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그 이후로 며칠간 내 방은 사실상 단테의 방이 되었다. 나와 노는 시간 외에는 단테가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며 고민하고는 했고, 나는 그런 단테를 위해 기꺼이 방을 통째로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단테는 내가 방해하지 않겠다며 나가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자기를 외롭게 둘 거냐는 소리를 주워섬기더라-나는 단테의 집중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았고, 또 내가 있다면 그 집중이 잘 깨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 어떡해. 내가 잠시라도 시야 밖으로 사라져줘야지.
끝까지 나를 붙잡으며 같이 있자는 소리나 하는 단테에게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너처럼 말 안 하고 갑자기 밖에 나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
“아, 아니다. 아예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을까? 안 그래도 한 번쯤 가출해보려고 했는데. 어때?”
“내가 잘못했어, 에이.”
뭐, 그랬다.
단테가 방에 들어가는 건 보통 점심과 저녁 사이, 느지막한 오후 시간이다. 가끔은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를 적기도 했고, 잠들기 직전 자기가 그려놓은 마법진을 공중에 띄우기도 했다.
단테의 연구는 시도 때도 없이,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방해하지는 않는 선에서 계속 이루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단테가 지나가듯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거야. 이곳에 넘어왔던 방식대로 똑같이 넘어가는 거.’
‘똑같은 방식이라면?’
‘차원을 이동하는 너를, 내가 따라가는 거지.’
그 순간 아마 단테와 나는 똑같은 것을 떠올렸을 터다.
어느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커다란 틈.
하지만 단테는 그 틈새를 이용하는 방법은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균열에 휘말린 뒤 도착한 곳이 우리가 본래 있던 차원이라 보장할 수가 없잖아. 우리가 겪어왔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내 마법조차 통하지 않는 차원에 도착한다면 우리 둘 다 위험해.’
그렇지만 균열을 살펴볼 필요는 있겠다며, 내가 괜찮다면 그때 갔던 골목을 또 가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래, 내가 괜찮다면.
단테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마음속에 각인되는 두려움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차원을 넘어가기로 결심했어도, 이미 두 번이나 나를 잡아먹었던 아가리에 스스로 다가간다는 건…….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짓이고, 평범의 기준에서 벗어나 심하게 무던한 내게도 준비가 필요한 일이란 거다.
단테는 나를 언제까지고 기다려주겠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을 보인다면 재촉조차 하지 않겠지만. 나조차도 나 자신이 언제쯤 마음을 먹을지 알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마루에 혼자 남겨진 오후, 내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있기 전까지는.
“…….”
규칙적인 진동이 탁자 위를 따라 흐르며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진동의 근원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밝게 빛나는 화면을 보자마자 멈칫했다가, 그 위에 뜬 글자를 보고 침묵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호칭이다. 아니, 실은 입에 담을 일이 그동안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야 그렇지. 내가 이 나이에 누군가를 이렇게 부를 일이 뭐가 있어.
< 언니 >
애써 생각을 다른 곳으로 전개해 보아도 진동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전화가 끊겼으면 하는 마음 반, 절대 끊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휴대 전화를 귓가에 가져다 대는 자세가 왜 이리 어색하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 여보세요? ]
“…….”
손으로도 잡을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물건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미약한 생활 소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목소리.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휴대 전화 측면의 버튼을 꾹 눌렀다.
아까보다 약간 커진 음량과 함께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 너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
“…진동을 늦게 들어서.”
[ 그래? 끊기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받았네. ]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약간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긴장한 사람처럼 딱딱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다행히 전화하는 상대는 일말의 위화감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보다는 조금 더 높은, 그리고 훨씬 활발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전해져왔다.
[ 점심은 먹었어? 야, 오늘 진짜 춥더라. 점심 먹으러 나가는 길이 힘겨울 정도던데? 너 또 귀찮다고 아직까지 안 챙겨 먹은 거 아니지? ]
“아냐, 먹었어. ……전화는 왜 했어, 언니?”
[ 그냥 뭐 하고 있나 싶어서 전화했지. 난 원래 이러잖아. ]
맞아, 원래 이러지. 언니는 예전부터 사소한 일마저도 전화로 물어보곤 했었다. 전화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던 나는 종종 그 전화를 귀찮아하기도 했고.
하지만 언니는 끝까지 내 목소리를 들어야겠다며 지치지 않고 전화를 걸었었다.
분명 차원을 넘어가기 전에도, 언니와 전화통화를 했었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꿈에도 모르고.
새삼 그 사실이 아득하게만 느껴져서, 나는 결국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잘 지냈어, 언니?”
발걸음을 옮겨 단테가 있는 방에서 멀어지며, 언니에게 그렇게 물었다. 정말 잘 지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런 전화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함을 떨치지 못하고 고른 질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곧바로 퉁명스러운 반문이 돌아왔다.
[ ……왜 이렇게 안 친한 지인 안부 묻듯이 말해? 그럼 나는 이제 ‘나도 잘 지내’하고 대답하면 되는 거야? 웃음 이모티콘 두 개 붙이고. ]
“와, 이모티콘이라니. 그 단어 엄청 오랜만에 듣는다.”
[ 별 걸 다 오랜만에 듣네. ]
남이 듣는다면 너무 까칠하게 말하는 거 아니냐며, 사이가 안 좋냐고 걱정할 만큼 툭툭 던지는 말투. 하지만 ‘언니의 동생’인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익숙한 것이었다.
나는 언니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속절없이 흘러들어오는 기억들을 전처럼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억들을 스스로 뒤지며, 행여나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열심히 살펴보았다.
사실, 어색하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가벼운 타박만이 돌아오겠지만.
언니의 기준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을 화제로 삼는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중에서 언니가 단번에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라면.
“언니, 나 남자친구 생겼어.”
[ …그래? 하필 그걸 최근에 애인이랑 헤어진 나한테 자랑하는 이유가 뭐지? ]
언니의 목소리가 금세 험악해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져서, 나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언니한테는 말해주고 싶었어. 아마 결혼까지 갈 것 같거든.”
[ 뭐? 결혼? ]
“응.”
역시 너무 갑작스럽나? 휴대 전화를 편하게 고쳐 쥐고 고개를 기울이자, 언니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갑자기 웬 결혼 타령이야? 평소에는 연애의 연 자에도 뭐에도 관심 없던 애가. 그런 이야기를 할 만큼 놓치기 아까워? ]
“음…….”
놓치기 아깝다기보단 내가 놓쳐도 따라올 사람이라는 말이 더 가깝겠지. 하지만 나는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적당히 언니가 납득할 만한 말을 했다.
“일단 엄청나게 잘생겼어.”
[ ……. ]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TV에서 보던 연예인보다 더, 아마 언니가 봤을 사람 중에서도 제일 잘생겼을 거야.”
[ 야, 안 되겠다. 그 사람 한 번 데려와. 얼굴 좀 보자. ]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목소리에 다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니는 늘 이런 식이었다. 호들갑스러운 듯 아닌 듯, 그러나 담백한 말투로 나를 즐겁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형제자매가 그러하듯 우리도 자주 싸웠지만, 그만큼 금방 화해하며 사이가 좋아지는 편이었다.
이런 관계가, 그리고 언니의 존재가 참 당연할 때도 있었는데.
[ 난 진심이야. 언제 만날래? 이번 주말? ]
“글쎄.”
[ 뭔 글쎄는 글쎄야! ]
이어지는 독촉 아닌 독촉에도 나는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날짜는 불러주지 않았다. 곧 언니도 약속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내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가 넘어갔다. 방금 언니가 겪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오랜만에 만났다던 동창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 통화에서 나는 들어주는 역할이었고, 언니는 쉼 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역할이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했던 게 아주 오래전이라 잊어버릴 법도 한데. 나는 지금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금 슬프게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영영 잊지 못하게 될 그 목소리를.
다른 차원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나는 언니와, 또 다른 가족들이 그리웠었다.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에 계속 괴로워했었다.
그래서 더욱 빨리 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가족의 얼굴,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던 안온함.
고작 전화 한 통으로 이렇게 내 안에서 되살아날 것들.
[ …아무튼, 나중에 엄마한테도 전화 한번 해. 안 그런 척하면서 잘 지내는지 걱정하더라. ]
“……응, 알았어.”
그렇게 뱉으면서도, 나는 내가 겉뿐인 대답을 했음을 알았다. 언니와의 통화만으로도 이렇게 마음 어딘가가 울렁거리는데 다른 가족들과 또 통화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굳이 가족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이 차원에서 좋아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듣는다면, 그런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겠지. 내가 언제나 두려워해 왔듯이.
내 짧은 망설임을, 아마도 미약한 귀찮음으로 받아들였을 언니는 슬슬 전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언니가 전화를 끊는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 내가 먼저 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나 물어볼 거 있어.”
[ 뭔데? 최대한 짧게 물어봐. 나 곧 들어가 봐야 해. ]
그렇게 바쁘면 전화를 하지 말지. 예전의 나라면 타박하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바람 빠지듯 웃은 뒤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언니. 만약에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