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66/181)

19.

리사가 왔다 간 뒤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이대로 단테의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었다.

단순히 리사의 ‘오래 걸린다’라는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테가 보이고 있는 양상이, 나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기억 안 나나요? 당신이 저한테 준 책갈피인데.’

‘……전혀. 생각나는 게 없어.’

‘흠, 일단 알았어요.’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기억이 존재했다. 하지만 단테는 며칠이 지났는데도 제대로 돌아온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은 있어도, 그게 왜 익숙한지는 모른다고.

그 상태가 일주일쯤 지속되다 보니, 태평하게 단테가 금방 기억을 찾으리라 믿던 나도 슬슬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단테가 정말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될까? 몸에 남아있는 찌꺼기나 다름없다던, 단테가 나에게 느끼는 일말의 익숙함마저도 사라져 버리면?

사서 걱정을 하는 편이 아닌데도 자꾸 의미 없는 상념이 떠돌았다. 단테가 기억을 잃은 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렇기도 했고, 요즘 단테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서 그렇기도 했다.

아, 요즘 단테가 도대체 어떠냐면.

“단테? ……얘 또 어딜 간 거지.”

날이 갈수록 점점 나를 더 피하고 있었다.

* * *

D21.

“…….”

단테는 그냥…….

그는 지금껏 유례없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지나치게 굴곡이 없었던 그의 인생에 이런 일은 없었고, 또 이런 기분도 없었다.

애꿎은 별의 흐름을 살펴보지 않아도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듯했다. 기억을 잃지 않고서야 시간이 자신만 내버려 두고 도망간 듯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 것 아닌가…….

조심스러운 기색도 없이 말을 걸어오는 동거인도 이상하고, 그 동거인에게 정체불명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도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할 뿐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낀다니. 그의 기분은 날이 갈수록 복잡미묘해졌고, 그 기분을 견디지 못해 가끔 그 집에서 도망쳤다. 그래봤자 뒷마당, 또는 집 앞 산책로가 다였지만. 마탑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그날도 오후의 햇빛을 맞으며 뒷마당의 긴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였다. 유독 날씨가 좋고, 빛이 가루가 되어 흐르듯 눈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럴싸한 가림막도 없이 계속 하늘을 보고 있다 보니 눈이 점점 따가워지는 것 같았지만, 그 감각조차도 일종의 증거처럼 느껴져서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평화를 느끼고, 여기에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

그건 낯선 장소가 요 며칠 새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이토록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상적인 기분은 잘만 느껴지는데. 단테는 발목을 스치는 풀잎을 무심코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다 할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걸까.

그의 동거인을 자처한 사람…… 그러니까 에이는, 여전히 며칠에 한 번꼴로 그에게 기억나는 것은 없냐고 물어오고는 했다. 그 물음에 불안감이나 걱정 따위가 느껴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 말을 마냥 안부 인사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바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기억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니.

그래. 제일 이상한 건 그녀를 이토록 신경 쓰고 있는 저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몸에 잔존해 있는 감정만으로 반응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과거의 것일 감정과 지금의 것일 감정을 분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저 부스러기만 남아있을 뿐인 감정이 생각보다도 더 강렬했던 건지, 아니면…….

‘단테.’

지금도 그녀가 자꾸만 새롭게 눈에 밟히는 건지.

그에게 애정이란 타인에게서 가장 얻어내기 쉬운 것 중 하나였다. 그의 타고난 외모와 능력은 그것을 가능케 했고, 그러니 여자가 보내오는 애정도 특별하지 않았다.

특별하지 않아야 했는데.

한없이 무심한 얼굴로 있다가도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면 꽃 피듯 눈빛이 다정해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꾸 불쑥 쳐들어와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정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뻔뻔하게 굴었다.

감정 변화가 잔잔하리만치 거의 없는 사람에게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가 되었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심지어 몸에 남아있는 감정의 형태도 기쁨을 띠고 있다 보니, 도저히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니 알려고 하지 않아도 여자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는, 지금껏 굳이 타인에 대해서 알려들지 않았던 단테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생소하다는 말은 곧 낯설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그는 스스로의 변화가 달갑지 않기도 했다.

아직 단테는 여자에게 이끌리는 이유가 그저 몸에 남아있는 익숙함 때문일 거라고 믿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면, 기억을 잃은 와중에도 또 끌리고 있는 거라면.

그 다음부터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 같았기 때문에…….

하염없이 바닥의 그림자만 들여다보고 있던 그 순간, 또 다른 그림자가 그에게로 다가섰다.

“아, 찾았다.”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단테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쓸데없는 저항이라는 듯이, 여자는 곧바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냥 옆도 아니고 바로 가까이에. 실수로 팔을 뻗으면 손이 겹쳐질 만큼.

“요즘 뒷마당에 자주 있네요.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냥.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해서.”

“흠, 여기가 유독 시원하긴 하죠. 바람이 잘 들어와서 그런가.”

때마침 어딘가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에, 에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갈색 단발머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옅은 자취를 그려냈다.

단테는 별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또다시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즉시 억지로 시선을 돌렸지만, 아무래도 그런 단테의 모습이 여자에게는 어색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거기 뭐라도 있어요?”

에이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단테는 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단테를 빤히 바라보던 여자가 급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요즘 당신이 나를 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단테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드디어 이쪽을 봐줬냐는 듯 옅은 미소를 짓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미소에 당연한 수순처럼 귓가에 열이 오르는 것은 덤이었다.

“눈에 띄는 곳에 있다가도 금방 사라지지, 겨우 집안에 들어왔다 싶으면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 통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요, 요새.”

“방에 들어간 건……. 기억을 되찾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런 건데.”

“그럼 다른 때는 저를 피한 게 맞았다는 뜻이네요?”

단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동시에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여자에게 거짓말을 했다가는 괜한 실망감만 부르게 될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니 변명 같은 말이라도 아무렇게 주워섬기는 수밖에.

“익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와 멀어지면, 다른 것들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질지가 궁금했을 뿐이야.”

“음, 그래요. 그래서 저랑 멀어지니까 어땠어요?”

“기억나는 건 없지만, 단순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들은 몇 있었어. 이 장소도 그중 하나고.”

“기시감뿐이었나요?”

“…….” 

“저랑 멀어지니까 아쉽다거나 그렇진 않았고?”

단테는 에이가 장난을 치고 있음을 손쉽게 깨달았다. 사실 모를 수가 없는 게, 묘하게 생글거리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장난을 치기 전에 살짝 웃어 보이는 건 그녀의 버릇 중 하나였다.

평소라면 저 장난에 마냥 휘말렸을 테지만, 오늘따라 맞받아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은 본 적 없는 것 같은, 에이의 당황한 얼굴이 궁금했고, 당황한 얼굴이 아니더라도 다른 표정을 보고 싶었다.

이미 그녀의 다양한 표정을 궁금해 한다는 점에서 어딘가 단단히 글러 먹어 있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더 멀리 떨어져 봐야 알 것 같은데.”

“…….”

“잠깐이라도 어딘가로 떠나보는 게 좋을까?”

단테의 말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상태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그대로 침묵하더니, 곧 무언가 골똘히 고민했다.

“당신 생각에 초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요, 그냥 제 곁에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왜? 내가 떠나는 게 싫나?”

“네.”

“…….”

“전 더 이상 당신이 없으면 안 되거든요.”

물론 어딘가 갔다 온다고 하셔도 금방 돌아오실 테지만, 그래도 제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요. 이어지는 여자의 말이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더 이상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이제 귓가에 들려오는 것이 바람 소리인지, 아니면 그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선명하고도 외면할 수 없는 감정을 직면하면서, 단테는 홀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걸 단지 몸에 남아있는 찌꺼기라고 생각할 수 있나?

지금의 그가, 그녀를 향해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약 기억을 잃기 전의 그가 느꼈을 감정을 또다시 새롭게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시 그녀에게…… 반하게 되는 것일까.

잠깐만, 반하게 된다고?

“단테?”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자, 단테는 그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채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단테를 에이가 의아하게 바라보았고, 곧 하얀 손이 그의 이마로 향했다.

“어디 아파요? 안색이…….”

그리고 다음 순간, 단테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녀의 눈앞에서 도망을 친 것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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