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 (142/181)

142.

처음에 휘말릴 때는 소용돌이 안으로 떨어지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 발이 온전히 땅에 닿는 순간 이곳은 소용돌이 안이 아닌 완전히 다른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물들이 이런 조용하다 못해 평화로운 숲에서 몰려나오지는 않았을 테니.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나무가 빼곡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숲이었다. 아스라한 오후의 햇빛이 나무 사이를 비스듬히 비추고, 발아래에서는 아직도 생생한 풀잎이 밟혔다.

어딜 보나 소용돌이를 향해 손을 뻗은 결과로 나올 만한 장소는 아니다. 분명 그 사이에 손을 뻗었을 때, 소용돌이가 마구 일그러지는 걸 보았는데……. 그게 내 착각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 결과로 이런 곳에 오게 된 건지.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만 계속 깜빡이던 찰나, 어디서부터인가 작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 멀리서 들려오고 있지만 그건 분명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소리였다. 그 누가 들어도 숨의 주인이 급박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려주는 듯한 소음에, 나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서야 나는 어느 한 곳으로 점점이 이어지는 핏자국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나간 자리가 붉다 못해 검게 물들 정도로 출혈량이 많았다. 피가 유독 많이 쏟아진 곳 근처에 흙이 마구 흐트러져있는 것을 보니, 위태롭게 걸어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분명 핏자국만 확인해서는 이 부상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게 맞다. 추측할 단서도, 넘겨짚을 증거도 아무것도 없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 심하게 다쳐 있을 한 사람을 알았고,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그놈이 있는 장소로 와있다는 걸.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이곳에는 나와 그자 둘뿐이라는 걸.

마치 내게 길을 보여주듯 끊이지 않는 핏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어렵지 않게 나무에 기대앉은 몸뚱어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기묘한 색으로 빛나는 마법진 위에 앉아있었다. 마치,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마법을 시전한 듯이.

“…….”

내 일상을 해친 자와의 대면은 생각보다도 더 고요하게 이루어졌다.

풀벌레 소리조차 나지 않는 풍경 속에서 단지 내 팔을 스쳐 가기만 하는 바람, 구름이 해를 가리는 데로 만들어지는 그림자. 빼곡한 나무 아래 어두워지는 사위에서 나는 남자를 조용히 응시했다.

남자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마주 보았다.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한 점 물러섬이나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태가 위급해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입을 여는 일에는 망설임이 없는 모습까지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마치 내가 자네 부모의 원수라도 된 것 같군.”

남자가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건물이 무너지던 순간에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는데 말이야.”

“기쁜 것처럼 말하네?”

“기쁘지, 그럼.”

크게 웃음을 뱉으려는 것처럼 이어지던 목소리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대로 끊긴다. 남자가 숨을 고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남자의 아래에 있는 마법진이 그 숨소리에 따라 일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위태로워질수록 마법진의 빛이 강해지는 듯한 모습이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미소를 덧그리며 손으로 마법진을 쓸었다.

“내 생애 마지막 마법이 이게 될 줄은 몰랐지. 하지만 한 점 후회는 없어.”

“그게 무슨 마법인데?”

“글쎄. 무엇이든 내 생명을 불살랐다는 건 변함없군.”

그렇게 이야기한 남자가 아, 하며 가식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이럴 때는 자네가 참 부러워. 아무리 불살라도 꺼지지 않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나.”

“…….”

“내가 터트린 폭탄 속에서도 자네는 살아남았지, 결국.”

여기까지 오니 도발도 서슴지 않겠다는 걸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죽음을 입에 담고, 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말이 나온 김에 소감 한마디 듣고 싶군. 폭탄이 터져서 죽을 때 무슨 기분이었나?”

“……무슨 기분이었냐고?”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물어보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어.”

그 비아냥에 가까운, 가쁜 숨소리가 섞인 말을 들으며 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자의 입에서 그 순간이 언급되니, 내 의지를 벗어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온몸이 터져나갔을 때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를 자세히 떠올리는 것은 내가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만 짐작할 뿐이다. 아, 그때 나는 고통스러웠겠구나.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하던 사람들, 내 평화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겠구나.

그 모든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던 당신이 밉다. 그리고 또 그런 일이 있을까 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불안을 없애고 싶었다.

“네가 궁금해하는 걸 내가 말해줄 리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아, 혹시 한 줌이라도 자비를 베풀어주나 했지. 하지만 아무래도 미움을 단단히 샀나 보군.”

더 말하면 정말로 자네가 분노하는 모습을 볼지도 모르니 이쯤 할까. 남자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덧붙이더니, 그제야 본론을 꺼내놓았다.

“나는, 수도에 날뛰는 마물들을 거둬들일 방법을 알고 있어.”

남자의 헐떡임이 갈수록 더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나에게는 그저 지독하게만 비쳤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나를 살려둬야 할 거야.”

“네가 풀어놓은 마물들의 약점이 그것들에게 박아놓은 마석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아, 그건 이미 눈치챘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걸.”

일일이 해치우고 다닐 것도 아니지 않냐며, 남자의 웃음소리가 킬킬대며 울렸다. 그러나 내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 소리도 점차 줄어들었다.

다시금 사방이 조용해졌을 때쯤이 되어서야,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살려둘 이유가 없다는 건 너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

“…….”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이야기해줄게.”

그 말과 함께 나는 남자의 시선에 맞춰 몸을 숙였다. 늘 쓰고 있던 반가면이 깨져 완전히 드러난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낯설었다.

“네가 도망쳐서 이따위 짓을 벌이는 사이에, 나는 단테와 내 고향에 갔다 왔어.”

“……뭐?”

“내가 원래 살던 곳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남자의 눈이 홉떠졌지만, 그 표정 변화 따위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분노 때문인지 아픔 때문인지 몸을 떨기 시작하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갔다 왔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돌아오는 과정에서 본 걸 말하려는 거지.”

그 말과 함께 자연히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차원을 넘어오면서 나는, 차마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것을 보았어.”

완전한 무저갱.

아무것도 없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그곳.

그곳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내가 죽은 뒤 단테가 마탑 앞에 그려놓았던 마법진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너무 검어서 징그럽기까지 하던 그것은 단테가 들고 있던 절망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 안에 인간이 들어가게 된다면 속절없이 미치게 되겠지.

“그곳을 보니 정말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생각나더라. 차원 밖이 마냥 아름다울 거라고 믿는 당신이.”

그래, 누군가는 그 무저갱이 복수를 위한 장소라고 말할 것이다. 차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갈망하는 인간에게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려줄 수 있을 테니.

게다가 나는 충분히 남자를 그 안에 밀어 넣을 수 있다. 내가 그걸 원한다면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와 함께 그곳을 눈에 담았던 단테마저도.

이야기를 이을수록 남자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절망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역겹게도 희망일 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저 희망을 꺼트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네가 그걸 바란다는 사실을 알아.”

내 목소리가 남자의 머리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퍼져나가던 얼굴이 그대로 딱딱하게 굳고, 곧 붉은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난 너에게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을 거야. 넌 앞으로 무언가를 더 알게 될 수도, 여기서 더 살 수도 없을 거야. 이 차원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네가 알 수 있는 길은 없어.”

“……아, 안 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여기서 죽어가겠지.”

“…….”

“그게 너의 최후야.”

네가 그토록 외면하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최후. 

어떻게 해야 남자가 가장 괴로울지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남자의 끝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이곳에 왔고, 언젠가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이가 분노에 차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죽어가는 그 얼굴을 보며, 차마 개운하거나 후련한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끝은 그저 끝. 

이 순간을 사건의 종결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목소리 한 줌조차 내뱉지 못하는 이를 두고 몸을 돌렸다. 걸어온 길을 다시금 되짚어 처음으로 돌아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다정한 바람이 내 뺨을 감싸고 지나갔다.

지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이가 떠오르는 바람이었다.

“단테.”

내 부름에 당연한 것처럼 등 뒤에서 조금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나는 그 몸에 자연스레 기대면서, 볼멘소리를 내뱉듯 단테를 향해 중얼거렸다.

“너 일부러 여기로 날 보낸 거지.”

“응.”

태연한 대답과 함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 찌꺼기인 채로 남아 있었던 불쾌함을 비로소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네가 말했잖아. 평생 그놈을 생각하며 불안해하고 싶지 않다고.”

“……응, 그랬지.”

그 말에 순순히 수긍하자, 단테는 마치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웃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단테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를 지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했어.”

이제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렇지? 손등에 입술을 가까이한 채로 말하니 어쩔 수 없는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손을 움츠리거나 빼지 않고, 단지 단테를 따라 작게 중얼거렸다.

응, 이제 우리는 괜찮을 거야, 하고.

그 말을 되돌려줄 수 있음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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