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124/181)

124.

단테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검은색이었던 눈동자는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원래의 색깔로 돌아와 있었고, 곧 익숙하고 아름다운 보랏빛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색깔이 조금 더 밝게 변했다고 해서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거짓이었던 색은 한 꺼풀 벗겨냈지만, 단테의 속은 여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네가 이 차원에 돌아오기를 바랐다는 걸 알아.”

한참 후에야 들려온 목소리는 아주 낮은 곳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가 낯설게 들린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다가, 정작 단테가 내뱉은 말의 뜻은 놓칠 뻔했다. 내가 이 차원에 돌아오기를 바랐다고?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자신의 말을 정정하지 않는 단테의 모습이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혼란에 젖어 드는 나를 두고 단테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네가 차원을 이동한 뒤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말해 준 적이 거의 없지. 하지만 그동안 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걸, 그리고 그럴 때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나도 알 수 있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의 한 부분이 차갑게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그때 했던 생각들.

그만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모든 게 지겹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계속 이렇게 살 바에야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적도 있었고.

또 그만큼…….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렸었다. 삶이 흘러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던 그 시절로.

그런 나날들을 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고, 결국 절반 이상 성공했는데. 네가 지금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는구나.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 단테는 살짝 미소를 지웠다. 그건 내 반응을 확인한 뒤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판단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그 판단에 되려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아, 이제 알겠어.

너는 당연히 내가 이 차원에 남길 원한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래서 자꾸만 이곳에 돌아온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고 싶어 하고, 또 옛날에 무엇을 바라곤 했는지 짐작했던 거야. 그리고 그럴수록 네 짐작에 확신만 더해져서…….

“…….” 

나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단테를 흠뻑 젖게 만든 빗물은 마를 기미가 없어 보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도만 줄었을 뿐, 바닥에 동그랗게 흔적을 남기는 모습은 여전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저 물은 계속해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마치 내가 가지고 있었던 미련처럼. 흘려보내고 방치하며 사라지기를 기다리는데도 계속, 어느 한구석에는 남아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있겠다고?” 

“갑작스럽게 한 생각은 아니야.”

처음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리 갑작스럽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고. 단테는 그렇게 덧붙였다.

단테와 시선을 맞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맞닿아 있는 손을 통해 단테가 내 손을 고쳐잡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등을 위로 향하게 했던 아까와 달리, 평소에 길을 걸어갈 때 그러하듯 손바닥을 맞잡고 단단히 감싸 쥔다. 

처음에 손을 잡을 때는 우리 둘 다 어색함이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손을 잡을 때면 알아서 편한 자세를 잡게 된다. 그건 나도 그러했고, 단테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렇게 비슷해져 가는데도 늘 먼저 손을 잡아 오는 것은 단테였다. 

평소에는 그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단테가 나보다 더 손잡는 것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 이곳에 남는 것만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길이라 짐작하는 듯한 단테를 보며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단테는 늘 자신만 간절하다고 느꼈던 걸까, 하는 생각을.

그래서 이곳에 남기를 원하는 듯한 나를 설득하기보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자신의 귀환을 포기한 걸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사실 이렇게 나 혼자 지레짐작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니까.

“네게 상처를 내본 적은 없지만, 단테. 아마도 넌 지금 과거의 나와 같은 상태일 거야. 늙지도 죽지도 않는 그런 상태 말이야.”

“그건 예전에도 그랬어.”

“아니. 예전과는 차이가 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아차린 사실을 단테가 깨닫지 못할 리 없으니, 지금 단테는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단테 대신 나라도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때는 어렵더라도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 그리고 너와 마찬가지로 죽지 않는 몸이던 내가…… 이곳에 남으면서 늙어가기 시작하겠지.”

“…….” 

“그러면 너는 결국 혼자 남겨져. 완전히 낯선 차원에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

설마 내가 사라진 이후에 돌아가면 된다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을 거잖아. 작게 중얼거리자, 단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내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런데도 왜 이곳에 남겠다는 말을 꺼내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단테의 입장에서는 이곳에 남는 것보다, 차라리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단테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왜 단테가 그러지 않았는지를 알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니, 내가 보고 있지 않은 사이 한껏 복잡한 감정을 담기 시작한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단테가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면서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여기 남고 싶어 한다면.”

“…….” 

“너랑 이대로 헤어지기는 싫으니 차라리…….”

단테가 설핏 웃었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그 웃음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생의 끝까지 함께하기라도 해야지.”

저건 체념이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나를 잃게 될 것이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그러면 적어도 너의 남은 삶은 온전히 나로 채워지는 거니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 낯선 차원에 살아가게 되든 말든.”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애써 위안 삼을 만한 것을 찾는 것까지 완벽한 체념이었다.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다는 듯이 말하는 단테를 보며, 나는 일말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단테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기뻐했듯이, 단테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무척 기뻤을 텐데. 그럼에도 한 치의 아쉬움이나 미련도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이 말을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비를 맞으면서 밖에 있었던 것 또한 이걸 위해서였나? 나를 이렇게 걱정시키면서, 또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밖에 나갔던 것이?

내가 그리워했다고 말한 곳들을 보면서, 자신의 선택을 더 견고히 하려고 그랬을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아까부터 가슴 어딘가에서부터 치밀어오르기 시작한 감정을 무시할 수 없어졌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려다가, 계속해서 단테에게 손이 잡혀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팔을 잡아당겼다.

단테는 내 손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가 손목을 억지로 비틀기까지 하니 애써 힘을 풀었다. 어색하게 펴진 단테의 손가락이 얕게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놓아주는 것도 무서워하는 주제에, 내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단테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언제나 과거나 내 감정을 무던히도 회피하는 인간이었고, 그런 기질은 이번에도 아낌없이 드러났다.

아마 단테가 갑자기 밖을 나가서 비를 맞고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단테를 추궁하다 못해 단테의 생각을 듣지 못했더라면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최대한 나중에 생각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 옛날, 단테에게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을 때 그러했듯이. 

괜찮아, 우리에게 시간은 많잖아, 하고 알아서 합리화하고 있었겠지. 분명 그때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중요한 일은 되도록 외면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오래된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나 보다.

“나 좀 봐, 단테.”

다시 내 손을 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 앞을 떠나지도 못하는 단테에게 손을 뻗었다. 금세 두 손에 단테의 얼굴이 붙잡히고, 거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단테는 갑자기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에 놀란 듯 보였지만, 내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자세를 낮췄다. 아, 예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지. 단테를 달래기 위해 고심하고, 또 그 기분을 풀어주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냈던 날. 

밖에는 비가 내리고 시간은 거의 한밤중에 가까워진다는 것만 빼면, 너는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커다랗게 떠지는 보라색 눈동자도, 내 앞에서만큼은 부드러워지는 눈매도 여전하다.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단테가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게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곳에 남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와 함께 다시 차원을 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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