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언뜻 보면 동화책에라도 나올 것처럼 탁 트인 벌판 위, 공중에 뻥 뚫린 구멍들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구멍은 내 머리 위를 웃도는 위치에도 있었고, 까마득히 높은 곳에도 있었고, 하물며 바닥 근처에도 있었다.
마구잡이로 생긴 구멍들의 공통점이라면, 지금은 완전히 무너져내린 그 건물 가까이에 생겼다는 것밖에 없었다.
“유리되었던 공간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면서 생긴 것들이야.”
단테가 내 옆에서 차분히 설명했다.
“현실에 동떨어져 있던 것을 현실로 옮기면서 어긋남이 발생한 거지. 어쩌다가 저 공간이 갑작스레 붕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구멍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없어져.”
“…그래?”
사실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냥 설명하는 사람이 저렇게 태연한 걸 보니 걱정할만한 건 아니구나 싶은 정도였다.
그럼에도, 갑작스레 치솟아 올랐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어떤 기억이 떠오르려고 했다. 이런 무저갱을 언젠가 본 것 같은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분명, 아주 오래전…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봐야 할 정도로 오래전에…….
이 차원에 오기도 전에.
잠깐만, 뭐라고?
“에이!”
희미했던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자리 잡아가기 직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마샤가 뛰어오고 있었다.
“마샤!”
반색하면서 마샤를 부르니,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내 앞에 다다른 마샤가 단번에 내 팔을 붙잡았다.
그 박력에 움찔하던 순간, 고막을 찢을 듯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너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착지는 안전하게 했고? 왜 여기 떨어졌어? 아까 그 손등은?”
“잠깐, 잠깐만. 나 멀쩡해.”
“멀쩡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멀쩡했던 거 맞아?”
당연하다는 듯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는다. 단테도 그렇고 마샤도 그렇고, 나를 향한 신뢰가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 억울해하기에는 전부 내가 자초한 거긴 하지. 남몰래 한 번 더 반성하며, 나는 마샤에게 몸 검사를 빙자한 추궁을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그리고 그 야단 아닌 야단을, 마샤의 뒤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이렇다 할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있는 사람.
“케이드 씨.”
“…….”
마샤가 금방 돌아올 거라고 했던 단테의 말은 케이드가 그쪽으로 갔기 때문이었나 보다. 여전히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마탑에 있던 두 사람이 전부 이곳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체감상 아주 오랜만에 보는 케이드는 다소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만 보면 마음고생을 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럴 리는 없을 테고… 피곤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겠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나를 잠깐 일별한 케이드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정령을 찾습니까?”
“아뇨. 돌려보내신 거 아니에요?”
아까 단테와 이야기하던 도중, 무언가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전에 케이드가 각인은 정령을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마침 타이밍이 맞아떨어지기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급하게 돌려보낸 감은 있긴 하지. 나는 눈을 한번 굴린 다음 케이드에게 물었다.
“소환을 유지하시는 게 많이 힘들었나요?”
“예. 피로감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더군요.”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거의 고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신경이 예민해지면 다시 돌아오나 보다. 하지만 나는 늘상 하던 대로 그 말을 맞받아치지 않고, 단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케이드 씨 덕분에 아무도 안 다치고 끝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
“신세를 진 셈이니… 나중에 부탁할 거 있으면 편하게 부탁하시고요.”
물론 나한테 부탁할 일은 없겠지만, 내가 아닌 단테에게는 있지 않을까? 다소 머쓱하게 생각하는데, 케이드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입을 열려고 했다.
갑자기 그 사람 머리 위에 있는 구멍이 찢어지듯 크기를 키우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겠지.
“……어.”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듯 순식간에 커진 그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케이드를 삼킬 것처럼 달려들었다.
구멍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에 대한 의문이나, 그 구멍이 정말 지옥같이 까맣다는 사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그때 할 수 있었던 거라곤, 케이드가 그 구멍에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에 옆으로 세게 밀치는 것뿐.
누군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내 시야를 새까맣게 덮쳤다.
마치 몸 안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도 모자라 방금까지 두 발로 밟고 있던 땅이 그대로 무너지고, 낯익고도 낯선 추락의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아까 건물에서 뛰어내릴 때도 이런 기분이었는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
이성을 마비시키는 긴장감에 헛숨을 들이키는데,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아주 작은, 미세한 것이라도 자네를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면, 차원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 그게 이런 말이었나.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차원에 어떻게 넘어왔었지?
……지금처럼….
깊고 아득한 구멍으로 떨어져서…….
* * *
그 몸은 자네가 돌아갈 날만을 준비하고 있는 거야.
사라졌던 구성품이 본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을 때, 한치의 위화감도 없도록.
* * *
나는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허억, 하는 소리와 숨이 급박하게 흘러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번쩍 밝아진 시야가 선명하지 못한 풍경을 비추고, 심장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본능적으로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파악하려고 했으나, 불안정한 몸의 상태를 따라가듯 사고가 뚝뚝 끊겼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멍으로 떨어졌어. 떨어졌는데, 그리고.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틀며 바르작거렸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내 손을 잡아 왔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뿌리치려다가 간신히 멈추었다.
“…단테.”
“…….”
흐릿한 초점 사이로 단테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잡혔다. 표정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내 손을 단단히 잡아주는 힘과 전해져오는 온기에 서서히 긴장이 빠져나갔다.
단테는 바로 옆에서 자리를 지키며 내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단테와 내 손의 온도가 같아질 때쯤, 나는 비로소 호흡을 평소대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마침내 머리가 제 기능을 할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단테, 여긴 어디…….”
무거운 몸을 일으키던 나는, 그대로 말을 잃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또렷해진 눈동자가 머릿속으로 밀려오는 풍경을 하나하나 새겼다.
이곳은 내게 낯설지 않다. 아니, 낯설지 않다 못해 익숙하기까지 했다. 이 풍경이야말로 한때 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믿었건만.
저 깊은 곳에 묻혀있던 기억이 쏜살같이 되감기고, 위화감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경악과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 순간 나는 많은 것을 알아차렸고, 동시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많았다. 어쩌면 이곳은 꿈속일 수도, 환각일 수도,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피부에 닿는 공기가 그 생각들을 방해했다. 다른 곳일 수가 없었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잊으려고 했던, 잊고 있었던, 하지만 끝끝내 잊지 못했던 곳.
내가 본래 있던 차원.
“…….”
침대 옆에서 흘러나오는 인공적인 빛이 내 얼굴을 희게 비추었다.
아주 옛날,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 끝도 없이 되새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허상이 아닌 실제로 눈에 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는데, 왜 이제 와서.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오는 현기증 사이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마주친 풍경에서 짙은 향수를 느꼈다.
그 향수보다도 더 강한 두통 또한.
“너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신음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희미한 말 뒤로 단테의 대답이 들린 것도, 아닌 것도 같았다. 이 와중에 대답을 제대로 들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나는, 내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같이 오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과 함께.