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D16.
밤이 하염없이 깊어져 가는 시간, 단테는 안절부절못하며 혼자서 마루를 뱅뱅 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에이 때문이었다. 물론 술은 마샤의 집에서 마신다고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곳에서 한 밤을 자고 온다고 했으니 별일이 있지는 않을 테지만,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였다.
먹고 죽을 만큼 술을 마시겠다니.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에이는 본인 입으로 술을 잘 마신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살짝 상처만 내면 술 취하기 전으로 돌아올 테니까. 특별히 실수하는 일은 없을 거야, 단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실수하고 돌아와.’
정말 작은 흠집이라도 생기면 몸이 본래 상태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그 사실을 매우 잘 써먹고 있는 에이였다. 하지만 단테는 에이가 본인의 상처에 대해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 걸 싫어했고, 차라리 술을 깨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하며 그녀를 보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부탁했더라도 그녀가 단테의 당부를 지켜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단테는 혼자서 잠들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데리러 가야 하나 고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밤중에 남의 집 문을 두들기는 건 좀 그런가? 그러면 순간 이동으로 몰래 들어갈까? 마샤가 알았다면 기함할 생각을 하며 단테는 고민을 계속했다. 몰래 들어가서 에이만 빼 오면 되지 않을까?
지금쯤이면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 빼 오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일단 밖에 나가서 마저 생각하기로 한 단테가 외투를 챙겨 입었을 때.
그의 왼손 약지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휘감아 도는 것이 느껴졌다.
에이가 반지에 새겨진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단테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고, 동시에 누군가가 그의 등을 껴안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상황에서, 아니, 이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를 껴안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에이.”
“응.”
“마샤 집에서 한밤 자고 온다면서, 어쩌다 집에 온 거야?”
그렇게 말하는 단테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났다. 안 그래도 데리러 갈까 말까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반지에 새겨준 마법을 사용해 돌아오다니.
하지만 기쁜 감정은 얼마 가지 않았다. 어쩌면 에이가 그곳을 벗어나야 할 만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사람은 어땠어?”
“누구?”
“누구긴. 마샤랑 결혼할 거라던 사람 말이야.”
짧게 들려오는 에이의 목소리는 다소 멀쩡하게 들렸다. 정말로 상처라도 내고 술에서 깬 뒤에 돌아온 걸까? 불안한 마음을 못 이겨 단테가 뒤를 돌려던 찰나, 그를 껴안은 에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압력에 단테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에이의 팔 힘은 여전했다.
단테를 자신의 팔 안에 단단히 가둬둔 채로 에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 사람? 마샤가 골랐으니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내 상상보다 훨씬 멀쩡했어. 수줍음이 많다고 마샤가 설명할 때는 안 믿었는데 정말이더라.”
“수줍음이 많았다고?”
“응. 직업은 요리사래.”
어쩌다 둘이 만나게 됐는지, 정확히 며칠째 만나는 건지까지 다 들었어. 숫제 단테의 등에 얼굴을 파묻을 것처럼 그를 껴안은 에이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렇게 보면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평소와 같다. 단테는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 싶어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러면 거기서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닌 거지?”
“뭐……. 그냥 셋이서 잘 놀고 왔는데? 그 사람, 빨리 취하긴 했는데 뭘 물을 때마다 정석적인 대답만 해서 재미없었어.”
“재미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온 거야?”
“응?”
“원래 한밤 자고 온다고 했잖아. 갑자기 지금 돌아온 이유가 재미가 없어서냐고.”
단테의 말에 에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네가 아니라 내가 왔어?”
그 말에 단테는 깨달았다. 취했구나.
그러고 보니 외투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평소보다 높은 것도 같았다. 단테는 당황스러움 반, 기대감 반으로 다시금 몸을 돌리려 들었다.
처음에는 단테를 계속해서 꽉 잡아 누르는 힘이 느껴졌지만, 곧 자연스럽게 팔이 스르르 풀렸다. 단테는 혹여나 에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한쪽 손목을 잡고 뒤를 돌았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서 있는 에이는 언뜻 보기에 술에 취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의 모든 것을 아는 그의 눈으로는, 그녀의 뺨이 조금 상기된 채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드물게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화낼 만한 일이 있어도 얼굴을 잘 붉히지 않는 에이다. 에이와 가장 오랜 시간 함께 있는 단테조차도 에이의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을 목격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무 말도 없이 단지 가만히 서 있는데도 에이의 뺨은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술에 취한 게 분명한데, 표정 하나만큼은 평소와 똑같다는 사실이 단테에게는 매우, 매우 귀엽게 다가왔다.
차마 숨기지 못한 웃음기를 목소리에 듬뿍 담으며, 단테가 에이의 손을 잡았다.
어떤 방해도 없이 손이 맞닿자 그 뜨거운 체온이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에이?”
“음.”
에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적어도 그 두 사람은 완전히 쓰러트릴 만큼.”
“……아하. 이기고 돌아왔구나?”
“응. 완전히 이겼지.”
단테의 말에 맞장구친 에이가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어느 대회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온 사람처럼.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단테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에이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를 품에 안으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평소와는 달라진 체향이 그저 좋기만 했다. 그 포옹이 불편하다는 듯 에이가 버둥거리는 게 느껴졌으나 단테는 에이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계속 껴안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손으로 단테의 이마를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바늘 같은 거 없나…….”
“바늘?”
“응. 그걸로 손을 살짝 찌르면 정신이 돌아올 텐데…….”
뒤늦게 졸음이 몰려오는지 에이가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단테는 없던 잠도 달아났기 때문에, 에이의 두 손을 맞잡으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네가 마샤 집에 가기 전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나?”
“음……. 다치지 말라고.”
“그래. 난 네가 아픈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런 건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에이가 불만을 내뱉으며 꿍얼거렸지만, 단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여러 번 이야기하고 또 속상한 모습을 보여준 탓에 에이가 자신의 몸을 험하게 다루는 빈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잔상처를 당연하게 여기는 습관은 여전했고,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더 열심히 말해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꾸준히 이야기해주면 되겠지. 그들은 ‘오래도록’ 함께 있을 테니까. 다시금 행복해진 단테가 에이를 껴안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에이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귓가에 뜨거운 입술이 살짝 스친 순간, 단테는 에이의 허리를 붙잡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런 단테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졸리고 나른한 목소리가, 그래서 더 낯뜨겁게 느껴지는 음성이 그의 귓가에 곧바로 흘러들어왔다.
“단테.”
“……응.”
“이제야 생각났는데, 친구들이 예전에 내 술버릇이라면서 알려준 게 있었어.”
사실 단테는 도저히 그 말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겉보기로나마 얌전히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뭔데?”
“하나는, 술에 취해도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거고.”
핑핑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작은 깨달음이 스쳤다. 아, 그래서 이렇게 집에 돌아왔구나.
“두 번째는 과할 정도로 솔직해지는 거야.”
“…….”
“그 술버릇 때문에 실수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지만. 이렇게 솔직해진 김에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막 생각났어.”
그렇게 말한 에이가 장난처럼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사랑해, 단테. 너도 알고 있지?”
“…….”
“매번 좋아한다는 말만 열심히 한 것 같아서. 아니, 그것도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많이 했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한 에이가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잘 자, 하는 인사말을 남긴 그녀는 결국 단테의 품에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에 잠이 완전히 달아난 단테는, 술에 취한 사람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그 밤을 힘겹게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