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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113/181)

113.

바닥에 흩어진 옷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단테가 떨리는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왜?”

“응?”

“왜 여기서는 결혼했다고 말 못 하고 다니는데?”

뭐, 그야……. 

나는 단테의 질문에 답이 될만한 것들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여긴 저쪽보다 행정 절차가 더 철저하고, 온갖 정보가 기록되는 것도 모자라 손쉽게 조회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단테와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이쪽에 기록되어있지 않다. 

그 상태에서 결혼했다고 말하고 다닌다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나의 설명에도 단테는 납득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 납득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내 말에 속상해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그럼 너랑 나는 여기서 부부가 아닌 거야?”

“응.”

“그런 게 어딨어….”

그런 게 어디 있긴. 여기 있다.

아무래도 단테가 내 생각보다도 더 남편이라는 호칭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솔직히 완전히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결혼했다는 말을 안 하고 다닌다고 해서 단테와의 관계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남편 대신 애인이라고 말하게 될 텐데. 그거나 그거나 우리 같은 상황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나.

애초에 내가 청혼을 했던 이유도, 결혼을 하나 안 하나 어차피 같이 지내고 있으니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그냥 친구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내 반응에 단테는 잔뜩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애인이 있는 사람은 남편이 있는 사람에 비해 노려지기가 쉽잖아.”

“노…… 뭐?”

“그 둘은 무게감이 다르단 말이야.”

무게감이 다르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앞에 들은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마냥 저 이야기에 수긍할 수도 없는 기분이었다.

“야, 나를 노리긴 누가 노려. 너는 지금 날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너 스스로를 걱정해야 해.”

“나는 누가 와도 한눈팔 일 없으니까 괜찮아.”

“그럼 나는 한눈팔 것 같다는 말이야, 지금?”

어이없어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앞에 두고, 단테는 뻔뻔하리만치 당연한 걸 말한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넌 잘생긴 얼굴에 약하잖아.”

“…….”

“언젠가 나보다 잘생기고 네 취향인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기왕 당당하게 이야기를 꺼냈으면 마지막까지 자신 있게 이야기할 것이지, 끝에 가서는 단테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말은 아무렇지 않게 했어도 진짜 불안하긴 한 것이다.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리고 그런 오해를 한몸에 받게 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냥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단테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내가 이런 말을 들을 만큼 얼굴에 약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도 충격이고, 하여튼 충격을 받지 않을 만한 부분이 없었다. 너무 황당하면 화를 내는 것도 잊는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농담을 해도 그런 농담을 하냐’라고 넘기기엔 단테의 걱정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테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올려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그대로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건 전부 단테가 얼굴로 나를 꾀어낼 때 고스란히 넘어갔던 내 잘못이었다. 

“단테. 네 말만 들어보면 내가 무슨, 얼굴만 마음에 들면 누구든 쫓아다니는 희대의 바람둥이 같은데.”

나는 미간 사이를 꾹꾹 누르며 도대체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사실 나도 널 못 믿는다며 유치하게 대거리라도 하고 싶지만, 이 상황에서는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일단 최대한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화를 낼 거면 나중에 내야지.

“아무리 그래도 네가 옆에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한눈을 팔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진 않거든? 아니, 말하다 보니까 억울하네. 넌 내가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 결심은 1분을 안 갔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빠르게 쏘아붙이기 시작한 나를 보고, 단테는 잠시 머뭇거렸다.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나보다 잘난 사람이 오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지.”

“그게 그 말이잖아!”

변명이랍시고 꺼낸 말이 나를 더 열 받게 만들었다. 뭐라도 내리칠 기세로 주먹을 꽉 쥐자, 단테가 몸을 움찔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널 받아들이는 것부터 얼마나 많은 결심이 필요했는데,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틈이 있을 것 같아?”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관계로 발전할 만큼 좋아한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너밖에 없을 건데, 뭘 쓸데없는 걸 걱정해?”

생각나는 대로 내뱉다 보니 열렬한 고백을 하는 꼴이 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죽도록 부끄러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말해두어야 단테가 알아들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야.”

“응?”

“아까 너보다 잘생긴 사람이라고 했지?”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은 없어.”

“…하지만, 에이…….”

“아니, 뭐가 됐든 그냥 없다고.”

내가 장담하는데 저런 얼굴은 다시 있을 수 없다. 원래 미의 기준은 주관적인 거라고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더더욱 내 인생에 단테 같은 사람은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얼굴에 약하다는 걸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불안감이 아니라 자신감을 얻어야 정상 아닌가? 거울 안 보고 살아?

이리저리 따져봐도 내게는 억울한 점밖에 없었다. 간신히 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사이,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단테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귀 끝까지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하고서.

“…그럼 앞으로도 나는 너한테 유일하다는 거네?”

“그걸 이제야 알았…… 아니, 됐다. 그래.”

고작 잠깐 열 냈다고 벌써 지치는 기분이다. 아무 데나 기대어 앉아서 한숨을 내쉬는 나와 달리, 단테는 눈에 띄게 밝아진 안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원망과 분노를 담아 단테를 노려보았지만, 살살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기쁨이 가득한 얼굴은 변함없었다.

단테가 뭘 하든 일단 내버려 두자, 금세 옆자리에 앉아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도 너밖에 없어, 에이.”

“이제 와서 그렇게 아부해봤자 하나도 안 기쁘거든? 이거 놔라.”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야. 여기까지 널 따라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 말에 나는 버둥거리려던 것을 그대로 멈추었다. 점점 더 내게 기대는 단테를 가만히 쳐다보는데, 분명 내 시선을 느꼈을 단테는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뭐든 네가 나를 두고 가는 게 무서워져서 그랬어.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다는 거 알고 그러는 거지.”

“응. 그리고 한 번만 봐달라는 의미로 이러는 거야.”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심 안 할게.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사과하는 단테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아주었다.

이래놓고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 그때는 정말 가만 안 둬야지.

한 번만 봐준다는 생각으로 몸에 힘을 푸는데, 은근슬쩍 단테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결혼하는 건 안 돼?”

“이곳 기준으로는 네가 불법체류자 같은 거라서 안 돼.”

“엄청 빡빡하다…….”

한줄기 미련을 못 버린 사람처럼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척하며 고개를 기댔다. 내 고향이 다른 곳보다 유독 철저한 곳이기도 하지. 신분증 없이는 못 하는 일이 많은 걸 보면.

불법체류자라고 하니 새삼 생각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단테가 뚜렷한 신분 없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이렇게 계속 지낼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어쩌면 결혼했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단테가 눈에 띄는 외양인 이상, 그리고 마음껏 움직이기에는 걸리는 게 많은 이상 집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을 것 같으니까. 

거의 집에만 가둬두게 될 것 같은데, 원하는 걸 다 들어준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눈치채지 못한 단테는 계속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시간 얌전히 안겨 있다가, 옷이나 마저 입어보라며 단테를 옆으로 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입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게 어딨어? 빨리 입어보고 와.”

“어차피 어울리면 그냥 다 놔둘 거라며. 보나 마나 저 옷도 잘 어울릴 텐데, 꼭 지금 입어봐야 해?”

아까까지는 입어보라는 대로 잘 입어보던 애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단테의 표정을 살폈지만, 단순히 귀찮아서 그런 건지 나랑 떨어지기 싫어서 그런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긴, 나라도 이만큼 옷을 갈아입으면 귀찮아지다 못해 중간에 주저앉았겠지.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꾹 참고, 단테의 머리를 성의 없이 헤집었다.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러면 저 방은 잠깐 내가 써야겠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급히 따라온 단테가 내 옆에서 기웃거렸다.

“왜, 무슨 일로 쓰는 건데?”

“글쎄. 네가 옷을 한 번씩 입어보면 뭐할지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냥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

“아냐, 마저 입어볼게.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인데?”

나는 짧게 시선을 내렸다가 고개를 바로 했다.

“확인해야 할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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