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 (116/181)

116.

다음 날 아침.

나는 방에서 나와서 창문의 커튼을 걷다가, 어제는 느끼지 못했던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몸의 시간만 멈춰있었을 뿐이지 200년이 넘는 세월을 다른 차원에서 보낸 건 변함 없는데. 나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지 않나?”

다른 세상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온 사람치고, 이곳의 물건을 다루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흐려진 기억이 기나긴 세월을 무시하고 다시금 선명해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뭔가… 습관처럼 움직이게 되는 느낌.

하지만 이 습관들도 분명 저쪽 차원에서 살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들이었다.

“…….”

그러고 보니 어제 단테의 옷을 사고 집에 돌아올 때도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입력했었지. 

한참 동안 쓰지 못했던 물건인데 손에 닿는 순간 어떻게 쓰는지 기억이 났다. 이게 어디에 쓰는 거였더라, 하고 생각해 보다가도 몸은 이미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함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확실히 내 몸은 이곳에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원을 이동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습관들이 속속히 되살아나는 걸 보면.

이 차원에 다시 적응할 수고를 덜었다는 점은 편리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이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제의 일을 되짚어 보며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렇게 햇볕을 쬐는 것조차 또 하나의 버릇이라는 걸 떠올리고 억지로 발을 뗐다.

위치를 옆으로 옮겨 그늘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자그마한 햇볕 조각이 내 다리 근처에 머물렀다.

어느 세계에서든 따뜻한 온기가 기껍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그대로였다.

“……에이?”

발등을 적시는 햇볕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것도 잠시.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단테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제 일어난 거냐고 물을 생각으로 뒤를 도는데, 단테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우와. 너 진짜…….”

“…?”

“…여기서 보니까 되게 어색하다.”

내 집, 그러니까 이쪽 차원의 집 안에 있는 단테라니. 어제 단테가 이질적인 사람처럼 보였던 것은 단지 옷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옷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눈썹을 한 번 올린 단테가 천천히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빛을 피해 그늘에 선 나와 달리, 내 옆으로 다가온 단테는 햇볕이 곧장 내리쬐는 자리에 섰다.

아침 햇살 아래로 단테의 머리카락이 더욱 선명한 색을 띠며 한올 한올 반짝였다.

“잘 잤어?” 

“응.”

다행히 이곳에서 보낸 하룻밤이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단테는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제는 살짝 안색이 어두운 것 같더니 오늘은 다시 멀쩡해졌고, 아픈 곳은 당연히 없어 보이고. 흠.

방금 일어나 흐트러진 모습인데 이건 이거대로 잘생겼다면 좀…… 세상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단테는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냐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게 없어서 그래. 그게 문제지.

하지만 불공평함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단테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긴 했기에, 나는 한 손을 뻗어 단테를 마구 쓰다듬었다.

내 거침없는 손짓에 보랏빛이 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곱슬머리였다면 이대로 엉켜버렸을 텐데, 짜증이 날 정도로 결이 좋은 머리카락은 엉키는 기미조차 없었다.

그렇게 단테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던 나는 한 박자 늦게 단테가 얌전히 내 손길을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넌 내가 이러는데 말리지도 않아?”

“응?”

“네 머리가 거의 까치집이 되어가고 있는데.”

단테가 아무리 뒤척이다가 일어나더라도 지금 내가 만들어 놓은 꼴보다 덜하진 않을 거다. 헝클어트리던 것을 멈추고 대충이나마 단테의 머리를 원상 복구하기 시작하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단테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어리둥절한 기색이던 단테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내가 널 왜 말려?”

“네 머리를 막 거칠게 쓰다듬었잖아.”

“그래, 쓰다듬었잖아.”

“…….” 

그렇게 대답하면 내가 할 말이 없다. 나는 갑작스럽게 입을 딱 다물었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단테는 서서히 밝은 웃음을 그려냈다.

그 와중에 햇볕은 여전히 단테의 얼굴 위에 머물고 있어서 미소를 더 화사하게 비추기만 했다. 

이제는 세상이 쟬 빛내기 위한 무대 같네, 젠장.

“에이,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지?”

“아니? 난 부끄러움 같은 거 없는데. 그나저나 아침이나 챙겨 먹어야겠다.” 

“이게 왜 부끄러워? 내가 맨날 말하지 않았나? 난 네가 쓰다듬는 거 좋아해.”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조용히 해.”

“부끄러워한 게 맞는지 말해주면 조용히 할게.”

그럼 그냥 조용히 하지 말던가. 나는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고, 단테는 계속 나를 조르며 뒤를 쫓아왔다.

오랜만에 함께 보내는 것 같은, 평화롭고 따뜻한 아침 시간이었다.

* * *

계란으로 대충 아침을 때우자 시간은 오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벽에 달린 달력을 넘겨 보니,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주말이었다. 

9월…… 어쩐지 덥지도 춥지도 않더라니. 한창 가을날이어서 그랬나 보다.

“단테.”

“응.”

“돌아갈 방법을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단테가 멈칫했다가, 곧이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찾을 수 있었다면 가장 먼저 너한테 말해줬을 거야.”

“그래, 그럼 오늘 이렇게 놀고 있으면 안 되겠다.”

내가 달력을 탁 소리 나도록 내려 놓자, 단테의 의아한 시선이 나를 따라왔다.

“왜 놀고 있으면 안 되는데?”

“너한테 가르쳐줘야 할 게 많으니까.”

“아…….”

안 그래도 이곳에 온 이후로 아예 움직이질 못하고 있던 단테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한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것저것 건드려보는 것 같긴 하던데, 죄다 전기를 사용하는 거라 내가 위험하다며 막았었다.

일단 완전 기본적인 것부터 알려줘야지. 음, 기본적인 거…….

“…보통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한테 뭐부터 가르쳐줘야 하지?”

이게 문제였다. 단테에게 낯선 게 많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많아도 너무 많아서 도통 무엇부터 알려줘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예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가르쳐야 하나? 이건 탁자고 이건 의자야, 뭐 이렇게?

때아닌 심각한 고민을 시작한 나와 달리, 별걱정 없는 단테는 또다시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까 위험하다고 말했는데도 저러네.

한 사람이 지내는 좁은 집인 만큼, 구경할 곳도 없었을 탐방은 단테의 발이 창문 앞에서 멈춰 서면서 시시하게 끝이 났다.

“…….” 

“…? 뭐 신기한 거라도 있어?” 

해봤자 잠깐 구경한 다음에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그 앞에서 서 있는다. 햇빛에 눈이 시릴 만한데도 도저히 창문 너머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가다가, 바깥 풍경이야말로 단테에게 가장 생소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 차원을 이동한 직후의 내가 그러했듯이.

단테를 따라 시선을 바깥으로 옮기자, 오랜만에 봐서 어색할 뿐 내게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낯설기 짝이 없는 곳에서 단테는 무엇을 가장 신기해하고 있을까. 

높은 건물?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아무렇게나 떠올리다 보니, 죄다 내가 저쪽 차원에는 없다며 신기해하던 것이었다.

음, 뭐부터 가르치면 좋을지 감을 잡은 것 같은데. 내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려던 그 순간, 단테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에이.”

“어, 응?”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다 머리카락 색이 짙은 거야?”

아. 자연스레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자, 주말 오후라고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해봤자 풍경 전체를 구경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래. 대부분 검은색 머리에 검은 눈이고, 해봤자 갈색이 다야. 여기 말고 다른 나라로 가면 더 밝은 머리 색도 있어.”

너희 차원처럼 형형색색은 아니라는 말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색의 종류가 다르다는 게 그리 중요한 사실도 아닌데, 뭐.

다들 같은 머리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게 신기하게 비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단테의 입장이 된 것처럼 새삼스럽게 바깥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옆자리가 조용해진 걸 느꼈다.

궁금한 건 그게 다인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마주쳤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보라색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향했을 때.

“너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봐도 유독 머리 색깔이 밝아 보여.”

단테의 손가락이 내 뺨을 지나 머리카락에 닿았다. 머리카락이 귀 옆에서 사르륵 흩어지는 소리가 나고, 내 것보다 뜨거운 체온이 짧게 귓바퀴를 스쳤다.

내가 아침에 단테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흐트러트리던 것과 달리, 담백하다 못해 조심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손짓이었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표정 관리에 신경을 쏟으며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내가 유난히 밝은 색깔이기는 해. 옛날에는 염색한 거냐는 말도 많이 들었었어.”

“염색?”

“응. 그러다가 짜증이 나서 정말 검은색으로 염색한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단테의 눈에 호기심이 어리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이어가던 것을 그만두고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궁금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