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N2.
“저분은……?”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누나가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결국 밧줄을 풀어준 여자나 지금 들어온 남자가 문을 부쉈을 텐데, 여자의 얇은 손목을 봐서는 남자 쪽이 훨씬 가능성 있어 보였다.
달빛이 남자의 등 뒤를 비추고 있는 데다가, 그마저도 희미하기 짝이 없어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닉은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닉, 놀라지 말고 들어 봐.”
닉이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린 자신의 손목과 발목을 주무르는데, 한나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마탑의 마법사 중 한 명이 네가 마탑주를 사칭한 걸 알았어. 그럼 넌 어떻게 할 거야?”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 아…… 영주님 댁에 마탑주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었지…….”
차마 놀람을 표현할 새도 없었다. 한나가 끔찍하다 못해 자신이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빌었던 상황을 언급했기 때문에.
닉은 너무 두려우면 되레 극도로 차분해진다는 것을 최초로 실감했다.
“그렇게 되면…….”
“응.”
“그렇게 되면…… 죽음으로 사죄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극단적인데?”
한나는 황당하게 중얼거렸지만, 닉은 지금 진심이었다. 그 무섭다는 마탑주 앞으로 직접 끌려갈 바에야 죽음으로 사죄해 스스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닉의 진심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심지어 밧줄을 정리하던 여자까지도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혼자 갇혀 계셔서 아직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신 거 아닐까요?”
“죄송해요, 원래 이렇게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애가 아닌데…….”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기에 누나가 안절부절못하며 사과를 하는 건지. 닉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나, 이럴 때가 아니야. 우리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서둘러?”
“날 여기에 가둔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데, 오늘은 아직 안 왔어. 아마 밤이 다 지나기 전에는 오…….”
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쇠붙이들이 저마다 부딪치는 소리. 닉은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늦었나 본데요.”
상황에 걸맞지 않게 차분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닉을 이곳에 가둔 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불청객들이 와 계시는군.”
상인이 오두막 안을 둘러보더니 거만한 말투와 함께 말했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위치가 들켰음에도 긴장은 한 톨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인이 끌고 온 사람들은 족히 다섯 명은 넘어 보였지만, 닉을 구하러 온 이들은 고작해야 세 명이었다. 게다가 상인의 뒤에 있는 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날붙이를 들고 있었고,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선별해온 것인지 인상도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닉 쪽이 불리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마력 제어 팔찌를 끼고 있는데다가, 신체 능력도 부족하기 그지없는 닉은 다시금 덜덜 떨기 시작했다.
“여긴 어떻게 찾아냈지? 뭐, 상관없어. 저놈을 데리고 몰래 빠져나가려 했다면 잘못 생각한 거야. 이 오두막에는 외부인 침입을 알리는 마법이 걸려있거든.”
자주 쓰는 곳이니까 돈도 좀 들였다며, 상인은 전형적인 악당처럼 킥킥거리며 웃었다. 닉과 한나는 그 웃는 모습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는데, 한나와 함께 온 여자와 남자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게다가 여자 쪽은 상인 무리를 신경도 쓰지 않고 남자에게 다가가 무어라 속삭이기까지 했다.
“단테, 그런 마법이 걸려있었어?”
“응. 그런데 얼굴 좀 보려고 일부러 해제 안 했어.”
“그래? 난 또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하길래 뭔가 했네.”
“거기! 뭐라고 속닥거려!”
상인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다그치자, 여자는 다시금 상인 쪽을 바라보며 태연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손짓 같았는데, 그 손짓을 빤히 보던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주었다.
“저것들 뭐 하는 놈들이야?”
상인이 당황하여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상인 뒤에 서 있던 무리가 그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됐으니까,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자고. 동이 트면 일을 깔끔하게 하기 귀찮아져.”
“맞아. 안 그래도 사람이 늘어서 보수를 더 받아야 할 판인데.”
“보수는 알아서 더 쳐줄 테니까 그만 독촉해. 일단 저놈들 묶어.”
“자, 잠깐만!”
그들이 무언가 꺼내 들 기미를 보이자, 닉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닉에게 쏠렸는데, 태생적으로 겁쟁이인 닉은 그 시선만으로도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이, 이 사람들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절 발견했을 뿐이니까…… 해치지 말고 보내주세요. 제발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했다고?”
상인이 닉을 보며 선명한 비웃음을 띄웠다. 그 비웃음을 본 닉은 상인이 할 말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듣는 척이라도 해주지. 지금 네 옆에 있는 그 사람, 네 누나라며 영주님 댁에서 너를 찾았던 사람 아닌가? 바보라도 알아볼 수 있겠는데.”
“제, 제가 잘못한 거니 저희 누나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누나니까 그냥 보내줄 수가 없군.”
상인이 중얼거리며 뒤에 있는 이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이 닉을 구하러 온 사람들을 구석으로 몰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원래는 살살 구슬려서 더 써먹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그냥 입막음 하는 걸로는 불안하니…… 가장 깔끔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
그 ‘깔끔한 방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역시 처음부터 이 지역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닉은 어쩌면 좋지, 하는 눈빛을 띤 채 자신의 누나와 눈을 맞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한나는 닉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누나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 상황에도 어떠한 동요 없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남녀 한 쌍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왔었지! 닉의 머릿속에서 그제야 불빛이 들어왔다. 물론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이 사람들 모두를 해치우기에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적어도 누나는 탈출시켜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닉이 여기에 잡혀 온 건 전부 닉 자신이 어리석었던 탓이니까, 누나라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 순간, 닉이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상황 파악이 잘 안돼서 그런데요.”
마치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하듯 한쪽 손을 들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상인은 노골적으로 ‘저 인간은 머리가 어디 잘못됐나?’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들에게 다가오던 사람들도 멈칫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분께 마탑주 행세를 시킨 사람들인가요? 그러다가 뭐가 잘 안되니 이분을 죽이려고 하는 거고?”
“아하, 마탑주 행세라고 하는 걸 보아하니 이미 이놈이 가짜라는 걸 아는 모양이군.”
“아니, 알 수밖에 없죠…….”
여자는 노골적으로 황당하다는 기색을 띠었다. 그 모습에 발끈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여자의 태연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상인은 이를 갈다가 갑자기 석궁을 꺼내어 여자를 겨눴다.
“어디 그 입에 화살이 박히고도 계속 떠들 수 있는지 보…….”
그러나 상인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 여자에게 향했던 석궁이 살벌한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석궁이 부서지며 나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상인이 비명과 함께 팔을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는 것을 보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상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나가 닉의 옆에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필 노려도 저분을 노리다니…….”
닉은 정확히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다른 말을 더 꺼낼 새가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럴 정신이 없었지만.
갑자기 창문에서부터, 아니, 사방에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 세찬 바람은 소용돌이처럼 오두막 안을 휘돌았고, 이어서 곳곳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의 파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빛의 파편들은 저마다 알아서 자취를 그려내며 각기 다른 모양과 글자들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곳곳에 떠오른 여러 마법진들이 무기를 든 사람들을 무력화시키고, 쓰러트리고, 또 기절시켰다.
이제 오두막 안에는 한나와 닉이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날붙이들이 박살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날붙이 하나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잘하게 부서지고 나서야, 공중을 떠돌던 마법진들이 희미해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쓰러진 사람들과 바닥을 뒤덮은 위협적인 쇳조각들을 보고, 닉은 어안이 벙벙해져 이게 당최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곧, 숨 막힐 듯 이어지던 침묵을 깨는 자그마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 안 다쳤어, 단테.”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곧바로 얼굴을 누그러트렸지만, 여전히 눈빛 한구석에서는 아직 가시지 않은 살벌함이 남아있었다.
“네가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낸 거야.”
“응, 그런 것 같았어. 난 잔인한 거 구경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만 끝내.”
그렇게 말하던 여자는 갑자기 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지, 애초에 지금 자신은 안전해진 건지 아닌 건지 혼란에 젖어있던 닉은 그 시선을 받고 움찔했다.
“아까 한나 씨가 물었던 거 말인데요.”
“아, 아…… 예?”
아까 누나가 뭘 물어봤더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닉이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여자를 올려다보았고, 여자는 친절하게도 한나가 했던 질문과 그 답을 되풀이해주었다.
“만약에 마탑의 마법사 중 한 명이 마탑주를 사칭한 걸 알게 된다면, 목숨으로 사죄하신다고 그랬잖아요.”
“예, 예. 그랬죠…….”
“그럼 그냥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라 마탑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요?”
“…….”
‘예?’라든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따위의 정석적인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닉의 머릿속에서 방금 전에 오두막을 꽉 채웠던 아름다운 마법과, 손쉽게도 부서지던 문이 스쳐 지나갔다.
여자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높낮이가 희미했지만, 어쩐지 호기심에 차 있는 것도 같았다.
정작 그녀의 질문을 들은 닉은 사고가 완전히 정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그 말이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닉은 여자의 뒤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보았던 누구보다 아름답고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닉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