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슬슬 집에 갈까?”
산책이라고 하기엔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을 무렵. 점심이 지나기 무섭게 하늘에 구름이 많아지기 시작하고, 공기도 아까보다 더 차가워졌다.
이만하면 이 부근에서 둘러볼 곳은 다 둘러봤다 싶어, 나는 앞서가던 것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단테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던 단테는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별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에, 잠시간 그 시선을 받아내다가 몸을 완전히 돌렸다.
“피곤해? 오늘 너무 많이 돌아다녔나?”
알게 모르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기에 물어본 거였지만, 단테는 내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피곤한 건 아니라는 듯이.
그럼 대체 왜? 적어도 아까까지는 멀쩡해 보였는데. 내가 미간을 좁히고 바라보자, 단테가 잠잠한 표정을 지우고 내 손을 잡아 왔다.
“집에 갈 거야?”
“음, 네가 가고 싶으면?”
나는 이 근처에 더 둘러볼 만한 곳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직 점심때니 간다면 못 갈 곳은 없었으나, 지친 사람을 억지로 끌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밖으로 또 나오고 싶다면 잠시 집에서 쉬다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시간은 많으니까.
“아.”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얼굴을 구기는 내 모습에, 단테가 나를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응시했다.
“왜 그래?”
“아니, 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이곳에 온 뒤로 끈질기게도 외면했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더 생각하기도 싫었기에 나는 금세 딴청을 부렸고, 단테는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뭔지 물어도 안 알려줄 거지?”
“미리 말해두지만, 중요한 거였다면 네가 그렇게 물어보기도 전에 알려줬을 거야.”
“결국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안 알려줄 거란 말이잖아.”
그건 그렇지. 나는 슬쩍 웃음을 내보였고,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카페로 단테를 끌어당겼다.
“피곤한 게 아니라면 점심이나 해결하고 들어가자.”
이것저것 먹은 게 많아서 배가 고프진 않으니, 대충 구색만 맞출 생각이었다. 샌드위치 종류라면 저쪽 세계에서도 있었으니까 단테도 무난하게 먹을 수 있겠지.
단테는 내가 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오다가, 나보다 먼저 팔을 뻗어 카페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문 위쪽에서 울렸다.
눈에 보이는 김에 별생각 없이 들어온 카페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했다. 테이블이 몇 개 없는 1층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는데, 순간 카페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음, 이제는 저 놀라는 얼굴도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
처음부터 나서서 얘는 연예인 같은 게 아니라고 해명하는 생각을 했다가,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에 빠르게 폐기되었다. 생각만 해도 수치스러운 짓을 왜 해.
그래서 나는 단지 단테를 끌고 가 2층 구석 자리에 앉혀 두었다.
“넌 잠시 자리 좀 지키고 있어. 주문은 내가 하고 올 테니까.”
“같이 안 가고?”
“음…….”
아까 그 호기심 어린 표정을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난처하게 말을 흐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단테가 곧 순순히 자리를 잡았다.
“알았어, 빨리 갔다 와.”
“나 없는 사이에 갑자기 어디 가면 안 돼, 알겠지?”
“갈 데도 없는데 뭘.”
하지만 넌 갑자기 이 자리에서 증발하듯이 사라질 수도 있는 마법사잖아. 나는 일부러 뒷말은 덧붙이지 않은 채,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문하는 도중에 은근슬쩍 단테에 관해서 물어보는 카페 주인의 말을 적당히 넘기고 돌아왔는데.
내가 자리를 비운 지 도대체 얼마나 됐다고, 단테의 옆에 아까는 못 본 사람들이 생겨 있었다.
“…….”
참 빠르기도 하다. 체감상으로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진동벨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려던 자세 그대로 멈칫했다. 계단과 탁자 사이의 거리가 제법 있어 단테를 포함한 사람들은 나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저쪽의 상황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언젠간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
어쩐지 짓궂은 마음이 차올랐기 때문에, 나는 계단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저편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내 옆을 스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가는 것 같았지만, 일단 못 본 척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구경부터 하고 볼 텐데 뭘.
단테에게 말을 건 것은 두 명의 여자아이였고, 긴장한 동시에 상기된 표정을 보아 번호라도 물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단테에게는 핸드폰 자체가 없는데도 말이다. 연락을 해야 한다면 나에게 해야 할 텐데. 참 안타깝게도.
보통 연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심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상황이 마냥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더 컸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평소에 거창할 정도로 단테를 신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단순히 내가 없을 때 단테가 미쳐 돌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가?
나는 난간에 삐딱하게 기댄 채로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 이유가 저 아이들의 나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단테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사람들은 보통 얼굴에 대략적인 나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저 아이들은 잘 쳐봐야 20대 초중반으로밖에 안 보였다.
내 실질적인 나이는 저 아이들에게 언니를 넘어 다른 호칭으로 불려도 모자라는……
뭐, 그런 나이니까.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을 보면 귀여운 마음만 들지, 질투 같은 게 들 리가 없다. 압도적인 나이 차이에도 치졸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인간이 덜된 거지.
내가 흥미롭게 상황을 관전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곧 단테가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를 거절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주변을 맴돌며 머뭇거리다가, 결국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힐끔거리던 눈빛이 잦아든 후에야, 나는 슬그머니 단테의 앞에 나타났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사르르 풀리는 것이 보여 내심 기분이 이상해졌다.
“왔어?”
“응. 주문하고 왔으니까 나중에 가져오면 돼.”
막간을 이용해서 단테에게 진동벨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는 걸 손님에게 알리기 위한 물건이라고.
단테는 가만히 앉아 내 설명을 듣는 것 같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 모르는 사람들이 이 자리로 찾아왔었어.”
“어,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해버린다고? 집에 가는 길에서야 은근슬쩍 떠볼 작정이었던 나는 의아하게 단테를 쳐다보았다. 단테가 이런 걸 먼저 말할 것 같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뭐래?”
“혹시 여자친구 있냐고, 없으면 연락처 좀 물어봐도 되겠냐고.”
내가 예상하던 그대로라 별로 놀랍지도 않다.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는데, 곧장 단테의 강렬한 시선이 나를 향하는 바람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음, 그래서. 있다고 대답했어?”
“응.”
그래, 거기서 다른 대답이 나올 리 없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에게, 단테가 또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그랬어.”
“…그 말은 왜 한 건데?”
“결혼했다고는 말 못 하니까, 적어도 하기 직전이라고 말하고 다니고 싶어서.”
단테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은 건 나였다. 순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결혼을 두 번 하기로 했었나, 고민이 들 정도로 태연한 어투였다.
“여기도 약혼 문화 같은 건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살살 눈웃음치는 모습이 어이없을 정도로 예쁘다. 나는 방금 돌아간 아이들이 다시 이쪽을 보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다가, 확인해서 뭐 어쩌겠나 싶어 그만두었다.
“있긴 할 텐데, 거의 형식으로만 남아 있을 걸……. 보통 연인 사이에서 바로 결혼하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왜 자꾸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확답받으려는 것 같지?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단테를 쏘아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긍정하자 단테는 기쁘다는 듯이 웃더니, 깍지를 끼고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멀찍이서 아쉬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황급히 내 시선을 피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계속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이렇게 티 낼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비쳤다. 약각,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너 쟤네한테 뭐라고 더 말했어?”
내가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속삭이듯이 묻자, 그걸 신기하게 지켜보던 단테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안 믿는 눈치기는 했지.”
“참 쓸데없이 의심이 많은 애들이네…….”
아니면 그 정도로 네가 아깝다고 생각하거나. 흘리듯 덧붙인 말에, 단테가 내 손을 가볍게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까워할 것도 없을 텐데 말이야.”
“왜? 남들한테는 아까워 보일 수도 있지.”
내 말에 단테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내가 죽었다는 이유로 10년을 폐인처럼 살았다고 말하면 더 이상 안 그럴걸?”
……참 새삼스러운 자기 객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