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58/181)

11.

이 늦은 저녁에 당연하다는 듯 제안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산책은 남자와 나의 일과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나는 남자를 한번 쳐다보고, 창밖을 다시 보았다가, 다시금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당연히 내가 수락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문 앞에 서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 산책 말인데요.”

“응.”

“꼭 나가야 하는 건가요?”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결국 나가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남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다시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방금까지 누워있어서 그런지 침대 속은 딱 기분 좋게 따뜻했다. 앞을 볼 수 있게 머리만 대충 내밀자, 퍼뜩 정신을 차린 남자가 침대맡으로 다가왔다.

“왜? 산책하기 싫어?”

“음, 네. 오늘은 더 이상 나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네요.”

“원래 이 시간쯤 되면 같이 산책하러 나갔었는데……. 매일 하던 걸 해보면 뭔가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싫어?”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남자는 뒷말을 흐리며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불쌍한 모습을 보며 나는 저 남자가 일부러 저러는 건지, 아니면 타고나길 저렇게 타고난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거의 숨 쉬듯이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고 있잖아. 실제로 단호하게 남자와 멀어지지 못하고 있는 게 내가 계속 저 모습에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기도 하다.

“혹시 제가 산책하는 걸 좋아했었나요?”

“응, 당연하지.”

내 질문에 남자는 자신 있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멀리 나가는 건 싫지만, 집 가까이에서 바람을 쐬러 가는 건 좋다고 했어. 그것도 아니면 순간 이동 마법으로 움직이는 편이 좋다고.”

“음, 그렇군요.”

“……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기보다는, 남자에게 말해두고 싶은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일단 이것만 먼저 말해두자면, ‘저’는 가만히 앉아서 풍경을 보는 걸 더 좋아해요.”

그리고 이건 내 직감이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나도 그편을 더 선호할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어떤 극적인 일이 일어나도 갑자기 움직이는 걸 좋아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산책이 좋아졌다면.

“그러니까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면, 그건 산책 자체보다는 당신과 함께 걷는 시간을 좋아해서일 것 같은데요.”

“…….”

“손을 잡고,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걸어가는 그런 시간이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다소 건조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다른 이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는 했다. 나는 기억이 없으니까.

그러니 남자가 내 말에 다시금 멍한 표정을 짓고, 내가 미는 대로 방 밖으로 떠밀려도 남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산책은 생략할게요.”

“뭐? 잠깐만, 에이.”

“그것 좀 이야기했다고 다시 잠이 오네…….”

나는 혼잣말을 하며 방문을 닫았다. 나를 문 앞에서 애타게 부르는 것 같던 남자가 곧 포기한 듯, 문에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문 근처에 서서 그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고 옆방의 방문이 제대로 닫히는지를 들었다. 사위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침대로 걸어갔다.

오늘 더 나가기 싫었던 것은 정말이지만, 앞으로의 산책까지 미리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산책을 생략하겠다고 말한 건 별거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기억이 없는 나에게 그 사람은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니까. 그리고 낯선 사람과 단둘이 산책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

뭐, 이미 한집에 지내는 이상 의미 없을지도 모르는 생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 낯선 사람이, 뭐랄까…….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애정을 계속 보내온다면…… 누구라도 함께 있는 순간을 피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나는 그동안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 가는 걸 꺼리면서 살아왔고, 그렇기에 남이 나에게 전해주는 감정을 외면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관계가 만들어졌다는 이 시점에서는, 그 남자의 감정들을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오래된 버릇이 자꾸만 머리를 치켜든다.

‘모르는 척해야 해, 그게 아니라면 똑바로 거절해야 해. 이 이상 무언가가 진전되지 않도록.’

이처럼 남자와 함께 있으면 머리가 복잡해지니 될 수 있다면 단둘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면 남자가 적잖이 충격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또 안절부절못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예 들키지를 말아야지.

“…….”

형태 없는 다짐만 계속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저녁이었다. 딱 봐도 2명이 함께 쓸 것 같은 침대를 혼자 차지하고 누워서, 깔끔한 천장이나 하릴없이 구경했다.

복잡한 상념 탓인지, 직전에 낮잠을 잔 탓인지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 * *

그렇게 낯선 집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었을 때.

“음…… 이게 다 뭔가요?”

나는 내 앞에서 싱글거리며 웃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탁자에 가득 올려진 책들도.

어딘가의 높은 직급일 거라는, 그래서 옆에 계속 있지는 못할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남자는 오늘 외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가 봐도 무직은 아닐 것 같이 생겼는데.

혹시 출근을 제멋대로 하면서 부하 직원들을 고생시키는 사람인 건가…….

“네가 그동안 봐왔던 책들이야. 그중에서도 다 읽었거나 읽던 중인 것들로 들고 와봤어.”

남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책까지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내가 건드리면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책 무더기가 남자의 힘으로는 쉽게 밀렸다.

나를 덮칠 듯 다가오는 책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 들고 오실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일단 탁자에 놓인 수많은 책 중 한 권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책인 것 같은 게, 공교롭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 세월 속에서 읽은 책인 듯했다.

어째 이유를 듣지 않아도 남자가 이렇게 책을 한가득 쌓아둔 이유를 알 것 같아져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책들을 보면서 기억을 한 번 되살려 보아라. 이 말인가요?”

“물론, 그래 주면 가장 좋겠지만……. 나는 그냥 네가 책을 좋아하니까…….”

말을 잔뜩 흐리던 남자가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얼굴로 넘어갈 생각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세 번까지는 참아주자 싶었다.

“분명 이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고 이야기해주셨던 것 같은데요. 굳이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나요?”

나는 책을 촤르륵 소리 나게 남겼다가 가름끈이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여전히 이 책을 본 기억은 없지만, 내 예상보다는 꽤 많이 읽었던 모양이다. 썩 관심 있는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한 일이네.

앞부분의 목차로 돌아가 대충이나마 책을 살펴보려던 찰나, 침묵을 지키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와 나의 기준으로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하루하루를 기준으로 본다면 꽤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

“……저와 당신의 기준이요?”

“응.”

우리의 기준이 뭔데?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그 이상 설명을 덧붙여주지 않았다. 당연히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자연스럽게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기억을 빨리 되살릴 수 있도록, 네게 가장 익숙할 것들을 먼저 들고 온 거야. 기억을 잃은 너도 책은 좋아할 거잖아.”

“좋아하긴 하죠……. 그래도 이 책을 하루 만에 다 살펴보지는 못해요. 종일 책만 읽고 싶지도 않고.”

“응, 알았어. 이 책들은 그냥 탁자 위에 올려둘게. 그러니까 살펴보고 싶을 때 와서 언제든지 살펴봐.”

누가 봐도 내가 책을 읽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올 것 같은 동시에, 자꾸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몇 번이고 의식 뒤로 넘기다가 못 참을 지경이 되어서야 내뱉었다.

“탁자 위에 책을 올려두면, 음식은 어디에 두는데요?”

“음식?”

“차와 디저트는…….”

하지만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니만큼 뒷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물자마자 방금 한 말은 그대로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고, 그저 앞에 있는 남자의 표정으로 무언가 이상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너 방금…….”

남자는 눈을 크게 뜬 채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런 남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내가 뱉은 말이 무엇인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죄송한데,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했었죠?”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남자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변했다.

그 순간, 내가 방금까지 보던 책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그건 요리법 모음집이었다. 그것도 디저트와 관련된.

“…….”

나는 먹는 것에 큰 호불호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해오려고 지금껏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왜 이 책이 눈에 띄는지.

그리고 왜 하필 이 책을 먼저 집어 들었는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울렁거림에 가까운, 뭐라도 잘못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요. 제가 무슨 말을 했죠?”

남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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