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얕다면 얕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방문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마샤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 에이! 나 들어가도 돼?
“아…… 응, 들어와.”
침대에서 부스스 고개를 드니, 도대체 언제 잠든 건지 모를 정도로 몸이 개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이렇게 낮잠을 자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게 정상인데.
아, 맞다. 나 이제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다 없어지던 그 몸으로 돌아왔지. 그래서 이런 건가.
대충 침대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쭉 키던 찰나, 마샤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도 잠들었었구나? 한참 대답이 없길래 왜 그러나 했네.”
“응, 잠깐 잤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니, 아까 그 루크라는 사람이 우리 보고 같이 있으라고 하길래…….”
마샤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를 찾아올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누구길래 우리 보고 같이 있으라고 하는 거지?”
“글쎄.”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근데 그러면 너랑 같이 있으라고 할 이유가 없는데…….”
마샤가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는 사이, 벽에 걸린 거울을 보고 대충 머리를 정리한 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한테도 너랑 같이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하기는 했었어. 만약에 내가 정말 그 마을에서 지낸 게 맞다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내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흐려지다가 도중에 완전히 사라졌다. 말하던 와중 갑자기 입을 다무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 같던 마샤가 내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를 찾아온 한 사람을 발견했다.
마샤보다도 더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나와 키가 비슷한 어떤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문 앞에 선 그대로 굳어있었는데, 어쩐지 그 당황한 듯 아연한 듯한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분명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잊고 있었지만, 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분명 기억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잊고 있었던, 어쩌면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던 기억들 속 한 얼굴을 끄집어내려고 했을 때.
마샤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어떤 이름을 뱉었다.
“……캐서린?”
그 이름이 불린 순간, 그 애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
“잠, 잠깐만.”
난데없는 눈물에 마샤는 극도로 당황했다. 정작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멍한 표정인데, 마샤 혼자서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런 마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도 캐서린은 계속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얼어버린 것처럼 굳어있는 몸을 보니, 아마 자신도 울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보니까 기억이 난다. 눈물이 많고, 그만큼 내 앞에서 자주 우는 애가 있었지.
[ xxx년 x월 x일 ]
옆옆집에 사는 캐서린이 울면서 왔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똑똑하고 지식에 대한 욕구가 대단한 아이인데, 눈물이 좀 많은 것 같았다.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지 계속 울먹거리고 있더라고.
뭐라더라, 마탑 입단 시험을 쳤는데 마탑주가 너무 무섭고 또라이라는 소문이 들려서 자기는 못 들어갈 것 같단다.
분명 그때쯤 쓰곤 했던 일기에도 이 애의 이야기를 적어두었을 것이다.
일기장을 떠올리니, 자연히 캐서린이 지금 어떻게 여기 있는지 짐작이 갔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탑 안에서 지낸다고 했으니 ‘그때’도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거겠지.
마샤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쩌면 나와 마찬가지로 그 마을의 생존자인 셈이었다.
나는 그 애에게로 다가가 옷 안에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까 옷을 갈아입을 때 손수건도 있길래 챙겨둔 건데,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캐서린이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손수건을 받지 않자, 그 애의 손을 잡고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손을 잡으면 잡는 대로, 손수건을 주면 주는 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로 영혼이 없어진 사람 같았다.
“이제 뚝 그치고, 그걸로 눈물 닦아.”
“…….”
“눈물 많은 건 여전하네.”
그 말을 하는데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내가 작게 웃어 보이자, 한치의 미동도 없던 캐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직후에 크게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껴안았다.
내가 살아난 뒤에 나만 보면 우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내 목을 끌어안은 캐서린을 가볍게 토닥여주며, 그렇게 울다간 눈이 다 부을 거라고 속삭여주었다.
그러나 내 말에 큰 효과는 없었고,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 마샤도 함께 울먹이기 시작했다.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마샤에게 손짓하자 마샤도 냅다 다가와 우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함께 우는 두 아이를 보자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몸 안에서 퍼져나갔다.
재회에는 눈물만이 가득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물에는 슬픔보다는 기쁨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거면 됐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만나서 다행이었다.
* * *
한참을 훌쩍거리던 캐서린이 가까스로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마탑 안에서 지내다가 마을에 잠깐 들르는 생활을 했는데, 그 일이 있었을 때 자신은 마탑에 있었다고.
나중에 마을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이다.
나는 캐서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지만, 마샤는 자신의 상황과 똑같다며 다시 울먹거리고 있었다. 저렇게 울다간 정말 눈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울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소매로 눈을 꾹 누르라고 조언해주며, 캐서린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럼 너도 전쟁에 나갔어? 마탑이 제국을 지원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아. 저는 전면으로 나가지는 않았고…… 뒤에서 지원하는 느낌으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싶더니 슬쩍 우리의 눈치를 본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기울이자, 캐서린이 황급하게 덧붙였다.
“제가 전쟁을 나가고 싶어서 나간 건 아니었어요, 언니! 그냥, 탑주님이 전쟁에 나가니까 우리도 따라 나간 거지…….”
“아, 음. 그래.”
갑자기 단테 이야기가 나오니까 표정 관리가 어려워진다. 나는 다소 미묘하게 대답했다가, 캐서린의 말에서 의문을 느끼고 물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사람이 있어?”
“제 선배 중에는 희귀 마법을 직접 써볼 수 있겠다면서 자원하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그 사람들, 마법에만 미쳐있어요. 가끔 전장에서는 마법을 맘껏 쓸 수 있다며 기뻐하기까지 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아하.”
“저는 미치지는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더니 또 눈치를 힐끔힐끔 본다. 예전에도 이렇게 소심한 아이였던가 되짚어보니, 첫인상부터 수줍음이 좀 많다고 생각하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니랑 마샤는 어떻게 마탑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갑자기 찾아가 보라길래 오긴 했는데, 둘이 같이 있길래 놀랐어요.”
그러다 불쑥, 캐서린이 우리를 향해 물어왔다. 나는 그 질문에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슬쩍 마샤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주 짧은 찰나에 마샤와 나의 시선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뭐라고 말해? 네 남편이 마탑주라고 솔직히 설명할 거야?’
‘그랬다가는 졸도할걸.’
‘그래, 졸도하겠지……. 살아 돌아온 친구가 사실 상사의 부인이라는데…….’
마샤가 약하게 인상을 구기자 어떻게 해석한 건지, 캐서린이 곧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혹시 설명하기 곤란한 이야기라면 말 안 해주셔도 돼요! 그냥, 이제부터 계속 머무르시는 건가 싶어서.”
“아마 계속 머무르지는 않고, 수도 내의 상황이 정리되면 돌아갈 거야.”
뱉어놓고 보니 설명이 모호하기는 하다. 상황이 정리되면 돌아간다니.
나는 잠깐 침묵하다가, 화제도 돌릴 겸 지금껏 궁금했던 것을 캐서린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수도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어?”
“아, 네! 어디서 솟아 나온 것처럼 마물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대요. 크기도 종류도 다 달라서 사람들이 제압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더니 다소 해맑기까지 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아마 저희 쪽에도 지원 요청이 들어왔을 거예요. 대부분은 관심 없지만, 선배들 몇몇은 마물 시체를 온전히 받는 조건으로 어련히 잘 협상하고 있을걸요?”
“…….”
“그,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우리의 대화를 조용히 듣는 것 같던 마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혹시 마법사들은 윤리 의식이나 도덕 관념이 없어?”
“네? 음…… 있긴 하죠. 그런데 마탑에 오래 갇혀있을수록 이걸 하면 안 된다는 정도만 인식하지, 마음 깊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못할 거예요. 사회와 계속 떨어져 있게 되니까.”
“갇혀 있는다고? 혹시 마탑에서 사람을 못 나가게 해?”
“아뇨. 연구에 더 집중해야 한다면서 스스로를 가둬두는 사람들이요.”
“아…….”
그 말에 마샤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캐서린은 우리에게 전쟁을 원해서 나간 게 아니라고 해명한 것도 그렇고, 아직 그런 사람들처럼 되지는 않은 듯한데. 심히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된다.
내가 자신을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캐서린은 아까 하던 말을 마저 이어서 했다.
“그래도 영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면 저도 나가려고요. 저는 마물 시체에는 관심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이 다칠 것 같다면 나서는 게 좋으니까.”
“그래, 착하다.”
나는 캐서린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캐서린은 칭찬받은 어린아이처럼 히히 웃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야기 나온 김에 한 번 내려갔다 와볼게요! 언니랑 마샤는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아, 잠깐만. 나도 같이 가도 돼?”
“에이……?”
내가 나서자 마샤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약하게 내 소매를 붙잡는 손길을 느끼고, 나는 살짝 웃는 얼굴을 내비쳤다.
“마물 사이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는지 궁금해서.”
이 일이 마물을 잡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적어도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다면 알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