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149/181)

2.

E2.

엘리나가 그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너무 늦어 있었다. 잭은 여자에게 달려든 것도 모자라,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들었다. 대체 무엇을? 지금 이 상황에서 꺼낼 만한 게 뭐가 있다고?

그때, 엘리나의 머릿속에 과거의 편린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한테 받은 단검이야. 호신용으로 가급적 들고 다니랬어. 요새 마을에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고…….’

‘잭!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괜찮아, 이래 보여도 나도 검을 조금은 배웠다고. 그리고 품속에 단단히 숨겨놓을 테니까 안심해!’

검이라는 소리만 듣고 겁을 집어먹었던 엘리나와, 그녀를 앞에 두고 큰소리를 떵떵 치던 잭.

그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엘리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잠깐만, 잭! 그분은……!”

하지만 잭은 엘리나의 비명을 듣지 않은 채 무작정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날붙이를 보고, 엘리나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순간.

- 쨍그랑!

“아.”

무언가가 공중으로 튕겨 나가는 소리가 나고, 신음인지 감탄일지 모를 것이 들렸다. 엘리나가 슬며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시야에는 가장 먼저 바닥에 넘어진 잭이 들어왔다.

그리고 잭의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여자도.

“세게 넘어졌나요? 갑자기 뭔가를 휘두르시길래 저도 모르게.”

“…….”

“어…….”

“여러모로 환영 인사가 격하시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여자가 잭의 공격을 막은 것 같았다. 아니, 막은 게 틀림없었다.

엘리나는 멍하니 둘을 번갈아 보다가, 여자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묘한 빛으로 반짝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빛은 엘리나가 제대로 시선을 고정하기도 전에 금세 사그라들었지만, 분명 그전까지는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런 작은 반지에서 어떻게 빛이 난 거지? 엘리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무심코 시선을 내린 순간, 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한두 방울의 핏자국을 발견했다.

“…….”

엘리나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며 다시 위로 올라갔다. 부디 아니길 빌었지만, 여자의 팔에는 반 뼘 정도의 예리한 것에 베인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를 보자마자 엘리나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줴뜯고 펄쩍 뛰었다.

“어떡해! 다치셨, 아니, 괜찮으신가요?!”

“음, 네. 저는 괜찮아요.”

“이걸 어쩜 좋아! 잭, 너 나자빠져서 뭐 해! 빨리 일어나! 아니, 잭이 문제가 아니지. 어떡해, 너무 죄송해요!”

“정말 괜찮아요. 막기는 제대로 막았는데, 제가 괜히 칼을 저 멀리 튕겨내다가 생긴 거라.

여자의 태도만 보면 다친 사람은 오히려 엘리나인 것만 같았다. 그 태도에 더욱더 안절부절못하게 된 엘리나는 급기야 손도 대지 못하고 여자의 주변만 뱅뱅 돌기 시작했다.

벽난로 불에만 의지하고 있었기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정말 스치듯이 생긴 듯한 모양이었고, 얇은 상처에서 흐르는 핏방울만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벼운 상처인 건 상처인 거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되레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엘리나는 매우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아무도 없던 한밤중에 우릴 데려와 주셨는데, 심지어 잭은 내가 흘리듯 한 말을 듣고 구해와 주신 건데. 이렇게 상처를 입히면…….

온갖 불안한 상상에 사로잡히는 엘리나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여자의 심드렁한 말이 귓가에 와 닿았다.

“어차피 금방 나을 거고.”

……그리고 그 순간, 여자의 팔에 있던 상처가 스르륵 사라졌다.

정말 여자가 이야기한 대로, 상처가 금방 낫는 모습이었다. 그 ‘금방’이라는 게 너무 빨라서 문제였지.

엘리나는 잠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가, 여자의 팔에 무심코 고개를 가까이했다가, 아까처럼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상처가…….”

“네.”

“상처가 없어졌어요!”

누구는 너무 놀라서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시종일관 차분한 낯이었다. 아니, 조금 곤란한 기색인 것 같기도 하고.

여자는 상처가 있던 팔을 슬그머니 뒤로 빼면서 말했다.

“음, 사실 처음부터 상처가 없었어요.”

“뭐라고요? 아니,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분명 잭의 칼에 팔이 베이셨는데! 그래서 피가 났었는데!”

“착각이에요.”

“그런 걸 어떻게 착각해요?!”

아니, 게다가 아까 상처에 대해서 본인 입으로 직접 언급하셨잖아요! 엘리나가 그렇게 외치자, 갈색 눈동자가 옆으로 한 번 굴렀다.

“벽난로 불에 비쳐서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그 성의 없는 변명에 맥이 탁 풀리던 것도 잠시, 여자가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 잭의 칼을 주웠다.

“하지만 이 칼은 압수할게요. 남편이 왔을 때도 휘두를까 봐 겁나네.”

“아, 그. 정말 죄송합니다…….”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상처도 금방 없어졌, 아니, 애초에 상처를 입은 적도 없으니까.”

봐, 본인도 상처가 없어졌다고 말하네. 엘리나가 혼자 꿍얼거리기도 전에, 여자가 혼잣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말하지?”

“네?”

“곧 남편이 돌아올 텐데, 비명은 왜 질렀냐고 물으면 뭐라고 말하죠?”

쟤, 저랑 살면서 괜히 눈치만 늘어서 어물쩍 넘어가지는 못해요.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여자를 보고, 엘리나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사람 방금 다친 건 벌써 잊은 건가?

어떻게 가벼운 타박조차 하지 않고, 남편이 왔을 때 뭐라고 할지만 고민하는 거지? 태도가 특이하다 못해 이상해서 자꾸만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저 모습은 마치, 상처를 입는 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가.

엘리나는 생각을 더 이어가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분의 태도가 뭐가 됐든 엘리나가 지레짐작하는 것은 실례이고, 무엇보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를 일깨웠기 때문에.

“제, 제가 잭이 갑자기 일어난 것 때문에 놀라서 그랬다고 하면…….”

“그것도 괜찮은 변명이긴 한데요. 아, 이렇게 말하면 되겠다.”

여자는 방금까지 잭이 누워있던 침대 가까이 다가가더니, 곧 천으로 손을 감싸고 무언가를 줍기 시작했다. 엘리나가 여자의 곁으로 다가가 무엇을 하는 건지 살펴보자, 어느새 여자의 손에는 깨진 약병 조각이 들려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것 때문에 놀란 것도 있고, 약병이 깨져서 놀란 것도 있다고 말하죠. 그럼 여러 번 비명 지른 것도 설명되니까.”

“……정말 죄…….”

“죄송하다는 말도 이쯤 하시면 좋겠어요. 굳이 사과를 받는다면 오히려 이쪽 분한테 받고 싶은데, 다시 기절하신 것 같네.”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정말 쓰러진 자세 그대로 다시 기절한 잭이 보였다. 엘리나는 걱정이고 나발이고 잭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여자에게 죄송하다는 말 대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감사한 일이 너무 많아 많은 것이 축약된 인사였지만, 여자는 관대하게 그 인사를 받아들여 주었다. 덤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편하게 부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특이한 이름이었다. 동시에 흔한 글자기도 했고.

“그럼…….”

에이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엘리나가 수줍게 그런 말을 꺼내려고 했을 때, 직전의 소동으로 닫혔던 방문이 다시금 열렸다.

문이 달칵거리며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장신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이.”

“아, 단테.”

엘리나는 별생각 없이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흑발이지만 벽난로 불에 비쳐 언뜻 보라색을 띠는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혼자 등 뒤에 커다란 빛 하나를 가지고 다니는 듯한 미남이었다.

여전히 방은 어두웠으나 남자의 주변 풍경만 환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눈동자는 여태껏 본 적 없는 색으로 신비롭게 반짝거렸고, 남자가 방안을 둘러볼 때마다 흔들리는 보라색 귀걸이 또한 마치 한 몸처럼 남자에게 잘 어울렸다. 키가 크기는 또 어찌나 큰지, 평소에도 친구들 사이에서 약간 자그마한 축에 속하는 엘리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야 했다.

잘생긴 얼굴에 면역이 없었던 엘리나는 일순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남자가 입을 열자 이번에는 또 다른 의미로 온몸이 굳었다.

생김새와 더불어 목소리까지 아름답다는 사실은 신경도 안 쓰일 정도였다.

“아까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소리는 왜 질렀어?”

역시. 아까 에이가 말한 대로 왜 비명을 질렀냐는 질문이었고, 에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태연한 낯으로 대답했다.

“이분이 갑자기 깨서 놀라셨는지 약병을 쏟았거든.”

“아.”

남자가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엘리나는 어쩐지 안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에이의 말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었지만-이분이 갑자기 깨서 놀랐는지 ‘무기를 휘둘렀고’ 그러다 약병을 쏟았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거짓말은 아니었고, 눈치가 늘었다던 남편도 의심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분이 남편이겠구나. 엘리나는 에이가 자신의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어쩐지 자신이 즐겨 읽는 소설의 삽화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야,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결혼까지 했다면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걸…….

잭이 칼을 휘두를 때의 긴장이 이제야 풀리는 건지, 아니면 그냥 로맨스 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건지. 엘리나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몽롱함에 사로잡힐 때쯤, 이야기를 끝낸 에이가 엘리나를 돌아보았다.

“저분은 남편이 다시 침대에 올려준대요. 그건 그렇고, 어쩌다가 저희 앞에 쓰러지셨는지 이제 여쭤 봐도 될까요?”

“아, 네, 네!”

잔뜩 기합이 들어간 탓인지 자연스럽게 큰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에이는 그렇게 얼어붙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사람들을 다시 떠올리자마자 흐르는 긴장감은 엘리나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자신의 사정을 모조리 다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마법사를 불렀고, 어머니가 차도를 보이는 것 같자 기쁜 마음에 지인들에게도 마법사를 소개해줬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소원을 들어주는 방식이 엉터리라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저기 누워있는 친구가 그 마법사를 향해서 사기꾼이라고 외치자마자 공격을 받았다는 말로 끝이 났다.

그 일들을 전부 풀어놓다 보니 엘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씩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도망칠 때도 울지 않았던 그녀였는데.

“도, 도망을 치다 보니까 이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소리를 질러도 못 들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저희를 발견했군요.”

“네, 네.”

목이 메어 말을 더 잇지 못하는 엘리나에게, 에이는 손수건을 한 장 건네주었다. 염치 불고하고 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엘리나는 계속해서 울먹거렸다.

“제가 그 사람을 왜 믿었을까요? 마법사는 뭐든지 할 수 있다니,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본인이 마탑 소속 마법사라길래 뭔가 다른 줄 알고…….”

그 순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 쪽이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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