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177/181)

30.

N1.



닉은 덜덜 떨며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가 떨고 있는 이유는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온몸을 얼게 만드는 냉기도 그를 괴롭히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그를 떨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두려움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 지역으로 여행을 오지 않았을 텐데. 아니, 여행을 오더라도 얼굴을 드러내고 돌아다니지 않았을 텐데.

애초에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의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전부 그가 시장 앞을 지나가다가 무심코 마법을 썼을 때였다. 저 멀리서 과일 상자가 옆으로 떨어지려고 하기에 마법을 써서 옮겨 주었는데, 그 모습을 상인 중 한 명이 우연히 본 거였다.

그 상인은 그의 오묘한 눈동자 색과, 또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고 지대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그 눈! 혹시 마탑주님인가요?’

‘맞네, 맞네! 마탑주가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댔어!’

‘예? 그게 무슨, 저는 그런 사람이…….’

‘어, 근데 신문에 나온 거랑 다르게 생겼는데…….’

‘신문의 그림이 너무 과하게 미화된 거겠지, 뭐.’

‘여기 마탑주님이 있대!’

‘자, 잠깐만…….’

원체 소심한 그는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기 시작하자 말조차 똑바로 꺼내지 못했고, 그 상태로 오해는 점점 커져만 가 그 지역의 가장 큰 상인이 그를 부르는 지경이 되었다.

닉은 자신을 불러놓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상인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평생의 용기를 다 끌어모아 자신은 마탑주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다른 분들이 오해하셔서 잘못된 소문이 퍼진 것 같다고.

그러자 그 상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자네가 마탑주가 아닌 건 알아. 난 마탑주가 전쟁을 끝내고 수도로 돌아왔을 때 멀리서나마 그 얼굴을 본 적이 있거든.’

‘그, 그렇습니까? 그럼…….’

‘하지만 이렇게 된 김에 난 자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군.’

‘예?’

‘행색을 보아하니 여행을 떠나왔다가 돈이 거의 다 떨어진 모양이지? 이대로라면 집으로 돌아갈 경비도 없을 테고, 마땅히 머무를 곳도 구하지 못했을 테고.’

닉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정확한 지적이었기 때문에.

‘자네가 날 도와준다면 숙식을 제공해주는 건 물론이고, 집으로 돌아가고도 남을 만한 돈을 줄 수 있어. 생명이 위험하거나 자네에게 해가 될 만한 일도 아니니 안심하게. 어때? 날 도와주겠나?’

사실 닉은 당장 그날 잘 곳도 없을 정도로 돈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해가 되지 않을 만한 일이라는 말만 듣고 덥석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해봤자 마법으로 짐을 드는 일이나 시키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들춰보니 그 일이라는 건 ‘마탑주라는 소문을 해명하지 않은 채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었고, 그도 모자라 그 상인이 닉에게 넘기는 물건을 마탑주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팔아넘겨야 했다.

그 상인은 상품 가치가 없는 최하급 마석들을 어떻게 하면 처분할지 고민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마탑주로 오해받는 그를 이용해 그 마석들을 마탑주의 이름값으로 비싸게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무언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미 하기로 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닉은 매일매일을 울고 싶은 심정으로 그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자신을 마탑주라고 소개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간간이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가 쓰는 마법이 마법사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초급 마법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소문은 몸집을 불려갔고, 가까운 다른 지역에서 마탑주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의 영주가 직접 그를 찾아와 악수를 청하고 갔을 때, 그것도 모자라 ‘거처가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저희 집에서 머무르시는 걸로 해도 괜찮습니다’라는 호의적인 말을 남기고 갔을 때. 닉은 자신이 지금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들키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닉에게 마탑주 행세를 요구한 상인은 한없이 느긋했다.

그 대단하신 마탑주가 이런 작은 지역에서 도는 사소한 소문을 들을 일 없다는 이유였다.

‘소문이 아무리 퍼져봤자 대륙 끝에 있다던 마탑까지 닿겠나?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그냥 그 명성을 잠시 빌릴 뿐이야.’

‘하, 하지만 그래도…….’

‘내가 마석을 다 팔아넘기고 나면 자네는 자네의 집으로 돌아가면 끝이고, 나도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 끝인데. 뭘 그렇게 두려워하나?’

아무래도 상인은 마탑주를 단순한 전쟁 영웅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마탑 소속은 아니어도 같은 마법사인 닉은 마탑주라는 이름이 다르게 와닿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처럼 느껴져 매일 밤을 악몽으로 지새울 정도였다.

이러다가는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말라 죽겠다 싶어 더 이상 이 일을 못 하겠다고 상인에게 말한 날.

닉은 그대로 뒤통수를 가격당하고 외딴 오두막에 갇히고 말았다.

일어나 보니 그의 팔에는 마력 제어 팔찌가 끼워져 있었고,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그에게 일을 시켰던 그 상인이 앉아 있었는데, 자세가 흡사 어딘가의 불량배 같았다.

팔리면 안 될 마석들을 사칭을 해서라도 팔아먹으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던 걸까?

닉은 하루에 한 번씩 상인과 독대를 할 수 있었고, 이 일을 정말 그만둘 거냐는 협박 아닌 협박을 들어야 했다. 닉이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위협을 가하려는 듯한 움직임이 보였는데, 마침내 어제 상인이 단단히 엄포를 놓고 돌아갔다.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라고.

그래서 닉은 지금 이 시간까지 손과 발이 묶인 채 오들오들 떨며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거였다.

그날따라 상인은 늦게까지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일부러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를 대신할 사람을 찾느라고 바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닉은 그가 오늘 하루만은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곧 그의 기대를 배반하고, 문 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여러 명이 이야기하는 듯한 소리도.

“노크하는 건 좀 이상한가? 우린 지금 무단침입을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네가 원한다면 노크해도 돼, 에이.”

“두 분 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닉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바닥에 앉아 있다가, 마지막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너무 간절한 마음에 환청을 듣지 않았다면 이건 분명 누나의 목소리였다.

“음, 단단히 막혀있는 거 보니까 부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알았어. 저희는 좀 뒤로 물러날까요, 한나 씨?”

닉이 급한 마음에 문 쪽으로 무어라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 쾅!

“열렸다.”

“……워, 원래 이렇게 문을 부수는 게 간단한…… 건가요?”

“아닐걸요? 그냥 단테가 마법을 좀 잘 써서.”

“그거야 당연하겠지만……!”

뿌옇게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세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정말 그가 눈물 나게 그리워했던 그의 누나였고, 나머지 두 명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장 먼저 앞장서서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갈색 단발머리에, 누나보다 키가 작은 여자였다. 최소한의 옷을 제외하고는 다 빼앗긴 그와 비교되도록, 여자는 어떤 추위에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이 따뜻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 여자는 곧 손과 발이 묶여서 구석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하고 어, 하는 소리를 냈다.

“한나 씨, 저기…….”

“닉!”

여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던 누나는 곧 쌩하니 그에게로 달려왔다. 닉이 울먹거리며 누나의 이름을 부르자, 한나는 그를 마구 살펴보다가 닉 대신 울음을 터트렸다.

“너 대체 왜 이런 꼴로 여기 있어! 왜 묶여 있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누나…….”

“내가 여기 와서 네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너 진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평소라면 누나의 잔소리가 귀찮게만 느껴졌을 테지만, 온몸을 채운 짙은 안도감 때문에 귀찮음은 무슨 잔소리를 더 듣고 싶을 지경이었다. 닉은 한나를 바라보다가 곧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고, 순식간에 오두막은 울음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야, 너 그만 울어! 울 거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고 울어!”

“흐엉, 누나……. 나 진짜 너무 힘들었어…….”

“대체 뭐가 힘들었다는 건데, 응? 일단, 일단 이것부터 풀자. 내가 풀어줄게.”

한나는 닉의 손과 발을 묶어둔 밧줄을 풀기 위해 끙끙거렸지만, 그녀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곧 한나가 민망하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들을 지켜보던 여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가 잘 안되나요?”

“아, 그게. 밧줄이 안 풀려서…….”

“어디 보자.”

닉의 앞에 앉은 여자는 곧 꼼지락거리며 밧줄을 살펴보는 듯했다. 누나도 못 푼 걸 이 사람이 풀 수 있을까 싶어 체념한 채로 기다리는데, 갑자기 손의 밧줄이 기적처럼 풀렸다.

“자, 풀었어요. 발에 있는 것도 마저 풀어드릴게요.”

“어, 어떻게…….”

“그냥 오래 살다 보면 별걸 다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이것도 그중 하나예요.”

마치 나이가 정말 많은 사람처럼 태연한 목소리로 말한 그 사람은 발의 밧줄도 마저 풀어주었다. 얼떨떨하게 감사하다는 말을 뱉었지만, 여자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들 같은데, 어쩌다가 누나와 함께 나를 구해준 거야?

닉이 뒤늦은 의문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잠시 밖을 살펴보는 것 같던 나머지 한 사람이 오두막 안으로 발을 디뎠다.

키가 큰,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