 가짜 마탑주를 내세워서 사기를 치고 다녔는데, 그 마탑주 대역이 직접 나서서 자신은 마탑주가 아니라고 해명하고 다니고 있대.”

“응.”

“속여서 미안하다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던데. 근데 여기서 웃긴 건 뭔지 알아?”

내가 작게 소리 내어 웃자 단테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단테와 눈을 맞추자 자꾸만 더 웃음이 새어 나와서 곤란했다.

“그 가짜 마탑주 행세를 했던 사람이, 자꾸만 진짜 마탑주를 언급하면서 찬양을 하고 다닌다는 거야.”

“…….”

“진짜 마탑주는 자기보다 훨씬 잘생겼고, 훨씬 키도 크고, 훨씬 마법도 잘 쓴다며 말하고 다닌대. 아, 그거 듣고 진짜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

단테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짓다가 다시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고, 나는 목덜미에 닿아오는 숨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단테가 계속 내 옆으로 가까이 붙는 통에 푸스스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막을 새도 없었다.

“다행이지, 단테? 네 평판이 이 지역에서만이라도 조금씩 나아질 것 같아서.”

“넌 내 평판이 나아졌으면 좋겠어?”

“좋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쁠 건 없잖아.”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단테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가만히 내 얼굴을 눈에 담으면서.

그러고는 이제 아예 내 허리를 끌어안아 버리면서 여상하게 대답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넌 항상 그런 식으로 대답하더라.”

하지만 이 말이 단테의 진심임을 안다. 단테가 좋으면 아무렴 좋다는 기분이 뭔지 나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단테가 끌어안으면 끌어안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나는 통에 고개를 들어 올려 단테를 바라보았다.

“단테. 그런데 소원은 왜 그런 걸 빈 거야?”

“소원?”

“응, 내가 널 많이 놀렸다고 줬던 소원권. 그날 곧바로 써버렸잖아.”

단테가 쓴 소원은 다름 아닌 이 지역에서 더 머무르는 거였다. 그 덕에 길지도 짧지도 않게 계획했던 이 여행은 자꾸만 길어지고 있었고, 기한도 정해두지 않아서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진심으로 몰라서 물어본 거였는데, 단테는 내 질문을 듣고 눈꼬리를 접으면서 웃었다.

“네가 그때 말해줬잖아. 네가 살던 고향에는 신혼여행이라는 풍습이 있다고.”

“음…… 그랬지.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굳이 따지자면 이게 우리의 신혼여행이 아닐까 싶어서. 될 수 있다면 오랫동안 여기에 머물렀으면 했어.”

나는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가 신혼이라고 하기에는 양심이 좀 없지 않아?”

“왜? 이 정도면 신혼이지.”

“너랑 내가 결혼한 세월이 자그마치 몇 년……. 아니, 됐다. 그래, 네가 신혼이라면 신혼인 거겠지.”

뭐라 반박해도 신혼이라 우기는 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대충 손을 휘저어 이야기를 끊어냈다. 단테는 자신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고, 결국 그 얼굴이 귀여워서 나도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결혼했을 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우리는 행복한데 신혼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

나는 단테의 볼에 입을 맞추고, 다음에는 바닷가가 보이는 곳으로 함께 여행을 가보자며 속삭였다.

단테는 또다시, 네가 좋다면 자신도 좋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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