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R3.
마물이 수도 곳곳에서 나타났던 그 날 이후, 루크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일단 마탑의 주인이 정신을 차린 게 그 첫 번째였다. 그의 상사는 루크에게 변질자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며, 마법사들에게 다시금 예전의 마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수도에 자리 잡은 것에 익숙해져 가던 마법사들이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당황이 가시자마자 다들 쌍수를 들며 기뻐했다. 수도에 있는 마탑은 ‘진짜’ 마탑보다 좁고 불편하다는 것이 기쁨의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루크는 기뻐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혼자 심란해하며,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가늠했다. 마탑이 수도에 위치하는 일에 소위 말해 윗분들의 많은 합의와 의사가 오갔던 만큼, 마탑의 마법사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에도 응당 복잡한 머리싸움이 뒤따라와야 했으니까.
그러나 그가 긴장했던 것처럼 일에 깔려 죽는 일은 없었다.
‘탑주님, 이건……?’
‘황태자가 보낸 문서. 지금 당장 읽어봐.’
‘……!’
루크의 상사가 그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고 돌아온 덕분이었다. 평소 루크에게 거의 모든 것을 시키던 태도는 어디 가고,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한 채로!
과로에 익숙해졌던 루크는 돌변한 상사의 태도에 바보처럼 입을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처리하는 게 더 빠르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실제로 모든 일은 마탑주의 권한으로 처리하는 게 더 빠르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모든 일을 자신의 비서에게 떠맡겼단 말인가?
……사실 루크는 그 까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이유 중에 또 다른 한 가지인, 상사의 곁으로 돌아온 부인분 때문이었다.
“오늘 에이한테 일 열심히 하고 왔다고 말해야겠다.”
지금도 보아라. 옷을 챙겨입으면서 중얼거리는 말이 또 부인분과 관련된 말이 아닌가.
루크는 혹시 그분이 탑주님께 일은 안 하냐고 물어보기라도 한 건지 궁금해졌지만-놀랍게도 정답에 근접했다-현명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물을 용기도 없거니와, 탑주님의 부인은 자신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던 탓이다.
다시 만난 날 정체가 어떻게 되시냐며 의심했던 과오가 남아있기도…… 하고.
막간을 이용해서 잠시 덧붙이자면, 탑주님의 부인분은 마탑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해 들은 말로는 부인분이 소박한 취향을 가지고 계셔서 마탑 같이 넓은 곳은 싫어한다나, 뭐라나.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만, 한번 만난 이후로 다시는 보지 못한지라 물어보는 시늉도 낼 수 없었다.
어, 그런데 한 번이라도 직접 찾아가서 의심했던 일에 대해서 사과드려야 하는 거 아닐까? 루크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단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에 에이가 마탑으로 오는 일이 있다면, 다른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뭐든 다 좋다고 대답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이가 너를 걱정하는 모양이니까.”
“네? 걱정 말씀이십니까?”
“업무 환경…… 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던데.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군.”
아마 부인의 말을 허투루 들었을 리는 없었으므로, 높은 확률로 남에게 옮기기 싫은 말이었던 게 분명했다. 예를 들면 잔소리라던가.
그러나 잔소리를 들은 사람치고는 얼굴이 밝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었다. 여전히 부인 사랑이 지극한 그의 상사는, 오늘도 아무 인사도 없이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방금까지 부인분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쪽으로 가신 거겠지. 루크는 더 이상 아무도 없는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서류 몇 장을 챙겼다.
‘도대체 나는 언제쯤 연애를 해보나…….’ 따위의 서글픈 생각과 함께였다.
* * *
“못 해.”
“에이!”
거의 반사적으로 한 대답에 마샤가 나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말로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을 한 번 더 하는 대신 잠깐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마샤는 멀어지려는 내 팔을 꽉 붙잡고 설득인 듯 협박인 듯, 어쩌면 둘 다인 말을 계속 내뱉었다.
“그렇다고 내가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갈 수는 없잖아.”
“애초에 그냥 인사 같은 걸 하지 않으면 되는 문제 아닐까? 감사하다는 말 같은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나도 원래라면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르잖아!”
다른 것도 아니라고 네 친구라고 특별 대우를 받았는걸! 마샤가 또 목소리를 높이기에, 나는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나른하게 잠이 몰려오는 오후 시간, 졸음도 깰 겸 마샤의 집에 놀러 왔다가 계속 곤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실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마샤의 꾸준한 부탁과 내 거절로 이루어져 있기는 했다.
아까부터 계속 이어져 온 마샤와 나 사이의 논쟁 아닌 논쟁의 바탕은 대충 이러했다. 마샤의 집이 마물로 엉망이 된 만큼 보상금을 얼마 정도 받기로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이 보상금을 전달하는 것도 모자라 알아서 집을 싹 고쳐주고 갔다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서 물어보니 그 사람들이 나를 이유로 든 모양이었다.
분명 호의를 베푼 사람은 아마 높은 확률로…… 릴리겠지. 직접 보지 않아도 이반이 릴리에게 마샤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말을 들은 릴리가 온화하게 웃는 모습도.
집이 다 고쳐진 이후로 마샤는 꾸준히 황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릴리를 만나려면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인 줄 아는 사람이 들으면 ‘거긴 너희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라고 말해줬을 테지만.
“너라면 가능하잖아. 정확히 말하면, 마탑주의 아내인 너라면.”
“가능하다고 해서 그런 데를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왜? 나는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가 돼서 높으신 분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다른 직원들을 우르르 끌고 황궁에 당당히 들어가 보는 게 소원인데!”
“상당히 꿈이 구체적이구나, 너.”
원래 꿈은 구체적이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외친 마샤는 내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도록 나를 소파에 앉혔다. 원래 마샤 집에 있던 소파보다 훨씬 푹신한 게, 마샤가 이렇게까지 고마워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분명 소파만 좋은 걸로 바뀐 게 아니라 살림살이란 살림살이는 전부 번쩍번쩍해졌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내가 릴리를 찾아가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나는 내 어깨를 꾹 누르는 마샤의 손을 잡고 침착하게 말했다.
“마샤, 나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내가 황궁에 들어가면 마탑주의 아내라는 걸 들키든 안 들키든, 어떻게든 구경거리가 될걸.”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오히려 하녀인 줄 알고 관심을 안 줄 수도 있어.”
“넌 친구를 하녀로 만들면서까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어이없어하며 고개만 뒤로 돌리자, 내 등 뒤에 서 있던 마샤가 수줍어하며 기어이 본심을 꺼내놓았다.
“사실 네가 황궁에 들어가면 옷을 맞춰야 하니까 우리 가게에서 맞추게 하려고…….”
“야, 됐어. 나 이제 집에 간다.”
“잠깐만! 가더라도 이 말만 듣고 가!”
냉큼 일어나서 문으로 향하는 나를 마샤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눈을 살짝 흘기며 돌아보니 한 번만 봐달라는 듯 웃는 모습에서 누군가가 겹쳐 보였다.
이젠 하다 하다 단테한테까지 내숭을 배우는 건지. 내가 한 번만 봐준다는 듯 자리에서 멈춰서자, 마샤가 실없이 웃으면서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야. 혹시 정말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되거나, 네가 황궁에 들어가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내가 정말 감사해하고 있다고 꼭 좀 전해줘. 응?”
“당연히 전해주기야 하겠지만, 난 네가 왜 그렇게까지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돼.”
“인사도 할 겸 높은 분께 예의 바르게 보여 눈도장도 찍어 보려는 거지. 아무튼 잘 가! 내일 또 보자!”
또 다른 본심이 있었구나. 일부러 들으라는 듯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니, 마샤가 장난스럽게 내 등을 떠밀었다.
안 그래도 슬슬 단테가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대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구름 몇 점 없는 하늘이 마냥 맑기만 한 게, 저녁때까지도 날씨가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늘도 구경하고 풍경도 구경하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키가 커다란 게 모른 척하려고 해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단테 덕분에 저만한 키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단테가 저렇게 집에 안 들어가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테고. 그럼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가늠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마주치지 않은 사이에 머리가 길어진, 여전히 냉랭한 눈을 한 사람.
“…….”
“안녕하세요, 케이드 씨.”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