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159/181)

12.

D19.

단테는 에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이 들고 있는 책으로 향했다가, 다시 단테에게로 돌아왔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모습은 답지 않게 상대를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네. 말을 뱉는 순간 잊어버렸어요.”

에이가 책의 모서리를 꽉 눌러 잡았다. 손이 상하기 전에 그 책을 부드럽게 빼내면서, 단테는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아. 너무 놀랄 필요 없어. 기억이 돌아오는 과정일 테니까.”

“기억이 돌아오는 과정이요?”

“응. 지금의 너라면 알지 못할 것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오는 거.”

이미 단테는 에이가 먹은 과자가 정확히 무슨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알아냈고, 그렇기에 에이만큼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당황했다면 에이에게도 좋지 않았을 거라며, 단테는 새삼스러운 안도를 남몰래 억눌렀다.

“앞으로 너는 보지 않았던 것에 익숙함을 느끼고, 가지 않았던 곳을 가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럴 때면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나에게 말해줘.”

“저 혼자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굳이 당신한테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럼 내가 그게 뭔지 말해줄 거고, 그편이 네 기억이 돌아오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거잖아.”

그는 에이의 질문에 미약한 상처를 받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에이에게 ‘굳이 당신’이라는 표현을 듣는 것은 생각지 못해서 더욱 아픈 일이었다.

그런 단테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에이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싶다가, 곧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단테가 이야기한 대로 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일이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에이가 단테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럼, 손 한 번만 줘보실래요?”

“갑자기? 왜?”

“이상한 느낌을 받으면 말해달라면서요.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손을 주기만 하세요. 그 말을 들은 단테는 얼떨떨하게 손을 내밀었고, 곧 에이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기억을 잃은 이후 에이가 그에게 먼저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차마 놀람을 갈무리하지 못한 단테는 살짝 움찔거렸지만, 에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놓을 생각 말라는 듯 단테의 손을 더 꽉 잡아 왔다.

“그때 말이에요, 제가 제 친구였다던 사람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

“……응.”

“당신이 상처를 내지 말라면서 제 손을 잡았을 때 위화감을 느꼈거든요. 어, 이 사람 오늘 처음 보는데. 왜 손을 잡는 게 익숙한 것 같지? 하고.”

에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때는 착각이겠거니 하고 넘겼었는데, 지금 잡아보니까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이 와중에도 당신의 온기가 익숙하네요.”

“……그래?”

“네. 그런데 손이 왜 이렇게 뜨거워요?”

그러게, 열이 다 거기로 몰려갔나 봐……. 차마 그렇게 대답하지는 못하고, 단테는 단지 고개를 푹 숙였다. 보지 않아도 자신의 귀가 새빨개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겨우 하루 동안 닿지 못했다고 지금 이렇게 심장이 마구마구 뛰는 꼴이라니. 그도 자기 자신이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에이가 최대한 오래 손을 잡고 있어 주기를 바랄 뿐.

하지만 에이는 매정하게도 단테의 기대를 배반하고 얼마 뒤에 손을 놓았다.

“이대로라면 기억도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지 않을까요?”

에이의 체온이 손안을 가득 메웠다가 사라지는 걸 아쉽게 지켜보다가, 단테는 한 박자 늦게 그 말에 대답했다.

“그러길 바라야지. 확실한 건, 그게 기억을 찾고 있다는 전조라는 거야.”

“기분이 이상하네요……. 또 다른 자아가 내 몸에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인걸.”

“다시 말하지만, 에이. 혹시 머리가 아프다거나 한다면…….”

“바로 당신한테 말하라고요. 알고 있어요. 몇 번이나 들었으니까.”

그만 걱정해도 된다는 듯 에이가 대충 손을 저어 보였다. 몇 번이고 말해도 부족하다는 한마디를 억지로 목 뒤로 넘기며, 단테는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슬슬 다시 반말해줄 생각은 없어? 그거야말로 제일 익숙한 일일 텐데…….”

“글쎄요. 그건 생각을 좀 더 해볼게요.”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알았어.”

단테가 시무룩해 하든 말든 에이는 처음에 자신이 집었던 책을 다시 잡았다.

“제 반말에 집착하지 마시고, 기다리고 계시면 언젠가는 해드릴게요. 기억을 다시 찾기 전에는 말을 놓겠죠, 뭐.”

“그러다가 기억을 다시 찾기 전까지 계속 존댓말을 쓰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에이의 칼 같은 대답에 단테의 얼굴이 다시 불쌍하게 변했지만, 에이는 일부러 책을 높게 들어 올리며 그 얼굴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알았으니 얼굴을 볼 수만 있게 해달라는 말이 있고 나서야, 에이의 팔이 평소처럼 내려왔다.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에이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을 짓는 듯도 했다.

* * *

그렇게 특별한 일 없이 며칠이 지나가고.

단테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그의 곁에 있지 않던 에이가, 웬일인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듯싶더니.

“단테.”

며칠 만에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단테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그의 반응에 에이는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제가 당신을 이렇게 불렀었죠? 당신의 이름으로.”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 거지? 깜짝 놀랐어.”

“네, 아직은. 그래도 전보다는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게 많아요. 제 친구라던 그분도 그렇고.”

에이의 눈동자가 힐긋 단테를 향했다.

“또 당신도 그렇고요.”

단테는 그 말에 감격해 거의 울 뻔했다. 제발 유난 떨지 말라는 에이의 일축을 듣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그는, 발걸음을 옮기는 에이의 뒤에 졸졸 따라붙었다.

“그럼 앞으로 단테라고 불러주는 거야? ‘저기요’라고 부르거나 호칭을 아예 생략하는 게 아니라?”

“그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어요? 계속 느끼는 건데 쓸데없이 머리가 좋으신 것 같아요. ……이 말도 한 적 있지 않나?”

“맞아. 아, 오랜만에 들으니까 기분 좋다.”

이런 말이 뭐가 좋냐며 핀잔을 들었지만, 그는 지금 여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기억을 잃은 에이와의 대화는 가끔 그들이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주곤 했다.

물론 그때의 그는 행복하다기보다는 속절없는 감정에 휩싸여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감정을 자각하던 순간에도 무언가가 완전히 끝난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평소보다도 더 화사하게 웃는 단테를 뒤에 두고, 에이는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하여튼, 제가 당신을 이름으로 부르던 건 맞는 거죠?”

“응.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아뇨, 당신의 태도만 보면 저희가 엄청 사이가 좋은 부부였던 것 같은데.”

에이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톡, 톡 두드렸다.

“그러면 애칭을 사용할 법도 하지 않나, 해서요.”

“……애칭?”

“네.”

“구체적으로 어떤?”

단테가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모르고, 에이는 ‘사이 좋은 부부가 쓸 만한 애칭’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기야’ 같은 거?”

“…….”

“아니면 내 사랑이라던가.”

“…….”

“다른 건 딱히 생각이 안 나는…… 뭐야, 왜 그래요?”

단테가 갑자기 심호흡하며 비틀거리자, 에이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단테는 드물게 에이의 눈길을 피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숨이 잘 안 쉬어져서…….”

“갑자기 왜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건데요? 어디 좀 봐요.”

“잠깐, 조금만 멀어져 줘. 네가 가까워질수록 더 그래.”

“제가 뭘 했다고…….”

뒤늦게 단테의 상태가 왜 그런지 깨달은 에이가 입을 다물었고, 집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설마 방금 애칭을 예시로 든 것 때문에?”

“…….”

“말 그대로 예시였는데요. 직접 그렇게 부른 게 아니라. 아니, 그렇게 불렀어도 그런 반응을 하실 필요는 없는데.”

“내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야…….”

“당신 정말 유난인 거 알죠?”

“……응.”

“알면 됐어요. 나는 도대체 이런 사람을 어쩌다가 데리고 살게 된 거지…….”

그 말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으레 부부들이 하곤 하는 일상적인 한탄에 가까웠다. 단테는 그 말에서마저 기쁨을 느꼈고, 그 기쁨을 눈치챈 에이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혹시 제가 당신한테 많이 못 해줬나요? 이름 하나로, 또 애칭 하나로 당신이 충격을 받을 만큼?”

“충격을 받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이러는 거야.”

“굳이 제 입으로 안 담으려고 그렇게 말한 건데 대신 말해주시네요……. 네, 어쨌든요.”

단테는 그 말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못 해줬다니, 그럴 리 없잖아. 기억을 잃기 전의 네가 더 매정했어도 내가 그렇게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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