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 (141/181)

141.

소용돌이라는 말에 릴리도 나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당황하고 싶은 건 이쪽이었으므로, 나는 둘을 따라서 의아한 표정을 지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변명을 생각해내기 전에, 릴리가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 쾅!

“아, 시끄러웠나?”

“……단테.”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곰만 한 마물이 저 멀리 날아갔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난처한 질문을 받는 일은 없었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낸 게 분명한 단테는 그저 뻔뻔한 얼굴을 했다. 이반은 그새 주목이 다른 곳으로 쏠려 마물로 시선을 돌렸고, 릴리는 단테를 일별했다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금 말씀하신 소용돌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에이 님.”

“……네.”

“그런 예감이 들어요. 지금 에이 님이 보시는 게,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마주친 릴리의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올곧게 빛나기만 했다. 어떤 의심이나 불신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푸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녹음이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읊는 이가 있으면 그게 뭐냐고 캐물을 법도 한데. 혹은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거나.

릴리가 사람을 과하게 잘 믿는 건지, 아니면 내가 릴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릴리의 예감이 들어맞는다면 좋을 텐데요. 제가 이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니까.”

“에이 님은 충분히 도움이 되고 계세요.”

“음, 여기 존재함으로써 미끼 역할을 하고 있는 게요?”

“아니요.”

내 팔을 약하게 끌어당긴 릴리가 나를 단테와 멀어지게 만들기에, 순순히 단테의 곁에서 떨어져 주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이 와중에 거리를 두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곧 내 키에 맞춰 몸을 살짝 숙인 릴리가 아까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이 님이 이곳에 오시면서 마탑주의 신경이 누그러졌으니까요.”

“……음. 좋은 거 맞나요?”

“그의 신경이 날카로울수록 저희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네.”

릴리가 보기 드물게 장난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내가 없을 때 단테가 보였을 태도에 대해서 잠깐 상상해 보다가, 괜히 단테의 이중성에 관한 탐구만 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생각을 끊어냈다.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비밀로 해주실 거죠?”

그 가볍고 농담 같은 부탁에 나는 당연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덕분에 괜히 이 사이에 끼어서 다른 이들의 불편함만 늘렸다는 생각을 없앨 수 있었으니까.

릴리와 내가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잠자코 내버려 두던 단테가 이내 내 이름을 불렀다.

“에이.”

“응. 불렀어?”

단테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자, 자연히 보호막을 향해 달려드는 마물들과도 가까워졌다. 단테의 마법이 우리 주변을 꾸준히 정리하는 것 같았지만, 재생하는 마물과 새롭게 나타나는 마물이 워낙 많은 탓에 큰 소용은 없어 보였다.

내가 단테의 옆에 자리를 잡자, 잠시 뒤를 돌아본 단테가 이반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저 돌을 살펴보러 갈 거니까 마물들을 좀 상대하고 있어. 필요하다면 강화 마법을 걸어줄 테니.” 

“정말요? 야호!” 

상황에 맞지 않게 환호성을 지른 이반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살벌한 소리를 내뱉었다. 마물을 상대하는 건 오랜만이라느니, 지난번에 회복하는 마물을 만났을 때는 좀 허무하게 끝나서 아쉬웠다느니.

그것도 모자라서 혹시 마물을 적당히 봐주면서 상대해야 하는지까지 물어왔다.

“혹시 온전히 남겨야 할 부위 같은 곳 있어요? 왜, 연구용으로 자주 쓰인다던 심장 같은 거.”

“아니, 없어.”

“그럼 산산조각내도 괜찮은 걸로 알게요!”

그렇게 외치더니 이반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호막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릴리는 그런 이반의 모습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곧 자신은 이반을 보조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이반은 마물을 쉼 없이 상대해도 지치지 않겠지만, 한 명이라도 더 돕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릴리도, 벌써 저만치 멀어진 이반만큼이나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물들이 에이 님 곁에 접근하지 않도록 주목을 끌 사람이 필요한 거, 맞으시죠?”

“……네?”

“그럼 앞으로의 일은 맡길게요. 조금 있다가 뵈어요.”

단테가 어련히 보호 마법으로 주변을 잘 감싸고 있는데, 왜 내 곁에 마물이 접근하지 않도록 막을 사람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어리둥절해하든 말든, 릴리는 이반의 뒤를 쫓아 저 멀리 자취를 감췄다.

순식간에 마물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차는 사위에, 나는 손을 올려 조용히 귀를 막았다. 아, 정말이지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일단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거고.

“단테.”

“응.”

“저 근원, 네가 해결할 수 있지?”

단테 입가의 미소가 잠시 짙어졌다.

“해결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걸리겠지. 원래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수습하는 게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어떡해?”

그리 오래 방치해둔 것도 아닌데 저만한 마물들이 튀어나온 거라면,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평범한 시민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아무리 마탑의 마법사들이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내려온 마물을 제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살짝 조바심이 들어 단테의 대답을 재촉하자, 단테는 나와는 상반되는 태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에이. 이야기해줄 게 두 가지 정도 있어.”

“그게 뭔데?”

“첫 번째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각자 맡은 영역의 정리가 끝나면 전부 이곳으로 올 거라는 사실이고.”

뭐? 순간 내가 귀를 의심하며 인상을 구기자, 단테가 저 나름의 설명을 덧붙였다.

“이미 내려온 마물을 처리하는 것보다 빠를 것 같아서 부르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단테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여? 단테의 머뭇거림에 오히려 불안해지는 사람은 나였다. 이번만큼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가지 않아서 더욱.

“마물이 나오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어떤 방법을 쓰든 저 근원을 완전히 파괴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음, 그렇지.”

“그리고 그건 네가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그대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기분 나쁜 비명과 발악들. 마물의 몸을 딛고 다른 마물을 베어내는 이반과 화살을 장전하는 릴리.

아까와 똑같이 정신없는 풍경 그대로였다. 음, 역시 주변이 시끄러워서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인데.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단테는 내가 현실 도피를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내 정신을 일깨우는 것도 모자라서 나를 보며 평소처럼 웃는 모습이 오늘따라 낯설다. 나는 그대로 단테를 째려보려다가, 그럴 힘도 없어져서 그냥 관자놀이만 꾹꾹 눌렀다.

“네가 할 수 있는데 내가 왜……. 아니, 이건 둘째 치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여러 번 해봤잖아.”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부수는 거 말이야. 단테는 그리 속삭였지만,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부순 건 전부 허공에 금이 가듯이 깨져있었는데?

“저건 이때까지 봤던 형태랑은 달라. 공중에 깨진 흔적이 남아 있는 게 아니고, 뚫려있는 돌 안에 소용돌이가…… 아.”

저것도 따지자면 무언가가 깨져있고 그 안이 보이는 형태기는 하군. 말을 이어가다가 침착해진 나를 보고, 단테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쨌든 공간과 관련된 초현상이잖아. 내가 저번에 설명해줬던 거, 기억하지?”

“기억은 하지……. 완전히 이해했는지가 문제일 뿐.”

“그러니까, 자.”

나를 이끄는 단테의 손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우리는 어느새 커다란 돌 지척까지 와 있었다. 근처에서 보니 그 돌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어 마치 비석처럼 보였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소용돌이 사이에서 나오던 마물들은 가장 근처에 있는 우리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소음이 들리는 곳으로 다시금 고개를 돌리곤 했다. 

릴리가 말한 주목을 끈다는 게 이런 말이었구나. 떨떠름하게 생각할 때쯤, 갑자기 눈앞에 있던 반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단테가 비석에 새겨져 있던 조각난 마법진을 손으로 가만히 쓰는 듯했다.

“네가 마물이 나오는 근원을 해결하면, 내가 이 돌을 부술게. 마물이 나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을 거야.”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네게 위험한 일을 시킬 리 없잖아, 에이.”

이래도 되는지 계속해서 생각하는 나와 달리, 단테는 태평하리만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뭔가…… 나에게 다 말해주지 않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걸리는 부분에 대해서 캐묻거나, 역시 못하겠다고 말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이미 소용돌이에 가까이 다가와 있고, 릴리와 이반은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으며, 단테는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정말 오랜만에 손이 약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소용돌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뒤늦은 걱정이긴 한데, 깨부수겠다고 다가갔다가 되레 이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손가락 사이로 거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지고, 순식간에 시야가 위에서 아래로 뒤집혔다.

그와 함께 팔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나를 안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감각. 예고나 전조 같은 것은 없었지만, 마냥 거칠지는 않은 힘이 느껴졌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언뜻 스치듯 닿은 시선 속 단테가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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