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163/181)

16.

나는 단테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서 솔직히 대답한다고 해서 얘가 믿을까?

기억을 잃었을 때의 나야 단테의 얼굴에 홀렸거니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단테를 그런 식으로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슨 헛소리냐고 하겠지.

아무리 단테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렇지 모난 말을 일부러 듣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잠시간 곰곰이 생각하다가, 모호하더라도 거짓말은 아닌 말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여기에 네 보호자 자격으로 와 있는 사람이야.”

“뭐?”

“기억을 잃은 마당에 옆에 아무도 안 둘 수는 없잖아? 그런 거지.”

그렇게 말하자 단테는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워낙 뻔뻔한 표정으로 서 있고, 또 단테의 비서가 어색하게 웃을 뿐 반박은 하지 않자, 일단 넘어가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반말을 쓸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음, 그건 왜? 불편하면 존댓말 써줄까?”

그냥 예의상으로 물어본 거였는데, 단테는 의외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말을 들어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듣기가 불편해. 그래 주면 고맙겠군.”

“뭐…… 그래요. 불편하기까지 하시다면야.”

이런 말까지 들으니까 정말 단테가 나를 잊어버렸다는 게 실감이 났다. 며칠 전만 해도 말을 좀 놓아달라면서 안달이었는데.

또다시 존댓말을 쓰게 된 상황이 내심 우습다고 생각하며, 나는 단테의 몸 상태에 관해서 물었다. 아픈 곳은 없는지, 아프진 않더라도 이전과 비교해서 불편한 점은 없는지.

다행히 단테는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냥 오랜 잠을 자다가 일어난 기분이야. 그것 외에 다른 특이사항은 없는 것 같은데.”

“그건 기억을 잃었으니까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닐까요. 저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으니까.”

“너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다고? 그건 무슨 소리지?”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단 잠깐만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보실래요?”

루크가 외상이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역시 두 다리로 서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단테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단테가 내 손을 피해 팔을 뒤로 물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 혼자 일어날 수 있는데, 왜 굳이 손을 잡으려고 하는 거지?”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반 박자 늦게 발을 뒤로 물렸고, 그제야 단테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직접 내쳐지지만 않았지 거부당한 거나 다름없는 손을 혼자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테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감안해도, 평소와 다른 취급을 받으니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했다.

원래라면 내 감정을 가장 우선적으로 챙겼을 단테가, 지금은 나를 살피지 않고 일어나서 방안의 풍경을 둘러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어차피 곱씹어 봤자 해결되지도 않을 거 그냥 무시하자고 생각하며 기분을 환기하는데, 단테가 루크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평상시에 지내던 곳은 그대로인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 * *

D20.

“내가 평상시에 지내던 곳은 그대로인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단테로서는 당연한 말을 뱉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그의 곁에 있던 여자와 그의 비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곧 구석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작당 모의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모습에 단테는 그만 황당해지고 말았다.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들을 계속 기다려주었는데, 속 시원한 결론이 나지 않은 듯 둘 다 미묘한 표정으로 그에게 돌아왔다.

“일단…… 평상시 지내던 곳이라면, 제일 많이 시간을 보내던 곳을 이야기하는 거 맞죠?”

“그렇게 정확히 정의를 해야 하는 문제인가? 일단 그렇지.”

“…….”

여자는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갈색 눈동자가 아래쪽으로 구르고, 곧 하얀 손가락이 자신의 턱 부근을 톡톡 두들기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여자를 지켜보며, 단테는 문득 치솟는 이상한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여자가 아픈 곳이나 불편한 곳은 없다고 물었을 때 전혀 없다고 답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상한 점은 있었다. 기억에 없을 터인, 처음 보는 게 분명한 여자를 볼 때마다 자꾸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져 온다는 것이었다.

아까 손이 닿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어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피하기도 했다. 그 직후 여자가 일순간 지었던 표정에 심장이 낮게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기억을 잃었다는 게 이 여자와 관련해서 벌어진 일인데, 눈앞의 두 명이 지금 당장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단테의 머릿속에서 그럴듯한 추론이 벌어지기 직전, 여자와 그의 비서가 다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에이 님, 역시 그냥 탑주님의 집무실을 보여드리는 게…….”

“아무리 단테가 이런 상태더라도 거짓말은 금방 알아차릴걸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탑주님이 그걸 믿으실까요?”

“못 믿으면 어쩔 거예요. 지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여자의 무덤덤한 말과 함께 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당최 무슨 대화인지 몰라 인상을 찌푸리는 단테를 두고, 그들은 일종의 합의점에 도달한 듯 보였다.

곧 그가 앉아있던 이불을 대충 정리한 여자가-왜 당연하다는 듯이 정리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단테를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저를 따라오시면 될 것 같아요.”

“너를 따라가라고? 넌 마법사가 아닌 듯한데.”

“네, 전 마법사가 아니에요. 그래서 마탑에서 지내고 있지도 않고요. 이 말은, 당신도 마탑에서 지내고 있지 않다는 말이에요.”

단테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마탑주가 마탑에서 지내지 않는다면 어디서 지낸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지는 듯한 기분에 그의 비서라는 이를 쳐다보았지만, 비서는 마치 다녀오라는 듯이 그의 뒤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마음에 정말 여자의 뒤를 따라갔을 때쯤. 마탑의 어딘가에 있는 문을 연 여자가 그대로 문을 통과하자, 곧 처음 보는 집이 그 안에 펼쳐졌다.

단테는 기민하게 이 집과 마탑을 연결하는 것이 자신의 마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저희’ 집?”

“네. 지금 같이 살고 있거든요.”

여자는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해놓고서는 곧바로 집 내부 구조나 소개해주려고 들었다. 단테는 복도를 가로지르려는 여자의 팔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잠깐. 그전에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해줬잖아.”

“네?”

아까 보호자라는 말로 얼버무릴 때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단테는 짤막하게 후회하며, 여자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너랑 나랑은 무슨 사이야?”

“…….”

“무슨 사이이길래, 이렇게 한집에서 지내고…….”

어쩐지 생각한 걸 전부 입 밖으로 내뱉기가 어렵다. 단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나마 말을 이었다.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보호자를 자처하는 거지?”

“…….”

사실 그렇게 물어보기는 했지만, 단테는 어렴풋이나마 무슨 답이 돌아올지에 대해서 예상하고 있었다. 형제자매도 아닌, 겉으로 보기에는 그와 동년배처럼 보이는 이성이 함께 지내고 있다면, 그, 뭐겠어.

게다가 눈앞에 있는 이는 그의 손을 거리낌 없이 잡으려고 들었고, 또 당연하다는 듯이 이마의 열을 재지 않았는가.

그런 행위가 용인되는 관계는, 최소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태거나…… 최대로는 서로를 책임지는 사이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정말 그런 사람이 생겼다고? 그의 기억은 스승의 당부를 무시하던 시절에서 멈춰있었고, 그랬기에 더더욱 지금 상황을 믿기가 어려웠다. 미래의 자신이 머저리가 되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타고난 머리 덕을 톡톡히 봐온 단테는 자신이 머저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고 살아왔었다.

단테는 두려움 반, 알 수 없는 감정 반으로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잠깐.

그녀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곧이어 짤막하게 대답했다.

“집주인과 하숙인?”

“…뭐?”

“다르게 표현하자면 동거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 말끔한 목소리에 허탈함을 느낀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점점 미묘한 표정이 되어가는 단테를 발견하지 못하고, 여자는 또다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하숙인인가……?”

중얼거리는 말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단테는 그 말의 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사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컸더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했을 테지만.

동거인이라는 말을 들은 후 잔잔하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한 충격이 그를 덮친 탓이었다.

아니, 물론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 말이 잘못된 것 같지도 않지만, 뭔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약간 서러운 것 같기도 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에, 단테는 결국 자각도 없이 이런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정말 동거인이기만 해?”

“네?”

“우리 사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는 거냐고.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결국 질문을 끝마치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단테는 점점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였고, 그렇기에 그녀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단지.

“아.”

신경이 쏠려 있지 않았다면 놓쳤을 법한, 아주 작은 웃음소리만 들었을 뿐.

단테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지만, 분명 그곳에 있었을 미소는 이미 입가를 가린 그녀의 손에 막혀 보이지 않았다.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뒤 손을 내리는 행동이 왜 그리도 아쉽게 느껴지던지.

……고개 숙이지 말걸. 아까처럼 출처를 모르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기는 하죠.”

“……그럼?”

“하지만 말 안 해줄래요.”

그냥 적당히 동거인이라고 알고 있으라며, 작게 속삭인 여자가 빙글 뒤를 돌았다.

“저를 잊어버린 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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