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123/181)

123.

현관문을 여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축축한 공기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그리고 눈앞에 있는 단테의 미소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앞에 있는 단테를 멍하니 올려다보기도 한참, 천장에서 밝게 빛나던 복도의 센서 등이 서서히 빛을 줄였다.

순식간에 찾아온 어둠과는 상반되도록 불시에 정신이 돌아왔다. 앞에 보이는 윤곽을 더듬어 단테의 팔을 붙잡자, 다시 복도의 센서 등이 켜져 눈앞이 밝아졌다.

“…일단 들어와.”

단테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당기면 당기는 대로 순순히 따라 들어오는 것 같던 단테는, 정말 발만 들여다 놓을 뿐 현관문 앞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곧바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졸지에 행동을 멈추고 단테와 현관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빨리 들어가자고 단테를 재촉할 심산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복도보다 훨씬 밝은 곳에서 마주친 단테의 모습에 순간 움찔했다.

“단테, 너…….”

마주친 직후에는 정신이 없어서 꼼꼼히 살피지 못했는데, 단테는 비에 흠뻑 젖어있는 상태였다.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맺힌 물방울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어깨에 떨어지고, 물기 어린 얼굴과 속눈썹이 조명 아래서 반짝거리며 빛났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단테가 긴 시간 동안 비를 맞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붙잡고 있는 단테의 팔이 축축하다는 것을, 그리고 천 아래서 느껴지는 체온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차갑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분명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단테에게 물어볼 만한 것을 잔뜩 생각해두었었다. 하지만 비에 흠뻑 젖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단테는 아까처럼 옅게 미소 지었다.

비를 한참 동안 맞은 사람 치고 표정은 평소와 같이 다정하기만 해서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갈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한두 시간 전부터 갑자기 쏟아졌어.”

어느 세계든 비는 똑같이 오는구나. 별일 아니라는 듯 고요하게 덧붙여진 목소리에, 나는 입을 몇 번이고 달싹거린 후에야 가까스로 문장다운 문장을 만들어 냈다.

“……그럼 그 시간 동안 계속 비를 맞고 있었다는 말이야?”

“응.”

그게 그렇게 태연하게 할 만한 대답인가. 가슴께가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가,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비가 오기 시작했으면 바로 집에 들어왔어야지, 그 시간 동안 계속 비를 맞고 있었어? 우산도 없이 나갔으면서. 대체 어딜…….”

갔다 왔길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허공에서 맴돌았다. 단테가 갈 만한 곳을 내가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실제로 이 세계에서 단테가 갈 만한 곳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나는 시선을 천천히 내려 단테의 팔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가, 손에서 힘을 풀어 단테를 놓아주었다.

어느새 단테에게서 옮은 냉기가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져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가 폈다.

“…이 시간에 어디 갔다 왔어?”

“…….”

“나갔다 온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혼자 나갔어?”

잠에서 깨어난 뒤부터 단테를 찾아 나서려고 현관문을 열기까지, 긴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마치 영겁처럼 느껴졌다. 단테가 어디 갔는지 걱정하고, 왜 혼자 나간 건지 생각하고, 비가 오는 바깥을 바라보는 동안 온갖 감정이 다 스쳐 지나갔단 말이다.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외출한다면 내가 걱정할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하지만 단테는 아까처럼 한 치의 죄책감도, 미안함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해올 뿐이었다.

“네가 너무 깊게 잠들어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

“깨울 수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없이 혼자 밖에 나갔다 왔다고?”

그 말로 내가 정말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꾹꾹 눌러 담으려고 해도 결국에는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확 열이 오르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침착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어났는데 네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서 무서웠어.”

“…….”

“정말 깨우지 못한 게 이유였다면, 쪽지라도 하나 남기고 나갈 수 있는 거잖아. 하다못해 옷이라도 제대로 갖춰 입고 나가던가. 겉옷도 없이 이 꼴로, 이 추운 날씨에 어딜 갔다 오려고 한 거야.”

나도 내가 내뱉고 있는 게 걱정인지 원망인지 모르겠다. 아, 비에 흠뻑 젖은 사람을 앞에 두고 내 할 말만 쏟아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뭐라도 덧붙이려던 나는, 지금 내 모습이 너무 꼴불견이라는 생각에 말을 멈췄다.

“계속 그렇게 문 앞에서 서 있을 거야? 너 지금 다 젖었으니까, 일단 씻고 나서…….”

“너랑 같이 갔던 곳들을 다시 둘러보고 왔어.”

갑작스럽게 날아온 대답에 일순간 말을 멈췄다. 분명 들었는데도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는데, 단테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소개해준 산책로, 오늘 보았던 강, 좋아한다고 말했던 징검다리, 그 근처의 가게, 오다가 들렀던 카페, 골목길, 전부 다. 네가 잠든 사이에 혼자서 보고 왔어.”

“……그런 곳들은 왜?”

갑자기 단테가 그 모든 곳들을 다시 가야 할 이유는 없다. 더듬을 뻔한 것을 간신히 바로 잡은 내 목소리에, 단테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거든.”

그렇게 말하더니 또다시, 내 눈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어 보인다. 나는 아까부터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돌아오는 미소가 단테의 의중을 알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태연한 대답들은, 사실 그 어떤 태연함도 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에이.”

단테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이 평소보다 더 낯설게 들렸다. 

“나도 여기 남아있을까?”

“……뭐?”

“나도… 같이.”

단테는 내 손을 깍지 껴서 붙잡더니, 고개를 내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금세 손등 위로 낙인을 찍는 듯한 감각과 함께 간지러움이 번졌다.

“같이 이 차원에 남아서, 너랑 여기서 함께 살아갈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잡힌 손이 심상치 않게 차가워져서 남은 한 손으로 단테의 얼굴을 감싸니, 아니나 다를까. 손과 마찬가지로 놀랄 만큼 차가운 온도가 느껴졌다.

때마침 물방울 하나가 단테의 머리카락 끝에서 내 손가락을 따라 흐르고, 손에서만 머물던 냉기가 가느다랗게 팔 아래로 번져나갔다.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팔을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단단히 잡힌 손은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비를 오래 맞은 것 치고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건 내 착각이었나?

가까이서 마주친 눈빛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생각에 깊게 잠겨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까맣게 잠겨 들어있는 눈과 다정한 얼굴이 대비되어서 어쩐지 위험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나를 도와주었던 이성이 아닌, 깊은 곳에 내재되어있던 본능이 경고 신호를 보내는 기분이었다. 

지금 단테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고.

굳이 표현하자면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처럼 보인다는, 그런 경고 신호 말이다.

“네가 지금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단테.”

이마까지 선명하게 느껴지던 열이나, 단테를 향했던 화는 전부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혼몽해지려는 정신 속에서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서 애썼다.

단테가 무슨 과정을 거쳐서,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너는 네가 이 세계에 남는 게 맞다고 생각해?

적어도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네게 이 세계가 한없이 낯설다는 걸, 익숙해지더라도 살아가기는 여전히 어려울 거라는 걸, 그리고 네가 온전히 이 차원을 좋아하게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 나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을 하기에 앞서, 나는 단테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나 없이 밖에 나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럼 왜 그러는 건데?”

나는 단테가 지금까지 아무 걱정도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다. 어차피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도 필요한 겸, 그리고 복잡한 고민을 잠깐 미뤄둘 겸 이 차원에 적응을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혼자 외출하고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는 단테를 보니,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단테는 내게 그 어떤 고민도 말해주지 않았고, 나는 단테의 변함 없는 태도에 다른 차원에 떨어진 것 치고는 놀라울 만큼 괜찮아 보인다며 안심했었다.

지금은 아무 걱정도 없이 이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다가, 때가 되면 선택하리라 다짐했는데.

그 ‘때’라는 것을 정확히 정해두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단테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짐작해보지 않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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