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눈을 감았다가 뜨자 순식간에 모르는 장소로 와 있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오래된 종이의 냄새. 도서관에서나 맡아보았을 법한 그 냄새는, 그 공간 안을 맴돌다 못해 공기 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말의 어지럼증이 가신 뒤에 주변을 둘러보니, 정작 그 안의 풍경은 도서관처럼 보이지 않았다. 몇십 명은 거뜬히 들어갈 듯한 넓은 공간은 텅 비어있었고, 단지 벽에 박혀있는 정체불명의 돌들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굳이 눈에 보이는 점을 꼽자면 차가워 보이는 돌벽과 바닥에 빼곡히 그려져 있는 마법진뿐.
희미하게 보랏빛으로 빛나던 마법진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이내 완전히 빛을 잃었다. 나는 마법진이 점멸하고 나서야 문양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그 전용 순간이동 마법진인가 뭔가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급하게 열어젖히는지 내 팔에 매달려있던 마샤가 움찔 놀랄 정도였다.
“……탑주님?”
숨을 급하게 내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단테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초록색 곱슬머리에 안경을 쓴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언제 한번 보았던 사람인가. 묘하게 낯은 익은데 기억이 날듯 말 듯했다.
내가 단테를 아는 사람을 보았던 적은 정말 얼마 없을 텐데. 고작해야 릴리랑, 케이드랑, 이반이랑, 그리고…… 아.
예전에 단테의 비서가 우리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지.
워낙 옛날 일이고 잠깐 마주쳤던 거라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 사람도 짙은 초록색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루크.”
그리고 저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한 기억을 되살리며 단테와 루크를 번갈아 보는데, 단테를 멍하니 보고 있던 루크가 갑자기 턱이 떨어져라 입을 떡 벌렸다.
“진짜 탑주님이십니까?! 부르지 않았는데 또 돌아오시다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오셨습니다! 용건이 뭐든지 간에요! 탑주님 얼굴을 실제로 뵈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레 우다다 쏘아붙여지는 말에 순간 당황했다가, 단테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원래 저런 사람이구나 싶어졌다. 저렇게 호들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기억 못 하고 있었는데.
순간이동 마법진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든 말든-케이드는 인상을 구겼고, 마샤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었다-루크는 계속해서 자기 할 말을 했다.
안 그래도 탑주님에게 연락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는 둥, 연락을 해봤자 받지 않으실 것 같아서 포기하고 있었다는 둥, 그래도 저번에 변질자의 자료를 요청하셔서 정신을 조금 차리신 것 같아 기뻤다는 둥.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던 말은, 무심코 고개를 기울이던 나와 눈이 마주치면서 끝이 났다.
활달하게 떠들던 사람이 딱 소리 나게 입을 다물자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탑, 탑주님.”
“왜?”
“제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정신 차리라고 해주십시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눈치다. 난 다른 데서 마주쳤다면 예전에 봤던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지도 못했을 텐데, 기억력이 제법 뛰어난가 봐.
나는 걸음을 옮겨 루크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단테에게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그동안 있었던 일 설명 안 해줬어? 저 사람 네 비서 아니야?”
내가 목소리를 낮추자, 단테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설명해줄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너랑 만난 뒤에 신 마탑에 몇 번 왔었는데, 그냥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정신이 좀 들었구나 싶었을 거야.”
“두 번이나 왔는데 아무것도 설명 안 해준 너도 참……. 아니다.”
내가 말을 하다가 말자 단테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밑도 끝도 없이 네가 살아났다고 말하면 또 미친 사람 취급받을 텐데 어떻게 설명해? 나중에 그럴듯한 설명을 생각해봐야지.”
“굳이 생각해볼 필요 있어? 그냥 있는 대로 설명해. 어차피 어떻게 말해도 이상한 이야기인데.”
“……네가 그 이야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물론 싫어하긴 하지. 근데 내 입으로 잘 나오지 않을 뿐이고……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주는 건 내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괜찮아.”
아마 그럴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말해도 된다고 허락한 상태라면.
단테는 내 말을 듣고도 계속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두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기색이던 단테의 비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분이 헛것이 아니라면 제가 착각하고 있는 거겠죠……? 그렇겠죠, 탑주님?”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루크, 손님들이 머무를 만한 방이나 찾아보고 와.”
“아, 아…… 네, 알겠습니다!”
루크는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쏜살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멍청한 얼굴을 하면서도 착실히 뛰어가는 것이, 어쩐지 도망치는 사람의 것처럼 보여서 약간 안쓰러워졌다.
일단…… 그동안의 사정은 나중에 단테가 알아서 설명할 테니까 더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우리 여기서 지내야 해, 단테?”
‘머무를 만한 방’이 잠깐 쉬는 곳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 물음에 마샤도 궁금하다는 듯 옆에서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자, 단테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일이 다 수습되기 전까지는 여기서 계속 지내는 편이 좋을 거야. 굳이 다른 곳을 구하는 것보다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머무르는 게 낫잖아.”
“혹시 우리 집은…… 당연히 더 위험하겠지. 밖에 마물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으니까.”
말을 꺼냈다가 순식간에 얼굴이 어두워지는 마샤를 보고, 나는 마샤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굳이 마물 말고도 네 집은 지금 누가 지낼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유리창이고 커튼이고 다 망가져 있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마샤가 좀 덜 불안해할 때 알려주리라 생각하면서, 우리 곁에서 가만히 서 있는 케이드에게도 말을 건넸다.
“그럼 우리는 그렇다 치고. 케이드 씨도 여기서 머무를 건가요?”
우리야 갈 곳이 없다지만, 케이드는 사정이 좀 다를 것이다. 아마 수도에 자기 집도 있을 거고 황궁에 들어가도 되겠지.
아니나 다를까 케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일단 수도까지 왔으니, 저는 바로 릴리아나 님께 가보려고 합니다. 굳이 마탑에 머무를 필요도 없고 말이죠.”
“잠깐 쉬지도 않고요? 아직도 안색이 좀 창백하신 것 같은데.”
“당신 착각……은 아니고. 지금 쉬는 것보다는 최대한 빨리 일을 수습한 후에 쉬는 게 낫습니다.”
저 사람, 분명 습관적으로 빈정거리려고 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케이드가 헛기침을 하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수도까지 데려와 줘서 감사합니다, 마탑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래.”
단테는 짤막하게 대답한 뒤 살짝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황궁으로 갈 거면 나랑 같이 가도록 하지. 나도 현 상황을 들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케이드가 대답하자마자 때마침 루크가 다시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단테에게 갔다 오라는 말을 한 뒤 루크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
“우와……. 나 마탑 처음 들어와 봐, 에이.”
“나도 여기는 처음 봐. 새삼 여기까지 오니까 단테가 정말 마탑주라는 실감이 나네.”
“그게 이제야 실감이 나는 거야?”
마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보다 앞서 걸으면서 계속 뒤를 힐끔거리고 있던 루크는 적당히 말을 끊지 않는 선에서 대화에 끼어들며 우리에게 물어왔다.
“잠시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두 분이서 같이 지내실 방을 준비해드리는 편이 나을까요, 아니면 따로 지내실 방을 준비해드리는 편이 나을까요?”
“따로 쓰는 방이요.”
“마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잽싸게 마샤가 대답했다. 약간 당황해서 마샤의 이름을 부르자, 마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정말 바쁘지 않은 이상 단테가 계속 널 찾아올 텐데, 그 중간에 끼어 있으라고? 그렇게는 못 해.”
“음, 나는 네가 혼자 있기는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당연히 혼자 있기는 싫지! 하지만 단테가 없을 때는 내가 네 방에 놀러 가면 되니까 괜찮아.”
설마 오지 말라고 할 생각은 아니지?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웃는 마샤의 얼굴에, 나도 작게나마 웃어 보였다.
“그래, 마음껏 놀러와. 단테가 찾아오더라도 심심하면 그냥 놀러 오고.”
물론 단테는 내심 불만스러워할 거지만 상관없다. 내 말에 마샤가 은근슬쩍 신난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동안, 우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크가 뒤늦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 마탑의 구조는 단테와 내가 잠깐 지냈던 마탑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방문처럼 생긴 문을 열었는데 복도가 나오고, 막다른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했더니 또 다른 공간이 나온다. 마샤는 지나갈 때마다 매우 신기해하며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잠깐 마탑에 지내는 사이 익숙해진 나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루크는 우리에게 비교적 길이 덜 꼬여있는 복도의 방을 보여주면서 용건이 있으면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무작정 나가시면 길을 잃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에 신 마탑을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저를 불러주세요.”
“네, 알았어요.”
“그럼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마샤와 내 방은 옆 방인 것치고는 제법 떨어져 있었는데, 루크가 마샤의 방문을 먼저 열어주었다.
자기는 조금만 자겠다며 먼저 방에 들어가는 마샤를 배웅하고, 곧이어 복도에 루크와 나만 남았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쭉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던 루크가 이내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을 붙여왔다.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정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