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밖으로 나서는 마지막까지도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남자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예의상이라도 배웅을 해야 했나 뒤늦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문밖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라더니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나는 남자가 나간 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늘어트렸다.
아무도 모르게 내 몸을 채우고 있던 피곤함이 차츰 빠져나갔다. 짧은 사이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이 집이 내 집이라고.”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려보았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집에 홀로 남겨진 듯 낯설다는 감상만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살던 집은 이토록 좋지 않았는데. 그곳에 불만이 있진 않았으나, 이 집에 있다 보니 정말 초라한 곳에서 지냈다는 실감이 났다.
그동안 나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이런 변화가 생긴 거야?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들은 많은 걸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간략하게, ‘너는 기억을 잃었고, 우리가 만난 곳은 어디며, 우리는 각자 이런 관계다’ 정도만 말해주었을 뿐이다. 그 이상으로 긴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일단 기억 나는 게 없는 내가 궁금한 점을 떠올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예 기억을 전부 잃었으면 내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기라도 하지.
애매하게 몇 년간의, 그것도 그 사람들과 관련되어있을 세월의 기억만 사라지다 보니 더 물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뭣보다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질문은 안 하는 것이 좋다. 그사이에 새로운 친구가 생긴 건 그러려니 하지만, 남편이 생긴 건 아직 믿기지 않는단 말이야.
애인도 아니고 남편이…….
“…….”
나는 소파에 기대는 것도 모자라 아예 옆으로 누워버리며,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안절부절못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히면 곧바로 싸늘해질 것만 같은 인상인데, 나를 볼 때마다 자꾸 눈매를 누그러트려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도 모자라 자꾸 빤히 쳐다보는 게, 누가 봐도 좀…….
나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 같기는 해서.
원래는 같이 지낸다는 이 집에 와볼 생각이 없었지만, 그 얼굴을 보다 보니 믿어도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생긴 얼굴에 넘어간 게 아니고 그냥 느낌이 그랬다.
기억에 없는 사람이지만 나를 누구보다 아끼는 이인 것만 같다는 본능, 또는 직감.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여러 번 살린 것들.
뭐, 반쯤은 그런 얼굴과 함께 사는 기분은 어떤 건지 체험해보려고 따라온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한집에 단둘이 있었던 소감이 어떠냐고?
그냥, 신기하면서도 신선했다. 내 인생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본 역사가 없어서.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주장한 적도 전무해서.
애초에 결혼처럼 평생을 기약하는 약속을 해본 적이 없기도 하지.
나는 소파에 누워 편한 자세를 만들면서, 기억에 없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일지에 대해서 가늠했다.
소중한 사람을 만든 것도 모자라 결혼을 하다니. 사람들과 멀어지고 마을에서 동떨어져서 살던 이유가 뭐였는데.
나를 떠날 사람들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앞으로 먼 미래에 내게 닥쳐올 후회가 선명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의 고통을 다시 느끼리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어졌다.
나는 다시 한번, 그동안 나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이런 변화가 생긴 건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던 ‘나’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나 자신에게 의문을 가질 때 비로소 기억을 되찾는다는 동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답이 없는 일을 마주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갑갑함에 가까운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우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뒤덮기 전, 나는 그것들에게서 도망치기를 택했다. 집에 사람도 없겠다, 푹신한 곳에 누워있기도 하겠다. 생각을 멈추고 잠이나 자기로 한 것이다.
피곤함은 진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잠에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온몸에 힘을 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곧 깜깜한 밤이 찾아온 것처럼 어둠이 내 눈앞을 덮었다.
* * *
꿈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네 옆에 있을게.
네가 불안해하지 않을 때까지, 나만은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될 때까지 계속.
그의 등 뒤에는 언젠가 본 것만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 * *
“에이.”
얕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절로 다시 잠이 올 정도로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직 잔존해 있는 나른함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데, 그와 동시에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슬슬 일어나야지. 아니면 밤에 잠을 못 잘 거야.”
“……내가 못 자든 말든 무슨 상관…….”
“지금 잠꼬대한 거야?”
작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어느새 내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그 손길을 피했다.
몇 번을 더 피하고 나서야 이제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듯, 손길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알았어, 더 자. 나는 옆방에 있을 테니까 혹시 필요하면 부르고.”
“…….”
“잘 자, 에이.”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 옆방에 있겠다고 말하는 거지?
너는 보통 내 곁에서,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나…….
그 순간, 나 스스로가 한 생각에 지레 놀라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깼어?”
“…….”
“표정이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또 존댓말…….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남자는 내버려 두고, 나는 방금 전에 내가 한 생각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잠결에 스쳐 간 생각이라서 제대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버릇처럼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는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내게로 다가왔다.
“혹시 머리 아파? 일어나서부터 아프기 시작한 거야?”
“아, 아니요. 머리가 아프지는 않아요. 그냥…….”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지만, 확실하지 않은 거라도 일단 이야기해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내 보호자는 저 남자니까.
“잠결에 뭔가 생각했는데, 일어나니까 제대로 기억나질 않아서요. 별거 아니에요.”
“그럼 아픈 건 아닌 거지? 혹시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해야 해.”
“네, 그럴게요.”
감기에 걸린 어린아이라도 된 느낌이다.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참 유난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지? 돌아오니까 소파에서 자고 있어서 놀랐어.”
“어, 그러고 보니까…….”
“맞아, 여긴 침실이야.”
남자가 내 손을 붙잡으려는 것 같다가, 곧 어색하게 손을 물렸다. 나는 남자가 주먹을 꽉 쥐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알아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까지 옮겨주신 건가요? 감사합니다.”
“……일일이 감사하다고 할 필요 없어. 아니, 하지 말아줘.”
“왜요?”
“거리감 느껴져서 별로란 말이야.”
남자가 우울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이 정도 거리감도 가깝다고 생각하는데요.”
“…….”
“아니, 그렇다고 울상 지을 필요까진 없으시고요.”
이렇게 한마디 한마디에 충격을 받아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된다. 내가 한숨을 푹 쉬자, 표정을 원상태로 되돌린 남자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그럴 때마다 예전에 한 번 거절당했을 때가 떠올라. 그래서 자꾸 과민반응하게 돼.”
“거절당하신 적이 있다고요?”
“응. 그것도 엄청 매정하게.”
남자는 ‘매정하게’에 강조를 주며 말했다. 내가 기억이 있었다면, 그리고 양심이 좀 남아있었다면 미안함을 느낄지도 몰랐으나, 지금의 나는 두 가지 다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거절당할 이유가 있으셨겠죠. 딱 한 번만 거절당한 걸 위안으로 삼으세요.”
“……기억을 잃어도 에이는 에이구나.”
“당연한 말씀을.”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기지개를 쭉 켰다.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지고 있는 게, 늦은 오후를 지나 벌써 저녁때인 것 같았다.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간다.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10년 전에 멈춰진 그대로였다. 자다 깨면 무언가 바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기억이 자연적으로 돌아올 기미는 없어 보이니, 정말 머리라도 얻어맞아 봐야 하나. 아, 그것도 아니면 마법사라던 이 남자가 해결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아까 처음 상황을 설명할 때, 기억은 민감한 부분이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이야기해준 것 같은데.
그때, 가만히 나를 지켜보는 것 같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더 자고 싶어, 에이?”
“음…… 아니요. 왜 그러세요?”
남자가 나를 향해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잠깐 산책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