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릴 뻔했다. 정체가 뭐냐고 정중히 물어오는 모습이 듣는 사람 입장으로는 다소 엉뚱하게 보이기만 했기 때문에.
하지만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너무 진지해서,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삼켜냈다.
“제 정체 말씀이신가요? 음.”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어쩐지 가벼운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다. 너는 내가 뭐인 것 같냐고 묻거나 유령이라고 대답하면서.
그래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되겠지. 이 호들갑스럽고 순해 보이는 사람은 내가 장난을 치면 그대로 믿어버릴 것 같다. 마법사이니만큼 어떤 비현실적인 일도 있을 법하다고 생각할 것 같고.
이런저런 방향으로 뻗어나가던 생각은 루크가 다시금 입을 열면서 끝이 났다.
“탑주님도 그렇고, 방금 전에 방에 들어가신 분도 그렇고. 두 분 다 똑같은 이름을 부르시더군요. 그리고 제가 아는 에이 님은…… 아직까지는 한 분뿐입니다.”
그리 이야기하고는 또 슬쩍 내 안색을 살핀다.
하지만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치고는 하는 말에는 거침이 없어서, 아까 단테 앞에서 줄줄이 말을 늘어놓던 그 사람이 맞구나 싶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정말로 처음부터 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나요?”
“처음부터라고 하시면?”
“……탑주님과 만나고 나서부터 그 이름을 쓰신 건 아닌가, 하고 여쭤보는 겁니다.”
아하. 나는 루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로 내가 진짜 에이가 아닌 다른 사람인데, 단테를 만난 뒤에 에이인 척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 거겠지. 좋은 질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루크에게, 나는 순순히 진실을 털어놨다.
“기대하시는 답이 아닌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저는 진짜가 맞아요. 가짜인데 에이의 이름을 사용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
“비서님께는 단테가 알아서 다 설명할 줄 알았는데 제가 먼저 이렇게 말하게 되네요.”
물론 그동안의 사정 설명은 단테가 하게 될 거지만. 나는 나의 구구절절하고 긴 과거를, 그리고 단테와 어떻게 오해가 생겼으며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를 다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
아직도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라는 사실을 말하는 데에 큰 거부감을 느끼니까.
내 솔직한 대답에도 루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혼자 땅바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잠시 뒤에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본인은 정말 자신이 에이 님이라고 믿으신단 말이죠.”
“……?”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키메라처럼 인공적인 생명체가 만들어졌을 때, 주인의 의지에 따라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경우가요.”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 도대체 뭔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루크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도장을 쾅 찍듯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탑주님이 부인을 향한 그리움을 못 이겨 당신을 만드신 모양입니다. 정교하고 어색함이 없는 겉모습은 같은 마법사로서 너무나도 감탄스럽지만, 그와 별개로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 단테가 저를 만들었다고요?”
“그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이건 또 새로운 견해다. 나는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루크가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가, 나를 만드는 단테를 상상해보고는 소름이 돋아 고개를 저었다.
“인식이고 자시고, 단테가 만약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지금 단테의 등이 남아나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정신 좀 차리라고 마구 때렸을 거라.”
“탑주님이 생전에 부인분께 많이 잡혀 사셨나 봅니다…….”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 아무래도 내가 진짜라는 건 끝까지 믿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
나는 루크에게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가, 더 이상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루크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 있었다.
과연 단테가 돌아와 사정을 설명하더라도 루크가 순순히 납득할까, 하는 생각.
지금 보이는 반응으로 봐서는 단테가 정말 영영 돌아버렸다고 믿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단테는 긴 세월을 미친 사람처럼 보냈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미치는 것이 더 쉬운 일임을 모두가 안다.
우리에게 있었던 일이 모두 단테만의 망상이라 치부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나와 함께 움직였던 파견단 일행이나, 내가 나임을 알고 있는 마샤가 그간의 일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주겠지만…….
“믿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사실 굳이 다른 누군가의 증명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나라는 걸 그렇게까지 말해야 할 필요가 뭐가 있어.
단테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인 만큼 지금 당장 믿어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믿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어차피 나중에는 믿게 될 수밖에 없을걸.
“단테도 처음에는 못 믿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인 걸 부정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누구보다도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불신했을 사람이, 지금은 모든 일이 진실임을 인정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도 탑주님의 착각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루크는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사실 여태껏 순순히 믿었던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원래라면 이게 맞는 거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끝없이 의심하고, 믿지 못하며, 경계하는 게 정상이다. 상황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든 간에.
비로소 평범하다고 말할 만한 반응을 마주하니 기분이 새로웠다. 내가 소리 없이 작게 미소 지어 보이자, 계속 나를 응시하던 루크가 움찔했다.
도대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죠. 하지만 루크 씨, 한 번 생각해보세요.”
“…….”
“단테가 제 존재와 관련된 일에 착각 같은 걸 할 것 같나요?”
그 애가 미쳤던 세월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말하는 나 자신도 내 태도가 뻔뻔하다고 느꼈지만, 나를 의심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지금 나는 점점 더 태연해졌다.
루크는 단테의 정신이 극한으로 치달으면 가짜라도 만들어낼 거라고 짐작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환영을 보여주는 마물을 마탑 안에서 키웠겠지.
그러나 단테는 그 환영이 가짜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했고, 나를 잊지 않을 수단으로 삼았을 뿐 그 환영이 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테는 진짜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완전히 맛이 가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던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단테가 죽을 결심을 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나와 만나고 나서 그 징그러운 마법진은 깨끗하게 사라졌으니 보여줄 방법도 없다.
다행이다. 단테가 완전히 돌아버렸었다는 걸 한 사람에게라도 더 숨길 수 있어서.
“비서님도 아시잖아요. 단테가 얼마나 저를 소중히 여기고, 저와 관련된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물론 루크 씨는 그래서 더더욱 단테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
“저는 그래서 착각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여기까지만 말하고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내 말을 다시 생각해보고 뒤늦게 믿게 되든, 조금 있다가 올 단테의 말에 납득하든 그건 저 사람의 선택이었다.
적어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그리고 이쯤 되니 ‘네가 못 믿으면 어쩔 건데’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탑주의 정신이 회생 불가능이라며 들고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냥 둬야지.
그리고 그 순간, 루크가 잔뜩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제가 무례하게 말씀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아직도 믿기지는 않지만, 혹여라도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는 편이 맞는 것 같아요.”
“기분은 안 나빴지만, 일단 사과는 받아둘게요. 사과해줘서 고마워요.”
이건 내 직감인데, 나중에 되어서는 그때 의심해서 죄송했다며 또다시 사과하러 찾아올 것 같다. 그때는 정말 장난이라도 한 번 쳐봐야지.
이제 방에 들어가도 되겠냐는 의미로 가볍게 방문을 가리키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루크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리를 비켜주겠다며 물러나려 하기에, 나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그 행동을 막은 뒤에 물었다.
“혹시 방 안에 여분의 옷이 있나요? 보시다시피 지금 제 차림새가 좀 특이한데, 더 이상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아, 예. 방 안에 있는 옷장을 여시면 또 다른 방 하나로 이어지는데, 그곳에 웬만한 종류와 치수의 옷은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지내는 곳은 옷장도 신기하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루크는 살짝 당황하는 것 같더니 허둥지둥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갈 줄 알았더니, 잠깐 망설이며 내 방문 앞을 맴돌았다.
“……만약에 정말 그 마을에서 지내던 에이 님이 맞으시다면, 제가 조금 있다 보내드릴 사람도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있다가 사람이 온다고요?”
“예. 가급적이면 방금 옆 방에 들어가신 분과 함께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루크는 다시금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인 뒤 내 앞에서 달아나듯이 사라졌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하면서 서 있다가, 일단 사람이 올 거라면 옷부터 갈아입자는 생각에 문고리를 돌렸다.
조금 있다가 온다는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느긋하게 와줬으면 좋겠다. 이러나저러나 나도 조금 지쳤으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는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잠깐 기대었다가 깜빡 잠에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