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167/181)

20.

이제 아예 대놓고 도망치네. 나는 황급히 사라지는 단테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줄은 몰랐다. 마지막에 스치듯 본 단테의 얼굴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로서는 단테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단테의 뒷모습을, 그것도 나를 피하는 뒷모습을 본 적은 잘 없었다. 그리고 나와 있기 싫다는 거부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언젠가 마탑에서 숨바꼭질을 하듯 나를 피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단테는 먼저 숨어 다니는 주제에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단테의 거부를 처음 받아본 소감이 어떠하냐면, 내 생각보다 상당히 서운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매정하게 굴지는 못하는 단테를 보고, 역시 기억을 잃어도 단테는 단테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리고 내 안의 단테는, 늘상…… 나를 뿌리치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잡혀 있었고.

저 멀리서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단테가 나를 피해 향한 곳은 고작 자신의 방이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졌다고 해도 결국은 나와 한 공간인 곳.

나는 단테를 쫓아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단테가 혼자 있을 시간을 좀 만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단테도 계속 한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불편하기도 했겠지. 계속 나를 피해 다니던 것도 그런 맥락 아니었을까. ……그러길 바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통신구를 이용해 마샤에게 연락을 넣었다. 하룻밤만 네 집에서 자도 되겠냐는 내용이었고, 그 뜬금없는 요청에도 마샤는 너무 좋다는 대답을 보내주었다.

단테에게 남기고 갈 쪽지에 글씨를 적어 내려가면서, 나는 부디 단테의 기분 환기가 하룻밤만으로 충분하기를 바랐다.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올게요. 그동안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아. 이 정도면 되겠지.

쪽지를 접어서 탁자 위에다가 올려두고,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나가기 직전에 단테의 방문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사람이 나올 기미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예전이라면 마중을 못 나와서 안달 났을 거면서. 지금과 예전을 비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났다.

네가 기억을 잃었을 때 섭섭한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면 단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안하다고 말할까, 아니면 안절부절못할까?

애초에 단테의 기억이 돌아오기는 할까?

* * *

“무작정 찾아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마샤. 너 아직 신혼인데 이렇게 친구를 언제든 초대해도 괜찮은 거야?”

“뭐 어때? 그이도 괜찮다고 했는걸. 애초에 이런 걸로 불편해할 사람이 아니야.”

뭐, 확실히 그래 보이기는 했지. 나는 순하디순한 마샤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수긍했다. 내가 그 사람이 하는 식당에 가서 몇 날 며칠 무전취식을 해도 마샤의 친구분 아니냐며 음식을 더 퍼올 사람이었다.

지금도 마샤랑 재밌게 놀라면서 손님방에 야식을 남겨두고 갔잖아. 참한 남자를 잡아온 마샤가 기특하면서도 ‘이 어린애가 정말 결혼을…….’하는 마음이 다시금 들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에이 너.”

나를 바라보는 마샤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혹시 집에서 가출한 거야?”

“가출? 어쩌다 결론이 그렇게 난건데?”

“어쩌다 나긴.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서, 하룻밤 자고 간다고 하니까 그러지.”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표정 변화 없이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마샤는 못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요새 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 단테랑 싸우기라도 한 건가, 하고 있었단 말이야.”

“…….”

“진짜 싸웠어? 왜 대답이 없어?”

“음, 아니야. 싸운 건 아니고.”

그러고 보니 마샤에게는 단테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어서 단테까지 잃었다고 하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아서. 그리고 단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탑주니까. 누구에게든, 그리고 어떤 방식이든 마탑주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이 새어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마샤가 나를 첫 부부싸움을 마주한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것.

문득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뭔데? 빨리 말해 봐.”

마샤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동자였다-나를 바라보았다. 아예 두 손으로 턱까지 괴고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 걸 보며, 나는 이런 걸 마샤에게 물어보는 게 맞나 싶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런 때 아니면 또 언제 물어보겠어. 단테와 내가 부부싸움을 한 줄 아는 이런 때에.

“네 남편이 요새 좀 달라졌다 싶으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달라진다는 게 어떻게 달라진다는 건데?”

“음……. 평소에는 안 하던 행동을 한다든가, 반대로 늘 하던 걸 안 한다든가.”

사실 조금 달라진 게 아니라 많이 달라진 거지만. 나랑 만난 후에서 나랑 만나기 전으로.

모호하게 말했지만 대충 말하는 어조로 무언가를 눈치챈 듯, 내 질문을 들은 마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달라져? 왜, 요즘 단테가 너한테 소홀해? 내가 대신 혼내줄게. 넌 단테를 내 앞에 데려오기만 해.”

“데려오면 단테가 큰일 날 것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은걸……. 하여튼. 넌 어떡할 거야?”

“흠.”

마샤는 금방 생각에 잠겼다. 앓는 소리까지 내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그냥 적응하려고 할 것 같은데?”

“……적응한다고?”

“응. 전에는 이랬는데, 요즘은 안 그러네? 싶긴 해도, 내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예 바뀐 건 아니니까. 그냥 그러려니 할 것 같아.”

나는 마샤의 말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게,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는 건데.

하필 그 달라졌다는 게 나를 사랑하는 것과 관련된 부분이라서, 내가 그렇게 못 하고 있어…….

하지만 이런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마샤에게 할 수 없었다. ‘사실, 단테가 날 이제 안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 마샤는 곧바로 내 집으로 달려가 정말 나 대신 단테를 혼내주려고 들 게 분명했으므로.

“만약에 그 달라진 부분이 네 마음에 안 들면? 그래도 그냥 적응할 거야?”

“마음에 안 든다고? 흠……. 대충 우리 남편이 도박을 시작했다고 가정해볼까?”

“아니, 그렇게 극단적인 예시를 들 필요까지는…….”

내가 황당해하며 말했으나 마샤는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친 뒤였다. 무언가 중얼중얼거리면서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 같던 마샤는, 곧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냥 어두워졌다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악당 같은 얼굴로 변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일단 안 끊으면 이혼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야겠지. 나한테 용돈을 타서 쓰라고 한 뒤에 돈은 한 푼도 안 줄 거야. 그리고 직장에 매일 찾아가서 남편은 나왔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확인을…….”

“마샤, 너 너무 갔다. 좀 진정해.”

“그래서 어떻게든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할 거야.”

나는 마샤의 어깨를 잡던 그대로 멈칫했다. 어느새 마샤는 안색을 평소대로 되돌린 채,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완전히 되돌리지 못한다고 해도 일부분이라도 되돌려보려고 할래. 내기를 싫어하는 남편은 못 돌아오겠지만, 적어도 재산을 말아먹을 만한 도박은 하지 않는 남편으로 만들 수는 있겠지.”

“……일부분이라도 충분해? 그래도 네가 사랑한 모습은 돌아오지 못하는데?”

“그것도 감당해야지, 뭐. 이미 결혼했는데 어쩌겠어.”

마샤의 말을 듣고 이제 심각하게 고민하는 쪽은 내가 되었다. 남편이 달라지면 어떻게든 이전 상태로 돌리려고 할 거라고.

그리고 완전히 돌리지 못한다면 일부분이라도 돌리려고 할 거라고…….

나는 나를 피하던 단테의 모습을 생각하고, 내가 서운해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되돌리고 싶은 부분은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럼 나는 단테가 나를 다시금 사랑하게 만들면 되는 걸까. 마샤가 예시로 들었던 도박 중독자 남편을 되돌리는 것보다는 쉽게 들리기도, 어렵게 들리기도 했다. 그야 당연하지, 사람의 감정이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리고 여기에는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나는 단테가 어쩌다가 나에게 반했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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