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64/181)

17.

기억을 잃은 단테는 다행히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마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있고, 나라는 동거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다시 마탑에서 지내겠다고 말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늘 지내던 곳에 있는 편이 낫겠지. 다른 이유는 없어.”

“알아요, 다른 이유 없는 거. 저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이었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흠, 기억을 잃었더니 농담도 잘 안 받아주는구나.

“아무튼, 뭔가 궁금한 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당신이 기억을 잃었으니 웬만하면 집에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저는 2층에서 지내고 있을게요. 이제 집 구조는 다 알려드린 것 같고, 나머지는…….”

“잠깐. 2층이라고?”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단테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내 발을 붙잡았다. 나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단테를 쳐다보았고, 단테는 어째서인지 내 눈을 피했다.

“원래부터 공간을 분리해서 따로 지냈나?”

“네? 아니요, 그건 아닌데.”

오히려 2층은 거의 없는 공간이나 마찬가지였지.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꼬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전에 지내던 대로 지내면 제가 계속 눈앞에 알짱거릴 텐데요. 그럼 불편하실걸요.”

“내가 방금 말했지 않았나? 기억을 찾기 위해서 늘 지내던 대로 지내야겠다고. 배려해줄 필요는 없어. 오히려 기억을 찾는 데에 더 방해되니까.”

“흠, 일리 있네. 알았어요,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데, 잠깐 침묵하던 단테가 이렇게 말했다.

“혹시 방해라는 말이 심했다면 사과하지.”

“아뇨,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맞는 말이니까.”

방해를 방해라고 하지, 아니면 뭐라 그래. 어깨를 한번 으쓱이자 단테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왜 이런 걸로 사과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건 내 예상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단테의 기억을 찾는 건 생각보다 수월할 것 같았다. 지금 태도만 봐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말랑하잖아. 내 경우보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게 더 많다거나, 뭐 그런 거겠지.

“이제 지내는 곳에 대해서는 설명할 만큼 알설명한 것 같으니까, 당신이 평상시에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려드릴게요. 저도 모르는 건 아마 비서님께 물어보면 될 거예요.”

나는 단테를 소파에 앉히고, 혹시 몰라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그냥 말로 하는 것보다 적으면서 설명해주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아예 생활 계획표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게 낫나? 평상시 자신이 지내던 대로 지내겠다는 단테의 말에 맞춰주기 위해 방법을 고심하는데, 단테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게까지 하나하나 맞춰 가면서 지낼 생각은 없으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 봐.”

“다른 이야기요?”

“……너에 관한 것도 알려줘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이 지내는 사람인데. 단테의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내용은 결국 내가 궁금하다는 거였다.

나는 꾸준하게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는 단테를 바라보다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제가 자기소개를 안 했었나요? 그러고 보니까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음. 궁금한 거라도 있으세요?”

“자기소개를 안 한 것도 몰랐…… 됐다. 너, 이름이 뭐야?”

“에이에요. 글자 A. 가명 같은 거 아니고 진짜 이름이고.”

나는 종이 위에 ‘A’라는 글자를 무심코 적으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이 이름이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에이로 살고 있으니까 진짜 이름이 맞았다.

글자 하나가 내 이름이라는 말에 단테는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보지 말라고 한번 항변하고 나서야, 단테는 다시금 시선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렸다.

“그래, 아까 비서도 너를 에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나이는?”

“혹시 이거 취조 같은 거 아니죠? 이름에 이어서 나이까지 불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나이는…….”

내 나이 말이지. 나는 침침하게 과거를 돌이켜보다가, 그냥 간단하게만 대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당신보다는 많아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니 단테가 가볍게 소리 내어 웃어 보였다.

“아닐걸.”

“음,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사실 웃어야 하는 건 내 쪽 같은데, 기억을 잃었으니까 한번은 봐줬다. 나중에 기억을 되찾으면 두고두고 놀려먹어야지.

내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단테는 단호하리만치 딱 잘라 대답했다.

“넌 나와 같은 초월자가 아닐 테니까.”

나는 그제야 단테가 왜 저렇게 말하는지 이해했다. 초월자가 아닌데 단테만큼 나이가 많으면서, 또 외형은 이만큼 어릴 수 있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단테. 세상에는 별별 일이 다 있는 거야…….

“못 믿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진짜예요. 당신이 저보고 누나라고 불러도 모자랄 정도라니까요?”

장난처럼 이야기하자, 단테가 불시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누나?”

“…….”

“한 번도 남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어서 생소한데. 혹시 누나라고 불리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못 해줄 것도 없지만.”

“…….”

“왜 대답이 없어?”

단테가 약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나서야, 잠시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갔던 정신이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진짜 누나라는 말을 입에 올릴 줄은 몰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거짓말은 아닌데요, 믿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거짓말이라고 쳐요. 그러니까 그 호칭도 이제 그만하고요.”

“무슨 호칭? 누나라는 거?”

“……네.”

굳이 말 안 해줘도 알아들었을 텐데 뭐 하러 한 번 더 물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약하게 구겼는데, 단테는 그런 내 모습에 오히려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누나라고 부르는 게 뭐 어때서? 누나가 싫으면, 누님은 어때?”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 나이 많다는 말은 그냥 취소할 테니까 그만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말해주면 그만하도록 하지.”

단테는 마치 선심 쓰듯 관대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진실만을 이야기한 것뿐인데도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한다니 좀 억울한데.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호칭에 면역이 없어서, 그리고 동생처럼 취급하는 아이들에게 누나라고 불려 왔던 탓에 어색해서 이러는 거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다른 이유를 들어야 쉽게 넘어갈 듯싶었다.

“서로 이름으로 부르다가 호칭을 쓰니까 거리감이 느껴져서 별로예요. 전 그냥 당신을 단테라고 부르는 게 좋고, 당신이 에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

“안 되나요?”

내 말에 잠시 행동을 멈추는 것 같던 단테가 이내 헛기침을 했다. 단테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내가 아차 하고 덧붙이는 게 더 빨랐지만.

“혹시 연장자한테 철저하게 예의를 지키는 부류신가요? 그러면 누나라고 부르세요. 저도 이참에 익숙해져 볼게요.”

“나이가 많다는 말은 그냥 취소한다며?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어쩐지 이름으로 부르기가…….”

단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종래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고 되물었지만, 단테는 고개만 저을 뿐 제대로 된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말을 하다가 얼버무리는 건 꼭 우리가 막 만났을 때랑 비슷하단 말이야. 약간 까칠한 것도 그렇고, 그러는 동시에 내 눈치를 조금씩 보는 것도 그렇다.

처음에는 단테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마냥 당황스러웠는데, 단테의 기억이 나처럼 자연스럽게 돌아온다고 생각한다면 이 상황을 조금 더 즐겨도 될 것 같았다. 까칠한 단테, 나름 새롭고 귀엽잖아.

물론 지금의 단테는 내가 자신을 귀여워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까 존댓말은 써도 이름은 그냥 불러도 되죠? 아무리 그래도 단테 씨라고 부르기는 싫은데.”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렇게 부르라고 해도 싫으면 안 부를 거잖아.”

“어떻게 알았지? 단테 씨라고 부르라고 했으면 아예 이름을 안 부를 생각이었어요. 저희 이래 보여도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예리하시네요.”

아까 농담을 안 받아준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게 된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단테는 단테고, 저 얼굴만큼은 그대로여서인 것 같았다.

아니면 단테의 태도가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치고는 유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무리 단테가 나를 경계하는 척해도, 내 눈에는 다 보인다. 단테의 시선이 자꾸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헛도는 이유가 귀가 계속 빨개져서라는 걸, 그리고 내가 한 걸음 멀어지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다는 걸.

단테를 오랜 시간 봐왔던, 이전에 단테가 먼저 알리기도 전에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던 나만큼은 알 수밖에 없었다.

너도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나 자신도 모르던 것들을 알아차렸을까? 그래서 선을 긋는 내게 서운해하면서도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걸까.

나는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단테에게로 손을 뻗었던 것 같다. 탁자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보니 단테의 얼굴은 손쉽게도 내 손에 닿았다.

버릇처럼 단테의 뺨을 쥔 그대로 눈가를 쓰다듬으려는데, 뒤늦게 경직되어있는 단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지금은 이런 거 싫죠? 미안해요.”

곧바로 손을 놓고 몸을 뒤로 물렸다. 이전보다 확연히 멀어진 거리에, 단테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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