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D14.
단테는 낯선 풍경 앞에서 끝끝내 연약해지고 말았던 에이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울음기를 매달고, 자신의 고향에 관해서 이야기하던 그 목소리를.
“나는 여기가 그리웠어.”
가을이 뒤덮은 풍경을 바라보던 옆얼굴. 그렇게 말하는 에이는 마지막까지 울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눌러 삼키듯 고개를 숙였다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그들이 다시 눈을 맞췄을 때 잠시간의 울먹임은 한낱 착각이었다는 듯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단테는 꼭 울어야만 슬픈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에이의 제대로 된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렇기에 에이가 입에 담는 그리움 안에 얼마만큼의 감정이 담겨 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함께 차원을 넘어오기 전, 에이는 실수로라도 그녀가 마냥 평범했을 시절을 언급하지 않았다. 애초에 과거를 잘 꺼내놓지도 않았거니와 단테 또한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들에 대해서 구태여 캐물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그녀를 부른 이의 목적을 알아차렸던 날에도 단테는 그녀를 영영 보지 못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해했을 뿐, 에이가 고향을 향해 가지고 있을 생각들을 더듬어본 적은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들이 함께 있는 지금, 곧 현재였으므로.
그러니 그녀의 고향이 마냥 과거의 이야기로 남지 않게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에이는 자신의 세계를, 그리고 일상을 한순간에 강제로 빼앗겼었다는 사실을. 그 이후 낯선 세계에서 섞이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버텨냈고, 또 감내했다는 걸.
그런 일을 겪고도 다시…….
그 하나만을 보고 차원을 건너 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그의 헛된 욕심일 터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낯설고 또 이상한 물건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에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그가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듯한 시선을 받아낼 때마다 그런 생각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너에게 뭐부터 가르쳐줘야 하는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됐었는데, 이제 알 것 같아.”
평화롭던 오후의 햇볕, 구석구석 그녀의 손길이 닿았을 공간 속으로 자신을 끌어앉히던 온기.
에이는 몰랐겠지만, 그때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편안하고 또 안온해 보였다.
“내가 처음 그 차원에 떨어졌을 때 없어서, 또는 있어서 신기했던 것들을 반대로 생각하면 될 것 같거든. 넌 운이 참 좋은 거야, 단테.”
세상 어디에 또 네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는 선생이 있겠어……. 그 말은 분명 농담이었을 터지만, 듣는 사람을 함께 웃게 만들지는 못했다.
불시에 일어난 사고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에이가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변함없는데.
이리 편안하고 또 행복해 보이는 에이 앞에서, 그들이 함께할 수도 있을 무수한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에이에게 오롯이 그만을 바라보고 선택을 내려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자신부터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강요하더라도 에이는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생각하고 곱씹으면서도. 수없이 되뇌고 다짐하는 데도.
다시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끔찍하고 두려운 생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언젠가 새벽빛을 함께 받으며 그녀가 속삭여주었던 영원을 부디 지켜달라고 빌고 싶어진다.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그녀가 한 것은 약속 따위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러던 와중 에이가 균열을 만나는 일이 생겼다. 그의 손을 잡고 숨이 차도록 도망친 이후에, 그녀는 또다시 그 구멍에 휘말리게 될까 봐 그랬다며 초조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쯤 되니 그는 자기 자신이 품은 염원이 더없는 이기심으로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싫은 건 나도 싫어, 에이. 네가 바라는 건 나 또한 바랄 거고.
그러니 네가 이곳에 머무르기를 바란다면 나도 네 옆에 있을 거야.
마음을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이가 잠든 사이 홀로 집에서 나와 그들이 함께 갔던 곳을 둘러보고 있자면, 아직도 은연중에 들끓는 불안함이나 갈망 따위를 평생 묻어둘 결심이 섰다.
여전히 그는 그녀가 없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절망스럽고, 한 번 겪어보았던 이상 거짓으로도 괜찮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죽지 않는 삶이라는 건 타인이 바란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단테는 자신의 감정을 에이에게 호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호소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정해질지언정 매정해지지는 못했던 에이가 손쉽게도 그의 생각을 읽어냈을 뿐이다.
그뿐이었다.
“나는 이곳에 남지 않을 거야.”
분명 그뿐이었는데.
단테는 지금, 그가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말을 내뱉는 에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순간 환청을 들은 건가 싶어 몸을 움찔 굳혔지만, 얼굴을 감싼 온기는 여전히 따뜻하기만 했다.
비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고 돌아올 정도로 흐려졌던 이성이, 꿈속이라고 믿을 정도로 희미했던 인지 능력이 뒤늦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선명히 걷히는 시야 사이로 풍경들이 밀려 들어왔으나 결국 변하는 건 없다. 에이의 담담한 얼굴도, 차가워진 자신의 몸도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결국 잘못 들은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테는 일부러 자신의 판단을 한 번 더 부정했다.
에이가 홧김에 뱉은 말일 거야, 라는 방향으로.
“……하지만 넌 이 차원을 그리워했잖아, 에이.”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하던 손이 그러했듯, 내뱉는 목소리 또한 가늘게 떨려왔다.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는 듯했다.
얼굴이 가까워진 이 순간, 옅은 갈색 눈동자를 통해 비치는 그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초조해하고, 또 두려워하다 스스로 한계에 다다른 듯한 모습. 에이가 얼떨결에 꺼냈을 한 마디에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꼴이었다.
그는 이러다 완전히 자제를 잃고 자신의 결심을 허공에 내던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수백 번이고 되새긴 보람도 없이, 결과적으로 에이의 고통은 깡그리 무시하는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안 돼.
어느새 그는 이 차원에 머물라고 설득하는 쪽이 되어 있었으나,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엔 단테는 너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비로소 네 자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그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면 너는?”
“나는 중요하지 않아, 에이.”
그 말에 에이는 잠시 울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기 직전, 단테의 침착한 말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너는 아직도 네 ‘진짜’ 이름이 뭔지 말해주지 않았지.”
“…….”
“그 이름을 모르는 이상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너는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그러니 오롯이 그를 위한 선택은 내려주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 사실에 비참함이나 서러움 따위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끝끝내 말해주지 않았던,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다른 차원에서 온 이에게 본질을 내어줄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뿐이었다.
에이는 분명 이곳에만 남겨두고 싶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남아있는 이상 그녀는 다른 차원에서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곳에 남지 않을 거라는 네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적어도 그는 그리 판단했다. 미련을 남겨둔다면 결국 후회는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다고.
그때, 잠자코 서 있던 에이가 그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상처받을만한 말을 일부러 내뱉었으면서, 체온이 멀어지려고 하니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더욱 낮출 뻔했다.
그러나 단테가 뒤늦게 몸을 물리는 것보다 에이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한참을 붙잡고 있었던 나머지 같은 온도가 되어서 온기도 냉기도 느껴지지 않는, 단지 부드러운 감촉만이 느껴지는 손가락이 그를 얽어맸다.
상처받은 사람답지 않은 태도에 그가 멈칫하는 것도 찰나였다.
“그거면 돼?”
“뭐?”
“너한테 진짜 이름을 말해주면 되는 거야?”
에이의 눈동자가 잠시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난 순간, 단테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그 눈 안에 자리 잡았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단테를 앞에 두고, 에이는 마치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알려줄 수 있어, 단테. 왜냐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원하는 거니까.”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마치 그가 지금껏 해왔던 모든 상념을 흐리는, 또 소용없이 만드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 이어지는 옅은 한숨. 그러나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이는 행동들 사이에서 여전히 다정하기만 한 눈빛.
언제나 에이는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가져다준다. 그가 사랑에 빠졌던 순간에도 그러했듯이.
“내가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말끝에, 단테는 결국 조금 울었다.
왜 우는 거냐며 타박하는 소리가 눈가를 스치는 손과 함께 닿은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