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단테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해하다 못해 잔뜩 기대까지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단테가 아낌없이 자신의 기분을 드러낼 때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멋쩍어지는 건 내 쪽이었다.
나는 어색함을 지우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머리 색을 바꾼다고 극적인 변화가 있지는 않았어. 그냥 머리카락이 검게 변한 나였지.”
“그래도 궁금해.”
그 당시의 내 모습이 궁금하다며 눈을 빛내는 단테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그때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사진.
사진을 자주 찍는 편은 아니었으나 잘 뒤져보면 어딘가에서 하나쯤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제멋대로 찍고 인화해준 종이에든, 단테는 아예 다룰 줄 모르는 여러 전자기기 속에서든지 간에.
염색했을 당시의 사진만 있지는 않겠지만, 고작 머리카락 색깔만 달라진 내 모습도 이렇게 궁금해하니 다른 과거 사진을 보여준다면 더 좋아할 터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단테와 함께 사진첩이나 뒤적거리면서 노닥거리려던 내 생각은 어렴풋한 거부감이 떠오르면서 멈추었다.
거부감이 비롯된 곳은, 사진들을 살펴본다면 높은 확률로 나만 찍혀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서였다.
아마 사진들 속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겠지. 그 순간을 함께한, 내게 소중했을 사람들의 흔적을. 심지어 내가 혼자 찍혀있을 사진 속에서도 그런 추억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마냥 즐겁게 살펴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차원으로 돌아온 지 겨우 이틀이 된 지금, 나는 아직 그런 것들을 살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단테와 함께 확인할 용기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이유는 한 가지로 특정할 수 없었다. 단지 너무 오래된 기억들이라는 이유로 이러는 걸 수도 있고, 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사람들이니 다시 마주하기가 힘들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사진첩을 펼쳐볼 바에야 그런 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할 거라는 사실이지.
내가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며 침묵하자, 단테가 살짝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혹시 자신이 내 기분이 가라앉을만한 말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을 짓기에, 나는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털어내고 단테에게 대답했다.
“네가 궁금해하니까 나도 보여주고 싶긴 한데, 보여줄 방법이 없네.”
그렇게 내뱉는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말끔했다. 정말 어떤 방법도 떠올리지 못한 것처럼, 평소의 덤덤한 어조 그대로였다.
역시 사진에 대한 것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말아야지. 그러고 보니 저쪽 차원에는 사진이라는 개념이 있던가? 굳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만약에 사진기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도 마법을 통해 그 엇비슷한 걸 재현해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아주 잠깐 딴 길로 새어드는 생각 가운데, 단테가 아까와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보고 싶어.”
“보여줄 방법이 없다니까…….”
“봐도 돼?”
그 질문은 상당히 뜬금없게만 들렸다. 보여줄 방법이 없다는데 뭘 어떻게 보겠다는 건지. 나는 내게로 다시금 손을 뻗어오는 단테의 모습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작게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 바깥에서 환한 빛이 튀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햇빛과는 색깔도 온기도 다른 빛이었다. 단테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으레 그러했듯, 시야 바깥으로 언뜻 연한 보랏빛이 잡혔다.
마치 정면으로 바람을 맞은 듯 머리카락이 붕 떴다. 단테의 손가락이 내 볼을 스치고, 마치 자그마한 폭죽이 내 귀 바로 옆에서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뜨겁지만 않을 뿐 불꽃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에, 나는 찰나에 움찔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내 옆을 맴돌던 빛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내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하늘거리며 떠 있던 머리카락은 빛을 완전히 머금고 나서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라앉았다.
빛이 사라지고 눈에 어른거리는 잔상만이 남았을 때쯤, 나는 한 박자 늦게 단테가 마법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하다못해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마법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리카락 한 줌을 아무렇게나 쥐고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햇볕 아래서 밝은 갈색으로 빛나곤 했던 머리카락이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봐도 되냐고 물은 건 이런 뜻이었군.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눈을 깜빡였으나, 정작 일을 저지른 당사자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단테는 눈꼬리를 접으며 예쁘게 미소 짓더니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굳이 직접 내 머리 색을 바꿔가면서까지 봐야 했을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가끔 네 생각을 따라갈 수 없어. 진심으로.”
“그래서 싫어?”
그렇게 묻는 단테는 어떤 부정적인 답도 예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넌 가끔 이런 식으로 놀랄 만큼 뻔뻔했었지.
한결같이 웃는 얼굴에, 나도 뚱한 표정을 지우고 바람 빠지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좋아.”
* * *
머리카락은 두 시간 정도가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 단테는 그전까지 열심히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다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역시 이게 제일 잘 어울린다며 다시 엉겨 붙었다.
내 생각에 머리 색은 핑계고 그냥 붙어 있고 싶었던 것 같은데. 잠깐 피어올랐던 의심 아닌 의심은 어차피 단테가 오늘만 이러던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데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나는 단테의 품에 얌전히 안겨 손장난이나 치다가 입을 열었다.
“머리 색을 바꿀 수 있으면, 밖에 나가서 무조건 모자를 쓸 필요는 없겠다.”
단테가 쓴 마법으로 머리 색이 바뀌었던 순간부터 생각해오던 거였다. 외출했을 때 너무 눈에 띌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평범한 검은색으로 바꾼다면 이 상태로 나가는 것보단 낫겠지 싶었다.
내가 잡아당기면 잡아당기는 대로 자신의 손을 내어주던 단테는 내 말에 잠시 멈칫했다.
“에이.”
“응.”
“계속 묻고 싶었던 건데.”
단테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꼭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가봐야 하는 거야?”
“꼭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갈 수 있다면 나가는 게 좋잖아.”
“왜?”
왜냐니. 그럼 단테는 계속 이 집 안에서만 있을 생각이었다는 건가?
멀뚱히 단테를 쳐다보니, 단테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조목조목 이유를 댔다.
“일단, 이왕 차원까지 넘어왔는데 제대로 된 구경도 안 하고 가기에는 아쉽고.”
“…….”
“아까 보니까 너도 바깥 풍경을 신기해하는 것 같아서.”
실제로 내가 차원을 이동했을 때부터 좋아하던 것 중 하나가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거였다. 다른 세계에 왔다는 걸 증명해주는 듯한 경치들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지.
단테도 밖을 궁금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전부 내 착각이었나? 하긴, 신기함보다는 낯선 세상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었다. 뒤늦게 네가 원한다면 안에만 있어도 된다고 덧붙이려던 찰나, 단테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같이 밖에 나가려고 하면 네가 신경 써야 하는 게 훨씬 늘어나잖아. 나는 지금 안에 있는 것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데.”
아하. 그 이야기였군.
나는 위험하다며 만지지 못하게 했던, 대부분 전기를 사용하는 물건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확실히 밖으로 나가기에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긴 하지.
산책만 하려고 해도 신호등과 자동차에 대해서 가르쳐야 할 테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게 무엇인지부터 하나하나 알려줘야 할 터다. 나와 이 세계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단테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테에게 바깥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신경 써야 할 게 좀 많으면 어때. 단테 혼자서 밖에 나갈 것도 아닌데.
“넌 그냥 내 뒤만 잘 따라오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다 할게.”
“…….”
“나가보면 분명 재밌을 거야. 이쪽은,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네가 있던 세계보다 오락 거리가 더 발달해 있거든. 체험할 수 있는 것만 체험하려고 해도 시간이 모자랄걸.”
이렇게 말해봤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영화 정도였지만, 하여튼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오락 거리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재밌을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밖에 나가자고 설득하는 사람처럼 말을 잇다가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네가 나가기 싫다면 나가지 않아도 돼. 널 억지로 끌고 나갈 생각은 없어.”
“…나는 네가 괜찮다면 다 좋아.”
단테가 살짝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다가 순순한 태도로 말했다. 밖에 꼭 나가야 하냐고 물었을 때의 불편한 표정은 사라지고, 한결 안심한 듯한 기색이었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거부감도 없애줄 겸, 나는 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버리고 갈 일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단테는 내 말에 살짝 미소 지으면서 답했다.
“나도 네가 버린다고 순순히 버림받을 생각은 없어.”
“아니, 그렇게 대답하면 뭔가…….”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내가 난처하게 말을 흐리자, 단테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어느새 나를 안고 있는 힘이 더 강해진 것 같다면 기분 탓이겠지.
허리도 모자라 손까지 얽어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단테의 속삭임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네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